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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버린 재능(4)
시야에 들어오는, 내가 거니는 모든 공간에 대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인지하는 것은 보통 어지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것을 상시 검기를 유지하는 수련과 함께한다면 더더욱.
그런데, 이 일에 내가 지나는 모든 순간에 들리는 청각적인 청보를 인지하는 수련이 추가되었다.
단순히 저잣거리에서 떠드는 청각 정보만 포함되는 수준이 아니었다.
사락, 사라락.
옷깃이 스치는 소리.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
후우, 후우, 후우.
숨소리.
그 모든 소리를 항상 의식적으로 인지해야 하는 것이었다.
‘어지럽다.’
이 모든 짓을 동시에 하자, 머리가 아픈 것은 둘째치고, 어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 상태라면 비무를 할 수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안 그래도 더 이상 비무할 문파도 없는 와중에.’
약 30년간 연국 곳곳을 쏘다니며, 절대 다수의 중소방파에 들러 비무를 해 보았다.
간혹 대문파들 역시 최소 한 번씩은 들러 비무를 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연국에서 안 가 본 곳이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제는 연국에서 날뛰는 산적 내지는 수적 놈들과 싸우며, 그들을 잡아들이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그런 사파 녀석들을 비무도 아니고, 잡으러 들어가면 녀석들은 절대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막장인 놈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벽력탄까지 구해서 던지는 놈들도 있을 지경이었으니.
그런 놈들을 상대로, 이 어지러운 상태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부지할 수는 있을런지.’
후우.
나는 한숨을 쉬고, 검을 다잡았다.
어차피 모두 내가 선택한 길.
설령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길을 걸어갈 것이다.
***
나는 눈 앞에 쌓인 6권의 책자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살아남으셨습니까.”
“그래, 이번에도다.”
15년이 흘렀다.
회귀한 햇수로는 45년.
김영훈과는 그동안 세 번을 더 만났고, 세 권의 심득을 더 맡아, 내가 받게 된 김영훈의 심득은 총 6권 분량에 이르게 되었다.
그 동안 나는 시각, 청각은 물론이고.
촉각, 미각, 후각 등의 정보 처리 역시 상시로 능숙하게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제, 일류 후기의 무인을 만나면, 오감을 이용한 정보의 파악.
그리고 검기의 이해도와, 막대한 실전 경험으로 인해.
동급 경지의 무인을 상대로는 무조건 7할의 승률을 점하고 시작했다.
물론 이는 단악검법의 검초가 가진 위력을 생각하지 않았을 시의 가정이기 때문에, 내 무공의 위력까지 생각하면 승률은 9할 9푼에 이르렀고.
비무가 아닌 실전이어서 독과 암기 등 잡기의 사용까지 허용된다면, 나는 일류 후기의 무인을 상대로 10할의 승리를 장담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오감을 사용한 정보 처리 능력과, 상시 검기 사용으로 인한 검기의 이해도를 더한다면,
나는 이제는 절정 고수와도 약 10~20합까지를 맞붙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이상은 대결을 이어가기가 힘들었지만.
그리고, 그것이 끝이었다.
나는.
아직도.
절정 고수가.
되지.
못했다.
아직도!!!
아직도!!!
“결단기 수도자들 사이에서도, 내 존재가 퍼졌는지. 수배가 된 모양이더군. 두 명의 결단기 수도자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도망쳤지. 그래도, 한 녀석의 뺨에 작은 상처를 내는 데에는 성공했다.”
“더욱 더 많은 심득을 얻으셨군요.”
“심득은 무슨. 그래 봤자··· 아직도 결단기 수사와는 제대로 맞붙을 수 없다. 도망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나는 그들의 백초지적이 될 수 없어. 유의미한 타격조차 입히는 게 불가능하다.”
그는 허망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했다.
“솔직히,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 이르른 이··· 오기조원의 극한이. 무림인의 [끝]이 아닌가 하는···. 어쩌면 조수월무록을 창시한 무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 수 있겠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무공으로는 수도자들을 이길 수 없어.”
나는 잠잠히 김영훈을 바라보았다.
천하무림을 경악하게 할 심득을 여섯 권이나 써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찻잔을 쥔 채 허망한 웃음을 짓는 그 모습.
분명 그는 하늘이 내린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하늘이 버린 재능을 가졌다.
분명 나와 그는 극과 극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김영훈에게서 내 모습이 비춰졌다.
몇 번의 생을 노력해도, 절정지경은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는 내 모습.
몇 번의 생을 반복해도, 수도자들을 이길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 그의 모습.
분명 하늘이 내린 천재와.
하늘이 버린 둔재이거늘.
어째서, 이렇게 닮아 보이는 걸까.
“그나저나, 저는 왜 아직도 절정지경에 오르지 못하는 건지. 저도 역시 답답하군요.”
김영훈은 조금 씁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검기를 비롯해서, 절정경의 고수들이 사는 세계를 최대한 모방하게 했음에도 결국에는 이르지 못한다라··· 뭐가 필요한 건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군.”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번 오랜만에 지도 대련이나 해 보지.”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요.”
