소설리스트

112. 저 왜 아픈지 알 거 같아요. (112/146)


#112. 저 왜 아픈지 알 거 같아요.
2023.04.20.


이윽고 옆구리에 박힌 낙인을 한동안 보던 앙브흐의 동공이 분홍빛 머리칼과 함께 흔들거렸다.

벌건 대낮에 맨살을 드러낸, 그냥 맨살도 아니고 제물을 뜻하는 낙인을 꺼낸 슈가가 숨을 참다가, 마른침을 삼키고, 갈 곳 잃은 눈을 이리저리 돌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앙브흐가 시선을 올려 슈가와 눈을 맞췄다.


“확실히 희미해지긴 했는데? 여기, 여기 모서리 부분 말이야.”

“정말요?”

“응. 내가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지만, 전이랑 비교할 필요도 없이 중앙 부분에 비해 모서리 부분이 확실히 희미해.”

아이가 걷었던 셔츠를 내려준 앙브흐가 야무지게 긍정하자 슈가는 그 나이답게 입을 크게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죠? 욱신거리면서 아프긴 했지만, 확실히 희미해지고 있는 거 맞…….”

“뭐? 아팠다고? 언제부터? 아까는 아프지 않다고 했잖아? 그런데 아파?”

슈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앙브흐는 아이의 양 뺨을 잡고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어…… 그게 그러니까.”

“일단 의사를 불러야겠어. 이왕 부르는 김에 몸도 다시 점검하자. 아니, 아니지. 저택에 상주하는 의사로는 부족하니까 황궁에 가서 황녀 전하께 잘 부탁드려서.”

“낙인! 낙인 부분이 아파요!”

물독이 터진 듯 줄줄 흘러나오는 앙브흐의 속사포에 슈가는 어쩐지 낙인이 한층 더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옆구리를 찌르는 아픔이 아니라 별이 쏟아지듯 걱정과 애정, 호의로 반짝이는 앙브흐의 눈동자에 신경을 빼앗겼다.

누군가가 자신을 온전히 눈에 담고, 애정으로만 봐준다는 사실에 솜털을 삼킨 듯 속이 간질간질했다.

그 기분에 푹 잠긴 슈가의 표정이 보들보들하게 풀렸다.

하지만 곧이어 갑자기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불청객처럼 극심해진 통증에 저절로 목을 움츠리며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아이의 몸이 눈에 띄게 경직되자 앙브흐는 고통의 원인인 낙인을 확인하기 위해 셔츠를 벗길 기세로 손에 힘을 줬지만, 그녀의 손보다 더 큰 손에 잡혀 멈췄다.


“애 옷은 대뜸 왜 벗기려고 들어.”

“아이작?”

“아가씨,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다짜고짜 그러면 애도 곤란하잖아.”

옅은 한숨을 내쉰 아이작이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슈가. 넌 애초부터 아프면 아프다고 참지 말고 말하라고. 뭐 좋을 게 있다고 자꾸 참아.”

대체 언제 온 건지 앙브흐의 손을 잡아 내리며 슈가의 정수리를 툭, 가볍게 친 아이작이 두 사람이 공황에 빠지기 전에 상황을 정리했다.

앙브흐는 마르고 거친 손이 덮어 보이지도 않는 제 손을 토끼 눈을 뜬 채 내려다보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맞아. 아프면 아프다고 해!”

그녀답지 않게 대단히 단호하고 엄중한 표정으로 슈가를 나무랐다.


“다시는 숨길 생각하지 마. 너는 내가 책임지고 있으니까. 네가 아프면 나도 아파!”

“그래. 아가씨도 이렇게 말하니 혼자 끙끙거리지 말라고…….”

앙브흐의 말에 강한 긍정을 표하던 아이작이 말끝을 흐렸다.

방금 그냥 넘어가기 좀 애매한 말을 들었는데.

그는 앙브흐의 도톰한 입술이 열리기 전에 다급히 먼저 말했다.


“아니, 잠깐, 뭐라고요? 슈가가 아프면 아가씨도 아프다고요?”

“아프죠! 아이가 아프다는데 아이작 씨는 아프지 않나요?”

“그게 무슨 소리십…….”

“마음이요, 마음! 슈가가 아프면 제 마음이 미어진다고요!”

“아니, 그러니까 실제로 아픈 게 아니라.”

“실제로 아프다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슈가의 정수리에 손을 얹은 아이작과 아이의 손을 잡은 앙브흐는 숫제 다투기라도 하듯 진지한 얼굴로 티격태격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를 잡은 손은 놓지 않아서, 둘 사이에 낀 슈가는 삼켰던 한숨을 폭 내쉬었다.

두 사람 다 저를 걱정해서 저런 반응을 한다는 사실을 안다.

지금도 여전히 아프지만 두 사람의 온기가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더 혼나지 않는 거 같아서 다행이야.

그렇지만…….


 


“그러니까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시냔 말입니다.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이런 말은 그럴 때 쓰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슈가가 아파서 저도 아픈 건데 그럼 뭐라고 해요?”

답답한지 잠시 허공을 보다가 고개를 흔들어버리는 아이작과 그런 아이작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앙브흐까지.

분명 황녀 전하와 무섭지만 친근한 기사님도 저런 분위기였던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 두 사람도…….

제가 가족으로 여기게 된 이들의 사이가 좋은 것에 감사하자.

정작 그 가족들은 그런 방면으로는 서로가 눈치 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지만.

영리한 아이인 슈가는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현명한 판단을 했다.

그냥 눈을 흐리게 뜨자. 난 아무것도 못 보고 못 듣는 거야.

슈가는 왁왁하며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빈손으로 제 낙인을 문질렀다.

