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그야 계속 보고 있으니까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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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야 계속 보고 있으니까 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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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그야 계속 보고 있으니까 알죠.
2023.06.12.
‘아니, 황녀 전하께서는?’
‘간다.’
답을 주지 않고 그를 지나치는 크라이어를 향해 다시 입을 벌리려던 아이작은 곧바로 다시 다물었다.
크라이어의 양팔에 안겨 곤히 잠든 올리비아가 흘끗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작은 몇 시간 전 과거 자신의 멱살을 잡았다.
역시 알아서 잘 하시잖아?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어.
크라이어의 뒤를 쫓아 왕궁에서 인기척이 없는 한적한 방에 도착한 아이작은 자신이 열과 성을 다해 깨끗이 치운 침대에 고이 눕혀진 올리비아를 보고 물었다.
‘괘, 괜찮으신 겁니까?’
‘찢어버리긴 했더군.’
물론 그 뒤에 돌아온 지극히 태연한 크라이어의 뜬금없는 답에 아이작은 잡았던 멱살을 고이 풀어주었다.
늘 그렇듯이 주인님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작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진짜 찢고 오셨군.
그보다 기분 좋으신 거 같은데.
얼마간 크라이어의 눈치와 올리비아의 상태를 더 살핀 아이작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조용히 그 자리에서 사라지기로 했다.
스치듯 본 크라이어의 목덜미에 남은 자국 같은 건 전혀 보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면서.
그러고 보니 목에 난 그 자국은 뭐였던 걸까. 언뜻 보면 입술…….
아주 잠시 그쪽으로 의식이 흘러 들어갔지만, 아이작은 곧바로 정신을 꽉 잡았다.
그게 뭐긴 뭐야! 아무것도 아니지. 아무것도 못 봤다고? 아니지, 아무것도 없었다고.
“으으, 제발 날 보내줘. 으, 으윽.”
잠시 먼눈으로 과거를 회상하던 사이 아이작이 제압했던 남자, 실종자 중 중증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남자가 늘어진 직후, 아이작의 곁에 몽실몽실한 분홍색 머리통이 쏙 솟아났다.
“……작, 아이작?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어요?”
제 팔을 톡톡 두드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앙브흐의 목소리에 아이작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황녀 전하께서 타렌가의 아가씨에게 맡기신 일을 거들고 있던 참이었다.
세간에는 어떤 고약한 단체에 납치당했다가 돌아온 피해자들을 돌보는 것이라 알려졌지만, 실상은 고대신의 제단에 노출되어 심신이 피폐해진 이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작보다 훨씬 심각한 후유증을 겪고 있었다.
앙브흐는 아이작에게 전말을 전해 들은 뒤 눈물을 글썽거렸고, 올리비아는 그런 그녀에게 귀환한 피해자들을 맡겼다.
이들은 비록 집으로 돌아왔지만, 평범하게 일상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이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제국 각지에서 실종자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들었지만.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요. 제발. 아니에요. 내 딸이.’
‘우리 남편이 없다고요? 그럴 수가 있어요? 그, 그 사람은 덩치도 크고…….’
그렇게 몇몇은 죽은 이를 가슴에 묻으며 고향으로 돌아갔고, 몇몇은 절망을 이기지 못했으면, 또 다른 몇몇은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을 함께 돌보기를 자청했다.
‘자꾸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데…… 이게 대체.’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저런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앙브흐는 담담히 전했다.
‘납치당하였던 동안 아주 좋지 않은 약물에 중독되었어.’
그렇게 앙브흐를 필두로 아이작과 슈가 그리고 더 많은 이가 심장에 대못이 박히고, 심적으로 씻기 힘든 상흔을 입은 이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아이작은 정신을 놓아버린 남자의 자세를 편하게 고쳐주었고, 그런 그의 뒤쪽에서 앙브흐가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괜찮아요?”