나와 김영훈은 객잔에서 나와, 인근 숲속으로 향했다.
적당한 공터에 도착한 나는 가타부타 할 것 없이 검을 뽑아들었다.
현재 칠 주야간 쉬지 않고 유지 중인 검기가 내 검에서 일렁인다.
“검기의 이해도가 상당하군. 아마 절정지경에 오르면 검사(劍絲)의 단계까지는 빠르게 올라가겠어.”
김영훈이 내 검기를 보며 눈에 이채를 띄었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절정지경에 오르면이란 가정은 의미없다.
이제 회귀 45년째이다.
내 수명은 이제 약 5년이 남았고, 그 안에 절정 고수가 될 가능성은 희박했으니까.
무려 평생을 바쳐 와도 오르지 못했던 절정지경이다.
5년 안에 무슨 특별한 깨달음이라도 오겠는가.
“그럼, 가겠습니다.”
나는 형형한 안색을 빛내며,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십육 초.
산중호걸(山中豪傑).
촤아악!
좌상에서 우하로 여섯 갈래.
우상에서 좌하로 여섯 갈래.
총 열두 갈래의 검기가 김영훈의 심장.
일점을 향해 몰려든다.
티잉―
김영훈은 도를 뽑지도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튕겨 내자 내 초식이 단번에 무화되어 버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른 초식을 펼쳐 냈다.
단악검법.
십이 초.
구광일출봉(九光日出峰).
이전보다도 한층 진화한 검식이, 아홉 갈래의 검기를 그에게 쏘아 낸다.
“허점이 많이 없어졌군.”
슈슈슉!
김영훈은 빠르게 신법을 펼쳐 내 검기를 모두 피해 내며 나직히 칭찬을 해 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다시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십칠 초.
능곡지변(陵谷之變).
부웅, 붕, 붕!
사방팔방으로 검기(劍氣)를 날려, 땅 아래 곳곳에 침투경의 원리로 대지에 흡수시킨 후, 시간차를 투고 폭발시키는 단악검법의 절초.
콰광, 콰앙!
콰과광!
곧이어 주변의 지형 전체가 내 의지 아래 변화한다.
땅 속 곳곳에서도 지형을 흔든 검기 몇몇이 튀어나와 김영훈에게 쇄도해 갔다.
부웅―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다시 가로로 휘두르자, 내가 쏘아 낸 검기들은 모조리 그 힘을 잃고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단맥도, 팔 초, 산허리.”
부웅!
그리고, 그가 내게 다시 손가락을 뻗었다.
“···!”
쿠과과광!
그의 손가락에서 뻗어나온 도강(刀罡)이 지반을 뒤집어 엎으며 나를 향해 쇄도한다.
단악검법.
십팔 초.
공곡전성(空谷傳聲).
부웅―
검에 검기를 불어넣는다.
동시에, 검에서 힘을 뺀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으나, 공곡전성의 초식은 실제로 그렇다.
검에 검기를 불어넣지만, 검기의 형태는 유지하되 검기에서 모든 의(意)와 잡다한 힘을 빼버리고, 그저 기(氣)만이 들어있는 공(空)의 형태를 취하게 한다.
“하아아아아···!”
나는 필생의 집중력을 다해, 공(空)을 유지한 검을, 나를 향해 쇄도해 오는 도강에 가져다 대었다.
꾸웅―
거대한 압박이 내 팔을 타고 전해져 온다.
하지만, 동시에 나를 향해 쇄도해 왔던 도강이, 내 검에 들어찬다.
내 검에 나의 뜻을 비우고, 상대의 뜻을 채워 넣는다.
그런 후.
빙글―
나는 그대로 반바퀴를 돌아, 있는 힘을 다해 다른 방향으로 강기를 떨쳐 내 버렸다.
쿠과과광!
김영훈이 날린 산허리의 초식이 날아간 곳은, 수 그루의 나무가 쓰러지고, 거대한 암반이 무너졌다.
“허억··· 허억···!”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리를 부들거렸다.
공곡전성은 본디 내 검에 상대의 기(氣)와 의(意)를 그대로 담아, 다시 상대에게 되치는 반격기였다.
그러나 방금 그 공격에는 겨우 떨쳐 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여전히 멀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기수식을 잡으며 달려들었다.
단악검법.
십구 초.
산명곡응(山鳴谷應).
투웅!
검음(劍音)이 진동한다.
동시에, 내 검기가 파(派)의 형태로 변하여 천지사방으로 뻗쳐나가는 듯하더니, 일순간 김영훈을 향해 응집되었다.
피하는 게 불가능한 절학!
그러나, 그가 씨익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도강이 뿜어져 나왔다.
부웅, 붕, 붕, 붕, 붕!
그가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동시에, 그가 한 번 손을 놀릴 때마다 파(派)의 형태로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검기가 모조리 튕겨나가기 시작했다.
