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지금이라도 전쟁을 준비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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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지금이라도 전쟁을 준비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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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지금이라도 전쟁을 준비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2023.05.08.
목 안을 긁어내리는 듯한 낮은 소리가 물결이 되어 흐르자 올리비아는 화를 내던 것도 잊고 귀를 쫑긋거렸다.
그가 소리 없이 웃거나 미소 짓는 건 종종 봤지만, 저렇게 소리 내어 웃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고작 그 웃음소리 하나에 짜증이 다 풀려버린 올리비아는 그런 자신이 허탈한 듯 그의 팔을 퍽퍽 때렸다.
“아무튼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자를 어떻게 할까?”
“없애버리면 간단하겠지.”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거슬린다고 그냥 죽여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속 시원하고 편할까.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다면 크라이어는 기꺼이 티슨의 목숨을 거두고 상처 하나 없이 돌아오리라.
하지만 그랬을 때 그레타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낙인에 대한 실마리가 겨우 잡혔는데 섣불리 그녀를 들쑤시는 일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머리가 터질 듯이 윙윙거렸지만,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어서 올리비아는 관자놀이를 짚고 끙끙거렸다.
그런 그녀의 동그란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크라이어가 손을 뻗었다.
“네가 전에 내가 말했었지.”
두 사람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낙인을 지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는커녕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조차 깜깜했을 무렵.
올리비아는 크라이어를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널려 있고, 내가 뭘 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일부터 한다.”
그의 말에 그녀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오물거리다 이내 목을 세우고 등을 똑바로 폈다.
어깨를 펴고 턱을 당긴 그녀의 눈동자에 푸른 불꽃이 팍, 하고 터지는 것 같았다.
“실종자 문제부터 시작해야지.”
“정답이다.”
둘은 한동안 서류의 한 문장, 한 단어까지 세세하게 살피며 몰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뻣뻣한 뒷목을 누르며 올리비아가 앓는 소리를 내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대륙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이유는 결국 고대신이 정화인지 나발인지를 원해서였지?”
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크라이어는 막힘없이 답했다.
“그래.”
“그렇다면 고대신을 위한 제단에서도 똑같은 미친 짓을 하는 걸까? 그 안에서 실종자들을 데리고 전쟁을 하지는 못할 거 같은데. 결국 뭘 하려고?”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상상력을 동원해도 무자비하고 쪼잔한 신의 제단과 끌려온 사람들의 조합으로 올리비아가 떠올 릴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피를 뿌리는 거겠지?”
“글쎄. 고대신은 대륙을 불태우길 원했지만, 피를 원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만.”
“그게 그거 아니야? 어쨌건 사람들이 다 죽길 원한다는 거잖아. 아니, 이것도 이상해. 대륙 규모의 일을 도모하면서 그에 비하면 병아리 눈물방울 만큼도 안되는 사람을 미리 정화한다고? 맛보기야 뭐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말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개미 다리만큼도 예상할 수가 없다.
보니타의 움직임을 살펴도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는 없으니…….
올리비아는 고개를 휙휙 흔들어 빙빙 도는 생각을 털어냈다.
사냥제 때와 다를 거 없어.
뭘 노리는 건지 알 수 없고, 계획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어쨌든 막을 건 막고 수습할 건 해야지.”
그리 말한 올리비아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꾸역꾸역 말을 꺼냈다.
“실종자 탐색에 제단까지 확인해야 하잖아. 당연히 출장이 길어질 테니 떠나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가야겠네.”
올리비아는 흐릿하게 뜬 눈으로 서류의 산맥을 바라보았고, 크라이어 역시 그답지 않게 피로한 낯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
황제의 호출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슈가도 순조롭게 건강을 회복해 야무지게 밥을 챙겨 먹고 있을 무렵.
제국에 머무는 외교관들은 때아닌 황녀의 호출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 채 술렁이고 있었다.
“이런 때에 갑작스러운 호출이라니……. 게다가 또 야외지 않습니까.”
“지난 사냥제처럼 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까요?”
예정에 없던 야외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라는 초대장을 받고 몇몇 외교관은 걱정을 감추지 못했고.
“설마요. 제국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리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제국의 모습을 과시하려고 일부러 예고도 없이 초대했겠지요.”
몇몇은 제국의 속셈을 헤아리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그 어느 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레타는 황녀가 자리할 곳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올리비아가 아니라 그녀의 뒤에 자리할 크라이어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황녀의 낯짝을 보고 싶기도 했다.
그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어서 손끝이 새파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갔으니까.
지난밤, 그레타를 찾아온 보니타는 메마른 얼굴로 말했다.
‘제단에 필요한 인간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습니다. 지난 실종 사건 기억하시지요.’
‘그 얼치기?’
‘네. 신을 위한답시고 쓸데없는 짓을 한 놈 때문에 실종사건에 황실이 예상보다 빨리 개입했습니다.’
또 그 여자였다. 제국의 황녀.
크라이어가 곁을 지키고 있는 여자. 비록 제국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기 위해 그가 자의적으로 머물고 있다고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아.
그레타는 저도 모르게 이를 까득까득 갈았다.