아까보다 더 아픈 거 같아. 아니, 더 아파.

아이작이 제 머리를 툭툭 두드렸을 때부터 낙인이 더욱 날뛰고 있었다.

일견 성의 없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은근한 애정은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아이작에게 물어본다면 대번에 부정하면서 투덜거리겠지만, 말보다 행동이 정직한 법이다.

무의식적인 건지 앙브흐와 옥신각신하는 중에도 아이작은 슈가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도닥거리기도 했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던 슈가는 어렴풋하던 구상이 정답에 가깝다는 사실을 거의 확신했다.

전부터 어렴풋이 그렇지 않을까? 그런 거 같은데? 라고 거듭 생각은 했었다.

누군가가 온기를 나눠줄 때, 그 몽글몽글한 따뜻함이 제 가슴을 잔뜩 채워 빵빵하게 할 때.

낙인이 아프다.

슈가가 행복할 때. 행복을 나누어주고, 나누고픈 이들과 함께 있을 때.

마치 너는 그래서는 안 된다며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그 경고 방식이 어찌나 음습한지 고통의 강도만 따지자면 요란하기 그지없건만, 오롯이 낙인의 당사자만이 견뎌야 했다.

슈가가 생각에 골몰한 사이 줄다리기가 끝난 건지 앙브흐와 아이작이 번갈아 말을 걸었다.


“……가. 슈가. 많이 아파?”

“낙인이 아프다니 눕혀도 소용없을 테고, 의사라도. 아니 의사에게 낙인을 보일 수는 없고.”

왼쪽,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둘을 번갈아 올려다보던 슈가가 아픔으로 창백해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아파요.”

“그게 웃으면서 할 말이냐.”

아이의 말꼬리를 잡은 아이작이 투박하게 타박했지만, 그 목소리의 기저에 깔린 걱정을 알아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심지어 툭 내뱉은 본인도 뒤늦게 깨달은 익숙하지 않은 짓을 했다는 듯 괜히 뺨을 긁었다.


“그러고 보니 손을 잡으면 아프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 맞아요. 맞아, 그렇게 말했었지!”

아이작의 말에 앙브흐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슈가에게서 손을 거두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거두려고 시도했지만, 슈가가 둘의 손을 꼭 잡는 바람에 시도에 그쳤다.


“전에도 말했지만, 아픈 것보다 손잡는 게 더 좋아요.”

일견 미련스러운 고집처럼 들리는 그 말에 앙브흐와 아이작은 놓으려던 작은 손을 되려 꼭 마주 잡아주었다.


“그리고 저 왜 아픈지 알 거 같아요.”

“우리가 손을 잡으면 아프다고 했잖아. 지금도 그러는 걸 보니 전의 그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쭉 그래왔던 거냐? 설마 이제까지는 그냥 참았던 거고?”

“그…… 음.”

설명이라기보다 해명을 요구하는 아이작의 여우 눈이 반개하자 슈가의 고개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인 슈가는 제 딴에는 대답을 피하려고 꼼지락거리며 앙브흐와 아이작을 흘긋거렸지만, 그 시도를 두 사람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무튼 이유를 알았어요.”

지나가던 원숭이가 들어도 티 나게 돌린 말이었지만, 서로를 향해 눈짓한 아이작과 앙브흐는 일단 아이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아픈데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아픈 원인이 가장 중요했으니까.


“두 분과 함께 있어서요.”

슈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에 반해 꽤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작은 더 참지 못하고 아이의 콧방울을 잡아 늘렸다.


“아까부터 그 이야기를 하고 있잖냐!”

“아, 아니이. 지금은 그 이유지만, 혼자 있을 때도 아픈 적이 있단 말이에요.”

슈가는 코맹맹이 소리로 항변했지만, 듣는 앙브흐와 아이작의 속은 또 터졌다.

저 말은 결국 혼자 아픔을 견뎠다는 말이지 않나.

속상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앙브흐와 눈이 마주친 슈가가 곧바로 이어 말했다.


“혼자 있기는 했지만!”

“했지만?”

“같이 있었던 때를 떠올렸으니까, 함께 있을 때랑 마찬가지였어요.”

슈가의 말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두 청자는 아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아이작은 속으로 탄식했다.


‘아프지만 손을 잡는 게 더 좋아요!’

눈물방울을 매단 채 활짝 웃던 그때의 슈가를 떠올린 아이작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아이가 특정한 사람을 ‘가족’으로 여기고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챈 지 오래다.

그리고 그 ‘특정’의 울타리에 자신이 들어간다는 것도.

다만, 깊이 생각하면 등이 간지러워서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애초에 가족이나 애정같이 빛나는 것과는 인연이 없는 가문의 그림자에서 자라기도 했고.

그리고 슈가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이자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슈가가 생각하는 대로의 가족의 그림에는 황녀 전하도 계실 텐데, 그분 곁에는 당연히 주인님도 자리하겠지.

그럼 결국 자신과 주인님이 가……족?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속이 간지러운 게 아니라 등줄기로 오한이 흘렀다.

맙소사 그 주인님과 가족이라니. 진심으로 농담으로도 쓸 수 없는 말이지 않나.

농담으로 쓰고 싶지도 않고.

다음 순간 아이작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아니, 잠깐만. 지금까지의 이야기 흐름으로 보면 슈가의 입으로 나올 다음 이야기는 분명…….


“그러니까 제가 찾은 이유는.”

몇 번이나 망설이던 슈가는 끝까지 자신이 입을 열기를 기다리는 앙브흐와 아이작을 향해 간신히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의 입에서는 기어코 아이작과 크라이어를 가족으로 묶어버리는 폭탄이 터져 나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