투웅, 퉁, 퉁, 퉁, 퉁!
수십, 수백, 수천 갈래는 될 무수한 검기를, 모조리 쳐 낸 그는 춤을 멈추고는 다시 내게 손가락을 내밀었다.
“단맥도, 구 초, 용릉(龍陵).”
쿠구구구!
다시금 가공할 도강이, 마치 구불거리는 용과 같은 형세로 내게 날아왔다.
‘받아 낼 수 있을까?’
아니, 받기는커녕 떨쳐 내기 위해 검을 가져다 대기만 해도, 저 초식에 담긴 변화에 휘말려 전신이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조금 무리를 해야겠군.’
정면에서 받아 낸다.
단악검법.
이십 초.
구산팔해(九山八海).
그 자리에서 검을 들고 한 번 회전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또 다시 한번.
그렇게 한 번의 회전을 할 때마다, 검속과 검력이 점차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총 아홉 번의 회전을 마쳤을 때 즈음.
내 검에 담긴 검력(劍力)은 가공할 만치 거대해져 있었다.
그 상태에서, 전신전령을 다해,
팔방(八方)으로 눈앞의 도강을 베어 갔다.
콰과과광!
거대한 폭음이 들렸고, 나는 내 손에 들린 검이 박살 나 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곧이어,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나는 뒤로 나가떨어져 버렸다.
“커억! 컥···.”
나는 뒤로 나동그라져, 아름드리나무에 그대로 박혀 버린 후 피를 한 줌 토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나 내 패배였다.
“제길. 도대체··· 뭐가 문제인 것 같습니까.”
“흠···.”
김영훈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르겠군. 너는··· 왜 아직도 그 경지에 머물러 있는 건지 모르겠구나. 너는 진즉에 절정 고수가 되었어야 한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는 숨을 고르며 물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나는 여지껏 절정은커녕 그 비슷한 깨달음도 얻은 적이 없었다.
“기이하군. 기이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흠···.”
잠시 고민하던 김영훈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쩌면, 계기가 부족한걸지도 모르겠군.”
“계기···?”
“그래. 계기. 간절함이나, 원동력 같은 것 말이다. 네가 극한의 집중력을 짜내서, 재능의 한계를 넘어 버리게 할 만한···.”
“계기는 무슨 계기란 말입니까!”
나는 그의 말을 끊고,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50년을 넘게 검을 잡고 휘둘러 댔습니다! 평생을! 이 일생을 바쳐서 다음 경지로 넘어가기를 바랐단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도대체 어떤 계기를 얼마나 더 간절하게 갈구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나는 전신이 쑤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평생을 일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어! 그런데 도대체 뭐가 부족하냔 말이야! 뭘 더 해야 하냔 말이다! 전신 세맥도 전부 타통하고, 이제는 잘 때마저 검에 손을 대고 검기를 흘리면서 잔다!
꿈에서도 꿈속 풍경과 꿈속의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처리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왜! 왜!!! 도대체 왜 내게 다음 경지를 보여 주지 않는 거냔 말이다!
도대체 왜!!!”
나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다.
일흔이 다 된 늙은 몸으로 이러는 것이 추하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평생을 검을 쫓아 다음 경지를 갈구했음에도 다음 경지가 무엇인지조차 감을 잡지 못했다.
그랬을진데, 어찌 고통스럽지 않을까.
“왜··· 대체··· 왜···.”
끄흑, 끅···.
나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김영훈은 그런 나를 착잡하게 쳐다보는 듯하더니, 손가락을 펼쳐 내가 날아가 박혔던 아름드리 나무를 향해 휘둘렀다.
스팟―
아름드리 나무에는 곧이어 상당한 분량의 무공 구결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너와 대련하며 네 부족한 부분을 메워 줄 무공을 창안해 보았다. 위로라고 하기엔 뭣하지만, 이것이나마 익히며 마음을 다스리길 바라지.”
말을 마친 김영훈은 다시금 그 자리에서 허깨비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얼마간 하늘을 쳐다보다가, 그가 남겨 둔 무공 구결에 시선을 옮겼다.
그가 남긴 무공은 두 개였다.
산군무(山君武)와 월악보(越岳步).
그 짧은 지도 대련을 하며, 무공을 두 개나 날름 창안하고 간 것이었다.
난 그 가공할 무공 재능에 혀를 내두르며, 천천히 두 개의 무공을 탐독했다.
산군무의 경우, 신법(身法)에 속했다.
산을 지배하는 산군(山君)의 기세로 적을 압박하며, 범과 같은 움직임을 만들어 내는 방법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월악보는 보법(步法)이었다.
특이한 점은 그 어떤 보법을 밟더라도 단악검법 일 초, 월악(越岳)의 태세를 취할 수 있는 보법이란 것이었다. 단악검법의 특성상, 일 초 월악의 다음으론 어떤 초식도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보법을 밟으며 무수한 연계기를 사용하는 게 가능한 무공이었다.