제 팔 쪽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앙브흐를 빤히 내려다보던 아이작이 이내 그녀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크흠. 괜찮습니다. 그보다 자꾸 그렇게 묻지 않아도 괜찮다니까요.”
“이런 내가 귀찮아요?”
몽실 거리던 앙브흐의 머리카락이 축 늘어지자 아이작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니, 왜 또 말이 그렇게 되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 괜찮은데 자꾸 물으니까.”
“귀찮지 않으면 됐어요!”
아이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언제 처졌냐는 듯 발랄하게 답한 앙브흐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
“괜찮다, 괜찮다. 해도 믿을 수가 있어야죠.”
앙브흐가 아이작의 팔을 거침없이 조물조물 만지자 그는 기겁하며 제 팔을 흔들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봐요. 역시 전보다 말랐잖아요. 안 그런척해도 다 알고 있다고요.”
“그걸 왜 알고 있는 겁니…… 아니, 그만 좀!”
아이작은 세게 팔을 휘둘러 단숨에 앙브흐를 떨쳐낼 수 있으면서, 혹여 그녀가 다칠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끙끙거리며 팔을 빼내려고 했다.
그가 흔들면 흔드는 대로 팔을 잡은 채 같이 흔들리던 앙브흐가 아주 쉽게 답했다.
“그야 계속 보고 있으니까 알죠.”
그 간단한 답에 아이작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잠깐 얼이 빠졌던 아이작은 이내 귀 끝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팔을 다시 흔들었다.
“아, 알겠으니까 이거 좀 놓으시죠.”
“좋아요. 확인했으니까. 그보다.”
앙브흐는 아이작의 팔을 흔쾌히 놓아주면서 동시에 그의 곁에 바싹 다가섰다.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제 검지를 세워 좌우로 흔든 그녀가 말했다.
“괜찮다는 거 믿지만, 걱정은 하고 싶어요. 그러니까 내가 성가시면 그렇다고 말 해줘요.”
“안 그럽니다.”
“네?”
“귀찮거나…… 성가…… 아무튼 그럴 일 없다고요.”
아이작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바람에 앙브흐가 귀를 쫑긋거렸지만, 그는 다시 말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탓에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그녀는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발랄하게 그의 팔을 짝, 하고 내려쳤다.
“여기 잠시만 있어 봐요! 저 남자를 끝으로 힘써야 할 일은 끝났으니까.”
아이작이 잠시 쉬어도 된다는 사실을 야무지게 전한 앙브흐가 종종걸음으로 어디론가 바쁘게 사라졌다.
신음 하나 내지 않고 죽은 듯이 늘어진 남자와 둘이 남은 아이작은 천장을 한번 그리고 바닥을 한번 본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걱정해도 좀 평범하게 할 수는 없나? 왜 남의 팔을 막 만져?
그리고 뭐? 보고 있어? 아니, 왜 보고 있는 건데? 어? 내가 구경거리도 아니고 왜 보고 있냐고.
혀끝까지 밀려 나온 아이작의 아우성은 결국 밖으로 나가지는 못했다.
“으읍.”
“일단 이것부터 먹어요.”
어느샌가 돌아온 앙브흐가 막무가내로 그의 입에 따끈한 김이 올라오는 도넛을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안에 눅진한 라즈베리 잼이 잔뜩 들어간 도넛을 꼼꼼하게 아이작의 입으로 꾹꾹 누른 앙브흐가 볼록해진 그의 뺨을 보고 뿌듯하게 웃었다.
황망한 얼굴로 도넛을 아구아구 먹어 치운 그가 입가에 온통 범벅이 된 기름을 쓱 문지르며 물었다.
“뭡니까, 갑자기.”
“맛있죠?”
“아, 네. 맛이야 있었죠. 타렌저의 주방에서 만든 디저트는 언제나 훌륭하니…….”
“좋아요. 좋아. 그럼 얼른 이리 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뿌듯한 얼굴로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아이작은 이제 그냥 다 놓아버린 얼굴로 앙브흐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윽고 도착한 곳은 필요한 물품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곳이었다.