오늘도 코피와 피눈물을 한바탕 쏟았고, 지금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건 반반한 황녀와 무표정한 보니타였다.
보니타는 한참 동안 앞으로 어떻게 제물로 쓸 인간을 확보할 건지 계획을 늘어놓다가 별안간 물었다.
‘지금이라도 전쟁을 준비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왜 굳이 제단에 필요한 피를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으로 수급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고작 그 정도로 피와 불을 뿌린다고 신을 온전히 부를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신께서 고작 인간 몇을 바친다고 오실 리가 있나.
하지만 지금 그레타에게는 신의 조각이라도 필요하다.
정확히 말하면, 매시간 매초 몸 안쪽부터 살라 먹는 힘의 대가를 대신 지불 할 피와 불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분께서 계획이 있으시다고 하셨는데. 전혀 보이질 않더군요. 황궁을 안쪽부터 정화하겠다고 하셨습니까?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보니타의 말이 귓가에서 웅웅거렸지만, 그레타는 귓바퀴를 세게 문질러 떨쳐냈다.
전쟁을 일으키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틀기보다 쉬운 일이다.
크라이어가 앞장서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가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레타도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나 당연한 사실을 모르고 떠드는 도구 따위의 말은 중요하지 않아.
심지어 제가 뭔데 감히 신의 선택을 받은 그분께 쓸데없는 짓을 하질 않나, 이젠 그분의 의중까지 의심하다니.
그레타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보니타를 응시하며 속살거렸다.
‘황녀 궁의 사용인이 갑자기 제거되었어. 어떻게 된 일이지?’
‘불량품이어서 처리했습니다.’
‘내게 알리지도 않고? 그건 필요하다고 했잖아.’
‘당장 필요하십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게 다시…….’
보니타의 삭막한 얼굴과 그보다 더 단조로운 목소리를 떠올린 그레타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건방진 것.”
보니타 하인데르. 저 스스로 무릎으로 기어와 신의 발치에 엎드렸으면서 제멋대로 굴다니.
말을 듣지 않는 도구는 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보니타는 아직 쓸모가 많은 도구다.
경고 정도는 해두는 편이 좋겠지.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도구에 조금쯤 흠집이 나도 상관없다.
어차피 망가져 있는데 흠 하나둘 늘어나는 것일 뿐이니.
보니타가 고대신을 섬기게 된 이유를 그녀를 신의 길로 인도한 당사자로서 누구보다 잘 아는 그레타는 웃었다.
가장 어두운 부분을 푹 찔러 긁어내면 꽤 좋은 경고가 되지 않겠나.
게다가 보니타를 위해 준비할 ‘경고’는 아주 질 좋은 제물이 될 것이다.
신께서는 모든 인간을 정화하라 명하셨지만, 그중에서도 차이가 있는 법.
크라이어가 선택받은 ‘첫 번째 전사’이듯이 제물에도 급의 차이가 있다.
다만, 과연 신의 관심을 받는 것이 과연 인간에게 좋은 일일까.
좋은 뜻으로 시작해도 좋은 결과가 나지는 않는다.
하물며 자비로운 신이 좋은 뜻으로 내리는 관심이라면 더더욱 좋지 않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자비한 신의 비비 꼬인 관심은 어떨까.
가학적인 상상을 하며 기분이 풀린 그레타는 이전보다 두통이 확연히 나아짐을 느꼈다.
다만 여느 인간들이 그렇듯이 그레타도 제가 처한 상황과 위치를 제대로 살피는 대는 형편없이 실패했다.
현재 고대신을 관심을 받는 이들 중 가장 으뜸인 이가 그레타 자신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은 결코 다른 인간들과 같지 않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을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훑어보던 그녀가 입꼬리를 뒤틀었다.
이 대륙에 하등 쓸모없는 것들이 우글우글 몰려 있지 않나.
모여서 하는 일이라고는 각자의 욕망을 이리저리 재면서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
소위 높으신 분들만 그럴까. 그녀가 본 온 대륙의 인간들이 그러했다.
온 대륙이 불타길 원하시는 고대신의 바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대륙에 기생하는 것들은 모조리 정화해야만 한다.
그와 자신을 제외한 대륙 전부가 불타는 건 얼마나 황홀한 광경일까.
미래를 그리면 몸을 쥐어짜는 아픔이 덜어지자, 그레타는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제 바람을 그리고 또 그렸다.
“다들 모였나.”
그레타가 망상에 젖은 사이, 올리비아와 크라이어가 마지막 남은 빈자리를 채웠다.
외교관들은 찌르는 햇살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빛을 받아 불꽃처럼 일렁거리는 새빨간 머리와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 눈동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 중 두 사람만은 올리비아가 아니라 그 뒤의 크라이어만을 바라보았다.
그저 어딘가에 있기만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내뿜던 남자는 마치 발톱을 숨긴 짐승처럼 얌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레타의 눈이 황홀경과 기쁨, 설렘과 그보다 질척한 일방적인 감정으로 빛났다면.
열없는 인형 같은 티슨의 검붉은 눈은 아주 미미한 흥미와 동경을 담고 있었다.
그는 그레타의 뒤에서 여느 호위들처럼 평범하게 선 채 크라이어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