‘산군무와 월악보를 동시에 사용하면.’
산군(山君)의 기세로 적을 압박하며 월악보로 끊임없이 몰아치는 게 가능하다.
상대의 피를 말려 죽이는 무공인 것이다.
‘거기에, 이 둘은 단악검법에 완벽히 짜 맞춰진 무공이다.’
단악검법을 완벽하게 보완해 주는 무공들이었기에, 단악검법에 맞춰서 익히기도 쉬운 편이었다.
나는 문득, 내 무공 실력을 생각해 보며 혀를 찼다.
“이제는··· 일류 무사를 상대로는 잡기를 쓰지 않고도 10할의 승률이겠군.”
나는 이제, 일류의 테는 완전히 벗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절정은 도달하지 못했다.
일류와 절정의 사이 그 어딘가.
그것이 현재의 내 실력인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 경지에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계기라.”
나는 김영훈이 해 준 말을 곱씹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 부족하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
세월은 다시 유수처럼 흘렀다.
다시금.
회귀 후 50년이 흘렀다.
이젠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일류는 넘었으나, 절정은 아닌 상태였다.
이젠 검을 휘두르는 것도 지쳤다.
지난 삶에서야 죽기 직전까지도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 삶은, 지난 삶보다도 실력이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검을 휘두르는 것이 고됬다.
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의미가, 없기 때문이겠지.’
50년 동안 검을 휘둘렀다.
그랬음에도 절정 고수가 되지 못했다.
죽을 때가 다 되어 검을 휘둘러 봤자 뭘 하나.
어차피 똑같을 거다.
“···죽었소?”
나는 그날도 검을 휘두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김영훈은 5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 만났을 때.
결단기 수도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했으니, 어쩌면 결단기 수도자 두어 명에게 합공을 받아 잡혀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게 당신이나 내 천명인가 보군.”
내가 죽을 날이 언제였더라.
아마 사흘 내로 내 원기가 다하고, 나는 죽을 터였다.
지금 나와서 검을 휘두르는 것 역시 필생의 의지력으로 휘두르는 중이었다.
“한계를.”
붕!
“넘으려 해도.”
붕!
“인간인 이상.”
부웅!
“더 나아갈 수··· 없는 거요.”
붕, 붕, 부웅!
후우···.
나는 한숨을 몰아쉬며 망연하게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재능으로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여기까지인 거고. 당신의 재능 역시, 거기까지가 한계인 것이겠지.”
그래.
다음 생부터는, 조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어차피 절 정고수는 평생을 바쳐도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 차라리 수도자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영질을 얻게 할 약이라도 달라고 부탁해 보자.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우리 범인이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하늘이 정한 운명은 벗어날 수···.”
“커헉!”
“허엇···!”
순간, 김영훈이 내 옆에서 허깨비처럼 나타났다.
피를 토하면서.
“커헉, 쿨럭···컥··· 뭔,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서은현.”
“아, 아니···.”
“커억··· 크극. 끄르륵···.”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웃고 있었다.
그의 양 팔은 잘려 있었고, 한쪽 눈 역시 참흔(斬痕)이 새겨져 잃어버린 상태였다.
“이런 젠장, 뭐 하다가 온 거요. 상태가 심각하군.”
나는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화들짝 놀라, 서둘러 그를 진맥하고 의료 도구를 가지러 가려 했다.
그때, 뭔가가 내 뒷덜미를 잡았다.
“으응?”
뭐지?
양팔이 잘린 것 아니었나?
무언가, 투명한 뭔가가 내 뒷덜미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김영훈은 피를 토하면서도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봐라!!!!! 결단기 수도자의, 한쪽 팔을 터트린 댓가다!!! 이 내가, 결단기 수도자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
“뭣···?”
“이 내가!!!”
그의 눈은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필시.
가이없는 광기(狂氣).
“내가! 이 내가!!! 무림인이 도달할 수 있는, 오기조원 저 너머의 경지를!!! 이 두 눈으로 보았단 말이다!!!”
그는 미친 듯이 피를 토해 내면서도 말을 이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불태워 도달했다! 자, 봐라. 네게, 네게 보여 주기 위해 수백 리를 주파해 왔다. 네게, 내 유언을 맡기기로 했으니까!”
우웅―
김영훈의 머리 위로 도기(刀氣)가 맺혔다.
그러나 나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허공에 내공을 투사해 기운을 덧씌우는 건 그가 오기조원에 이르고 나서도 몇 번 보여 준 신기였으니.
점차 도기가 빛을 뿜으며, 그 형태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강기(罡氣)였다.
‘여기까지는, 오기조원의 경지에서도 하던 건데.’
그러나, 그의 강기가 또 한 번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건···.”
강기가, 동그랗게 말리며 압축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삶 동안 김영훈을 따라다닌 나 역시도 처음 보는 변화였다.
마치, 그가 오기조원에 처음 진입했던 그 날.
그의 머리 위에서 떠 있던 다섯 개의 작은 구체들과 같이.