“어제보다 더 늘었군요.”
“네. 제가 여기저기 소문도 내고 힘 좀 썼죠. 다들 좋은 일을 하고 싶어 하거든요.”
그리 말하며 순진하게 웃는 앙브흐를 보면서 아이작은 속에서 삐죽 튀어나오려는 말을 삼키는 걸 실패했다.
“누군가를 순수하게 돕고 싶어 하는 건 아마 아가씨 정도일 겁니다. 아가씨의 말에 이런 것을 보낸 높으신 나리들은 ‘착한 일을 하는 자신’이 좋을 뿐이겠죠.”
생각보다 날카롭게 나간 말에 아이작이 멈칫한 사이 앙브흐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뭐가 나빠요?”
“네?”
“착한 일을 하는 자신에게 취하고 싶거나, 남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한다고 해도. 봐요.”
그녀는 최고급까지는 아니라도 고급 약재 더미를 툭툭 두드리며 웃었다.
“그 덕분에 이렇게 진짜 아픈 이들을 도울 수 있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앙브흐는 물품 사이를 익숙하게 뚫고 들어가 대체 어디서 난 건지 양손 가득 쿠키며 버터바를 들고 나타났다.
풍기는 단내에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난 아이작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설마 그걸 다 먹으라고 하는 건 아니죠?”
“다 먹으라고 하진 않죠. 저도 같이 먹을 테니까.”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남는 손이 없어 다리로 의자를 끌어오려고 끙끙거리는 앙브흐를 본 아이작이 긴 한숨을 내쉬며 나섰다.
“앉으시죠.”
“고마워요. 자요. 이게 제일 맛있더라고요.”
그녀가 건넨 뭔가 콕콕 박힌 버터바를 받은 그가 한입 물면서 투덜거렸다.
“슈가도 그렇고. 이젠 황녀 전하까지 저만 보면 단 걸 주시더군요.”
“그야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잖아요. 이건 의사들도 인정한 거라고요.”
앙브흐의 당당한 그 말에 아이작은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단 것을 즐기지 않는데도, 어쩐지 그녀가 준 버터바를 우물거리고 있자니 정말로 기분이 나아졌으니까.
한동안 두 사람은 각자 쥔 것을 오물거리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한입 남은 쿠키를 다 녹여 먹은 앙브흐가 입을 열었다.
“저 사람들 괜찮아지겠죠? 아, 아이작이 괜찮다고 하는 것 같은 괜찮음 말고요. 진짜 괜찮아지는…….”
“저 정말 괜찮……. 하아, 뭐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역시 한입 남은 버터바를 입에 털어 넣은 아이작의 답에 앙브흐가 덧붙였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도움도 필요하겠죠. 도와주러 와줘서 고마워요. 다른 일로도 바쁠 텐데.”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으니까요. 저도 숨 좀 쉬고 살아야죠.”
별다를 거 없이 그냥 툭 흘러나온 그의 말에 앙브흐가 눈을 빠르게 깜박거렸다.
“숨을 쉬다뇨? 아, 아아 그러니까 남을 도우면서 보람도 느끼고 기분도 좋다는 말이죠? 저랑 똑같네요! 저도 가문의 일에 치이다가 이렇게 나와 있으면 숨이 편해진다니까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니에요? 그러면 왜?”
천진한 눈망울을 앞에 둔 아이작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그런 그에게 앙브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을 종용했다.
“또 저러고 계시네. 참…… 사이 좋으셔.”
슈가는 두 사람이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쌓인 물품 사이에서 지켜보다가 손을 뻗었다.
아이는 흐린 눈을 하면서도 저절로 치켜 올라가는 입꼬리를 눈치채지 못한 채 차곡차곡 마른 수건을 챙겼다.
이윽고 양손 무겁고, 한 품 가득 차게 마른 수건을 든 아이가 두어 걸음 내디뎠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