강기는 그렇게 작은 환(丸)의 형상으로 변화하였다.
“이것으로··· 결단기 수도자의 팔을 터트릴 수 있었다. 이전에는 암습이나 기습으로만 싸워야 했던 축기기 수도자들과도, 이것만 있다면 정면에서 힘싸움을 벌이는 게 가능하다! 봐라, 은현아! 이게, 내가 평생을 추구하여, 기존 무림의 무학을 뛰어넘은 결과다!”
부웅!
김영훈은 허공에 맺힌 환 형태의 강 덩어리를, 그대로 저 뒤쪽.
그러니까 내 집이 있는 곳으로 날렸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이 울려오며, 내가 마련한 집이 폭발해 버렸다.
무한투괴로 50년을 살며 쌓아 온 모든 돈을 쏟아부어 지은 내 저택이, 그의 일 초에 박살이 나 버린 것이었다.
“내··· 집···.”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분노가 치밀 뻔했지만, 나는 가까스로 분노를 가라앉히고 그가 펼쳐 낸 무공의 위력을 살펴보았다.
‘삼 층 건물이 그대로 폭발해 버렸다. 잔해도 거의 남지 않았어. 하인들이 마침 없어서 마련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능히 수백 명을 일격에 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얼마 남지 않은’ 잔해에서 보이는 수백, 수천, 수만에 달하는 도흔(刀痕).
저 강기 덩어리에는, 수만에 달하는 도강(刀罡)이 응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위력이다. 지금껏 김영훈이 오기조원에 이르러 보여 주었던 그 어떤 무공보다도 강인한 위력이야.’
축기기 수도자와도 정면에서 힘 싸움을 벌일 수 있다던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닌 듯싶었다.
더군다나 월수궁무록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무공은, 기본적으로 암습과 도주에 특화되어 있기에, 결단기 수도자에게 암습을 했다면 충분히 팔이라도 터트릴 위력인 것 같았다.
“이걸··· 보여 주러··· 네게, 왔다. 은현아···.”
그는 죽어 가며 작은 목소리로 몇몇 구결을 읊조렸다.
“이··· 구결들을··· 잘 기억해 다오··· 그것들이··· 내가 얻은 심득을, 압축한··· 것이니. 부디, 내 무공들을, 후대에, 후대에···.”
“말하지 마십시오. 제가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난 그의 혈을 짚어 지혈을 한 후, 가까운 의원으로 향하려 할 때였다.
부웅―
내 집의 상공으로, 한 청포 중년인이 날아왔다.
“찾았군. 무극괴(武極怪). 이런 곳에 도망을 온 건가. 여봐라, 범인(凡人)! 그놈은 하늘에 오를 수도를 닦던 수도일족에게 큰 죄를 범한 악인이니, 그 녀석을 두고 떠나라!”
“···이 자를 벌하시려 찾아오셨습니까.”
“그렇다. 설마 네놈. 무극괴의 지인인가? 그래서 그를 감싸려는 것이야? 소용없는···.”
타닷!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전, 김영훈을 등에 업고 가까운 산지로 향했다.
“쯧, 무극괴의 지인인 것 같은데. 무극괴에게 우리 수도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가?”
중년인의 목소리가 천지사방을 웅웅 울리는 듯 했다.
“하하, 뭐 그래. 마지막 여흥이라 생각하고 조금 즐겨 주지. 자, 도망쳐 보거라.”
촤악!
중년인이 있던 방향에서 검녹빛이 터져나오는 듯 하더니, 새카만 덩어리 대여섯개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쿵, 쿵, 쿵!
지상으로 떨어진 덩어리들은 이내 몸을 일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쫓아왔다.
‘저건··· 시체?’
움직이는 시체.
강시(剛屍)였다.
키야아아아!
크르르륵!
크웨에엑!
강시들이 나를 쫓아온다.
하늘에서는 청포 중년인이 둥실둥실 떠서 나를 내려다보며 쫓아왔다.
“젠장, 늘그막에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나는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나무가 빽빽한 숲속으로 도망쳤다.
강시들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늙은 나와는 다르게, 이미 죽은 저것들은 쉬지도 않고 돌진해 왔다.
“그나저나 무극괴라니, 수도자들이 붙인 별호입니까? 독특하군요.”
“···.”
나는 숨이 옅어져 가는 김영훈이 의식을 붙들 수 있도록, 도망치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무극괴와 무한투괴, 두 괴(怪)가 늘그막에 강시한테 쫓기다니, 정녕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젠장, 당신 수도자들 쫓아다니며 싸움 걸겠다 할 때부터 이리될 건 예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거면 아예 이기시든지, 팔 하나만 터트려 놔서 이게 뭡니까? 예?”
키야아아악!
어느새 가장 가까이 나를 따라온 강시가 나를 향해 손톱을 뻗쳤다.
“빌어먹을, 시체니 독이 통하지도 않을 테고.”
푸콱!
나는 암기를 날려 강시의 발목 관절에 정확히 암기를 박아 넣었다.
그 덕에 한참 달려오던 강시는 그대로 고꾸라져 바닥에 쳐박혔고, 나는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더더욱 멀리 도망쳤다.
“이런 젠장. 반로환동해서 젊은 몸인 당신이 날 업고 뛰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숨차서 뒈지겠군요. 왜 양팔은 또 잘려서 와 가지곤.”
크아아아아!
강시들은 내게 지칠 줄을 모르고 달려들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아침이 지나고, 점심이 지나고, 밤이 지났다.
해가 몇 번이나 뜨고 졌을까.
“허억, 허억···.”
나는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야 말았다.
등 뒤로는 커다란 절벽이 길을 막고 있었고, 앞으로는 강시들이 나를 포위하고 있었다.
“놀랍군. 범인 주제에 내 강시들을 상대로 사흘 밤낮을 버티다니.”
“허억··· 헉···.”
나는 하늘에 떠 있는 청포 중년을 보며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도망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을 텐데. 이미 그 무극괴는, 죽지 않았느냐. 범인아.”
“헉···허억···.”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러나, 50년을 단련해 온 마지막 오기로 쓰러지지 않으며 수도자에게 말했다.
“그런 건··· 알고 있소. 일류 의원이, 시체도 못 알아볼까 봐. 김영훈, 이 미치광이가 결국 과다출혈로 죽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소이다.”
“그러면 왜 도망 다닌 거지? 범인, 나는 그 무극괴의 목에만 관심이 있다. 네 하찮은 신병 따위에는 관심이 없으니 그냥 시신을 버리고 도망쳤으면 됐을 것을.”
“흐, 흐흐··· 흐흐흐.”
나는 미친 듯이 웃으며, 천천히 김영훈의 시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자는··· 내 무공 스승이기 때문이오. 스승의 사체를, 당신이 수도자라곤 하나, 외인에게 넘겨주는 것이 맞겠소?”
단악검법도.
용맥기공도.
산군무와 월악보도.
그 외에, 내가 이 경지까지 올 수 있었던 그 모든 것도.
김영훈의 가르침 때문이다.
그는 내 고향 사람인 동시에, 내 무공 스승인 셈이었다.
“내 무공 스승의 목을 가져가려면, 우선 내 목부터 쳐야 할 것이오!”
“흠, 감히 수도자에게 큰소리를 치다니. 배짱이 두둑하군. 보아하니 원기가 소진되어 가는 듯한데. 수명이 남지 않았다고 배짱을 부리는 건가?”
내 고함에, 청포 중년인이 불쾌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범인 주제에 수도자를 이리 무시하다니. 범인들은 수도자가 뭔지 이해를 잘 못 하는 듯하군. 곧 죽을 거라 겁이 없는 것이냐? 목숨이 아깝지 않다는 게지? 그렇다면 보여 주마. 수도자에게는, 죽음보다 공포스러운 고통을 선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우웅―
청포 중년인이 무언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무언가 법술이 날아올까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의 법술이 향한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이, 이건···.”
수도자의 법술은, 김영훈의 시체에 깃들었다. 동시에, 죽었던 그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득, 우드득!
우리를 포위하던 강시 둘이, 각자 한쪽 팔을 떼어내서 막 일어난 김영훈의 시체에게 던졌다.
김영훈의 시체의 어깻죽지로, 강시들의 팔이 날아가 척 붙었다.
“강시···?”
수도자는, 그의 법술로 김영훈을 강시화시킨 것이었다.
“버러지 같은 범인 놈. 감히 수도자의 앞에서 고함을 지른 값을 치르게 해 주마. 자, 무극괴여. 네 제자라는 놈을 네 손으로 죽여 봐라.”
“끄···아아아···.”
김영훈의 시체가 휘청이는 듯싶더니, 내게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황급히 검을 꺼내 그의 일격을 막고 뒤로 물러났다.
“이··· 간악한 수도자 놈···!”
죽은 이의 고혼(考魂)을 이리 모독하다니!
나는 이를 악물며, 강시가 된 그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 냈다.
‘다행히 생전의 무학은 쓰지 못한다.’
그저 강시의 힘과 속도로만 나를 밀어붙일 뿐이었다.
물론 수도자가 불어넣은 힘이 상당히 무시무시한 모양인지, 단순한 힘과 속도로만 따져도 늙은 몸인 내게는 어마어마한 부담으로 다가왔지만.
‘제길, 제길!’
일 검 일 검을 내리칠 때마다, 눈이 충혈된다.
죽은 김영훈을 향해 내리치는 내 검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모독이나 다름없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다잡고 기수식을 잡았다.
어차피 이리 된 것.
빨리 끝내 주자.
단악검법.
이십일 초.
천지(天池)!
옛 기억이 흘러든다.
―단악검법의 이십일 초는 천지(天池)라는 초식인데··· 다른 초식들은 다 협곡이나 봉우리, 혹은 산이 들어가는 이름입니다만, 왜 이십일 초는 이런 이름일까요?
이번 생애 초기.
김영훈에게 떠보듯이 물었던 질문.
지난 삶의 그가 개량해 준 단악검법에 들어 있던 초식이니, 혹시나 알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물어본 것이었다.
―음, 천지라. 나는 백두산 천지가 생각나는구만.
―백두산 말입니까?
―하하, 그래. 이 세계에도 백두산 천지 같은 게 있나 보지? 하하, 아니면 우리처럼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이 지은 초식 명이거나.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천지(天池).
하늘을 비추는 거대한 호수.
가장 높은 산 위에 자리한 광대한 웅덩이.
그 지형의 기세가, 자연히 내게서 뿜어져 나온다.
천지의 심상과 더불어, 김영훈에게 무공 지도를 받았던 무수한 순간이 떠올랐다.
단악검법의 구결이 스쳐 지나간다.
천지(天池)는 하늘의 천태만상을 담지만, 그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아니한다.
구결에서 상징하는 하늘이란, 나와 무(武)를 겨루는 대상을 의미하고.
그를 담는 호수는, 나 자신의 일검(一劍)을 의미한다.
파앙!
검기(劍氣)가 김영훈의 전신을 쓸고 지나가고, 내 검은 검집에 납검(納劍)되었다.
찰나, 그의 움직임이 얼어붙었다.
단악검 이십일 초 천지는 상대의 경맥을 흐르는 모든 ‘힘’을 일순간 내 검기로 빨려들게 해 상대의 움직임을 잠시간 제압하여 내 검 속에 가두는 기술이었다.
일류 의원이자 기경팔맥의 달인인 나이기에 펼칠 수 있는 기술.
오로지 나에게 짜 맞춰져 만들어진 무공이기에, 내가 아니면 펼칠 수 없는 초식.
쿠구구구―
납검한 검 속에서, 잠시간 빼앗은 힘이 날뛴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사라지겠지만, 나는 이 기운을 그대로 보전하며 다시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斷岳劍法), 이십이 초(二十二 招).”
일종의 개념이자, 이론인 이십삼 초, 이십사 초를 제외한.
사실상 단악검법의 오의(奧義).
‘시체가 멀쩡하면, 수도자 놈에게 강시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시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평안히 잠드시길.’
단악검법.
오의.
“단악(斷岳).”
단악검법 오의의 내용물은 거창하지 않았다.
산악을 자르기 위해(斷岳) 만들어진 무공답게, 무식하게 칼질을 하는 것뿐.
단악검법의 일 초 월악(越岳)부터 시작해, 이십일 초 천지(天池)에 이르기까지 모든 초식을 일거에 상대에게 쏟아붓는 것!
그것이, 단악검법 오의, 단악이었다.
일 초, 월악(越岳).
발검과 함께 그의 시신에게서 빼앗은 힘의 흐름을 타고, 가로로 그를 베어 들었다.
이 초, 입산(入山).
빠르게 하단세로 전환해 그의 다리를 가격하고.
삼 초, 등맥(登脈).
하단세에서 검을 잡고 올려 베며.
사 초, 유릉(流陵).
구불구불한 검기를 날려 찌른 후.
오 초, 괴암(塊巖).
회전하며 수 번의 참격을 날린다.
육 초, 기석(奇石).
파지법을 바꿔 변초를 주고.
칠 초, 심산(深山).
다시 품 안으로 들어가 대각선으로 올려 벤 다음.
팔 초, 유곡(幽谷).
반격을 하지 못하게 내게 향하려는 힘을 비틀어 흘려 무화시킨다.
구 초, 산수화(山水畵).
좌우로 대각선 형태의 검기를 연달아 세 번 날리며 도합 여섯 번의 참격을 꽂아 넣고.
십 초, 용맥(龍脈).
기공을 끌어올려 크게 다시 베어.
십일 초, 단애(斷崖).
다시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고.
십이 초, 구광일출봉(九光日出峰).
그 너머로 아홉 갈래의 검기를 쏘아 냈다.
이쯤 되자, 김영훈의 시체는 이제 숫제 너덜너덜해졌다.
‘완전히 조각낸다.’
수도자가, 고혼을 모욕하여 다시 일으킬 부분조차 없도록!
너덜너덜해진 상태에서도 꿈틀거리며 다시 내게 공격을 가해 왔다.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
‘피해야 한다!’
아니, 피해서 어쩌려고?
어차피 내 수명은 곧 끝이다.
이미 죽을 목숨.
지금 이 순간, 내 스승의 마지막이 더는 모독되지 않게, 모조리 불태워라!
“흐아아아아아!!”
십삼 초, 요산요악(樂山樂岳)
다섯 번의 참격을 내리찍고, 다시 다섯 번의 참격을 그었다.
열 번의 참격이 종횡무진하며 그를 덮친다.
키야아아아!
그러나 그의 손이 참격의 막을 뚫고 내게 덮쳐 왔다.
죽는다.
‘아직 죽을 수 없다.’
더, 조금 더!
더욱더 기력을 끌어올려라!
뇌가 더욱더 빨리 정보를 입력하고 처리한다.
주변의 공간, 그의 소리, 냄새, 주변의 습도와 온도, 혀 끝으로 감기는 피비린내.
뇌가 터질 것 같다.
‘터지라지.’
더욱더!
더욱더!
뇌가 불타 버릴 때까지!
십사 초, 기산심천(氣山心天).
용맥기공이 크게 끓어오르며 내 기세가 거대해진다.
동시에 검기가 졸아들며, 검사(劍絲)의 형태로 유형화된다!
이대대로라면 맞찌르기가 될 상황.
그리고 그때.
빠지직―
터질 것 같던 내 뇌가, 죽음을 각오한 지금의 압력을 받아들이다 못해, ‘뭔가’를 뚫었다.
아아―
이것은.
내 망상(望想)인가?
붉다.
그리고, 푸르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사라지고, 오직 두 가지의 색만이 내게 허용되었다.
붉은색.
그리고 푸른색.
아아―
이것은.
붉은색의 실선(失線)이 김영훈의 손끝에서부터 내 머리에 이어져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것이 [다음 공격]임을 예감했다.
부웅!
최소한의 동작으로 그 공격을 피한 후, 나는 검을 들었다.
푸른색의 실선이 내 검에서 이어져, 그의 늑골로 향해 있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적의 동선]임을 예감했다.
나는 홀린 듯, 푸른색의 실선을 따라 검을 그었다.
촤악!
내 검이 그의 상반신을 베어 나갔다.
어쩐지, 그는 이미 시체에 불과할 터인데.
김영훈의 얼굴은 웃고 있는 듯했다.
그 희미한 웃음을 보며.
나는 이전에 했던 생각을 반복하게 되었다.
하늘이 내린 천재.
그리고 하늘이 버린 둔재.
극과 극이지만 우리가 닮아 보였던 이유.
그것은.
하늘이 내려준 그 운명 속에서, 죽어라 발버둥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천재도 둔재도 없다.
평생을 운명에 저항해 발버둥 치다 죽은 이와.
평생을 운명에 저항해 발버둥 치다 죽을 이가 있을 뿐.
그래.
우리는 운명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재능 따위는 상관없이 닮은 인간인 것이다.
―이대로 끝낼 셈이냐?
그의 시체 위로, 살아생전 김영훈의 얼굴이 비취는 듯했다.
‘물론 아니지.’
홀린 듯, 나는 계속해서 검을 휘몰아쳤다.
십오 초, 첩첩산중(疊疊山中).
수천 개의 검기가 얇게 갈라져, 폭풍이 되어 그의 전신을 덮쳤다.
본디 상대의 검기를 무화시키기 위해 펼치던 방어 초식이, 최적의 동선으로 상대에게 내리꽂히며 살초(殺招)로 진화한다.
십육 초, 산중호걸(山中豪傑).
첩첩산중에 사는 산중호걸의 발톱과 엄니가 최적의 동선으로 일점 집중되며 전신을 찢어발긴다.
십칠 초, 능곡지변(陵谷之變).
땅으로 쏘아 낸 검기가 지형을 바꾸며 그의 중심을 뒤흔들고.
십팔 초, 공곡전성(空谷傳聲).
검기에 마음을 비워 반격을 다시 되치며.
십구 초, 산명곡응(山鳴谷應).
검기를 파(派)의 형태로 바꾸어 피하는 게 불가능한 일격으로 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십 초, 구산팔해(九山八海).
그 자리에서 수 번의 회전을 한 후 팔방 베기를 하여 형체를 찢고,
이십일 초, 천지(天池).
다시 검을 휘둘러 내가 지금껏 휘두르며 생겨난 모든 파(派)와 흐름(流), 힘(力)을 걷어들이며 납검한다.
구구구구구―
단악검법 이십 초식의 모든 파와 류, 력의 힘을 걷어들인 힘이다.
그 광대한 기운이, 납검한 검 속에 들어 있었다.
나는 처음과 같이, 다시 검을 발검(發劍)했다.
이 모든 힘을 집중해서 다시금 참격을 내지르는 일격.
단악검법(斷岳劍法).
“제 이십이 초.”
오의(奧意)
“단악(斷岳)!”
일 검(一 劍)에 담기는 단악검법의 총체(總體)!
마지막 검을 내지르며, 나는 이번 생의 주마등이 눈앞을 지나는 것을 보았다.
아하, 그래.
이것이 끝이구나.
번쩍!
내 일검에, 김영훈의 시체는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제는 아무리 수도자라 할지라도 그의 시신을 더는 욕보일 수 없으리라.
그렇게, 나는 내가 염원해 왔던 새로운 경지에 오르며.
끈질기고 끈질겼던 이번 생을 마무리했다.
그것이, 나의 네 번째 회귀(回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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