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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단(3)
새로운 세계가 눈에 보인다.
아직 저 세계에 완전히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진입하기만 한다면.
나는 이전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자색(紫色)의 의념.
그 새로운 길이 가리키는 방향을 눈에 익히며, 월수궁무록의 구결을 떠올렸다.
지금까지는 구결을 암기는 했어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정작 신공(神功)을 가지고 있어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자색의 길이 보인 순간, 나는 어쩐지 월수궁무록에 대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월수궁무록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이것을 말도 안되는 무공이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군.’
그래, 이것은 연국 무림의 역사를 송두리째로 부정할 수 있는 무학이다.
그 근간은 비록 수도자들에게서 도망치고, 암습하기 위한 무공일지언정.
제대로만 사용하면 이것은.
―분명 이 월수궁무록이라는 건, 저 수도자 놈들을 잡아 죽이기 위한 무공이다!
먼 옛날.
월수궁무록을 익혔던 김영훈이 월수궁무록에 내렸던 평가였다.
그래, 제대로만 사용하면 능히 수도자를 죽일 수 있는 무공인 것이다!
월수궁무록의 구결이 뇌리를 스친다.
[무를 겨룸에 있어, 색조가 부딪히는 것이 무공이라면··· 그 색조 자체를 공격할 수는 없는가?]
삼화취정의 경계에 발을 들이기 전에는 이해가 안 되었던 구절.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다.
‘색조는 의념. 그리고, 색조 자체를 공격한다는 말은.’
상대의 의념 그 자체를 공격한다는 의미!
의념으로 간합을 주고받는 걸 넘어, 의념 자체를 공격하다가, 더욱 더 심화하여 상대의 인식(認識) 그 자체를 베는 것이 월수궁무록의 근간.
그리고, 이를 근간으로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는 자는, 수도자의 식(識) 또한 베어 넘겨 수도자의 사각(死角)을 점할 수 있다!
김영훈이 여태껏 보여 주었던, 허깨비처럼 사라졌던 신기(神技)는 그의 경신법이 아닌, 내 인식을 빠르게 베어 내서 순간적으로 내가 그를 인지할 수 없게 하던 비기였던 것이다!
슈칵!
내 검이, 황태자의 식(識)의 흐름을 파고들었다.
인간의 인식에도 결과 결이 있다.
그 결의 틈새를 향하는 자색의 궤적을 향해, 나는 월수궁무록의 구결대로 의념을 집중하며 그의 식을 베고 들어갔다.
파아앗!
그의 식의 귀퉁이가 갈라진다.
나는 그의 눈앞에 서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내가 마치 허깨비처럼 사라진 것처럼 보이리라.
수도자의 사각(死角)을 점했다.
보통의 무림인은 완전히 공간을 장악한 수도자의 의념을 파악할 수 없다.
반대로 수도자는 자신의 의식 영역 안쪽에 접근한 무림인의 모든 행동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월수궁무록은 수도자의 사각을 파고들게 해 줌으로써, 수도자 역시 무림인의 행동을 파악할 수 없게 해 준다.
무림인과 수도자가, 일시적으로나마 대등(對等)해지게 해 주는 무학!
이것이.
‘인간이 하늘을 넘어서고자 만든 무학이다!’
빠르게 황태자의 의식의 결을 베어 내며, 그의 지근거리에 도달한 나는 검을 들어올렸다.
단악검법.
일 초.
월악!
파앗!
검사를 씌운 검이 황태자의 목을 정확히 노린다.
그리고, 쇳소리가 울렸다.
카앙!
반투명한 방어 법술이 어느새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허, 허억···! 이 놈, 무슨 잔재주를 부린 거냐!”
내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지근거리에서 목을 노리자,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그는 법결을 맺었다.
콰앙!
기(氣)가 꿈틀거리며 주변 기류의 흐름이 바뀌었다.
퍼엉!
나는 강력한 반탄력과 함께 뒤쪽으로 나가떨어졌고, 황태자를 중심으로 작은 용오름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잔재주는 재밌었지만, 진정한 수도자에게는 안 된다는 걸 보여 주마!”
피융!
그를 뒤덮은 용오름에서 수 개의 풍인(風刃)이 발사되었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 황태자의 의식 영역 바깥으로 피했다.
의식 영역 바깥에서는 의념의 흐름이 제대로 보인다.
단악검법.
괴암.
붕, 붕, 붕!
나는 공방일체의 태세로, 최적의 경로에 맞게 풍인들을 모조리 쳐 낸 후 다시 그의 영역 안쪽으로 들어갈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황태자가 다시 법결을 맺자, 용오름에서 내 상반신만 한 풍탄(風彈)이 쏘아지며 나를 노려 왔다.
‘일단 피해야겠군.’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신법을 펼쳐 막리세가의 영지 마을 안쪽으로 몸을 피했다.
콰앙, 콰아앙!
풍탄 공격에, 초가집 몇 채가 쓰러졌고, 그 안에서 범인들의 사체와 핏줄기들이 흘러나왔다.
‘회오리 안쪽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황태자의 회오리를 자세히 관찰하고는 혀를 찼다.
‘저 바람결 하나하나가 모두 풍인(風刃)이다. 안으로 접근했다가는 갈기갈기 찢길 거야.’
인식을 베고 접근해도 정작 회오리를 뚫지 못하면 타격을 줄 수 없다.
‘아니, 아니지.’
회오리를 뚫어도 황태자의 방어 법술이 남는다.
내 검사로는 그의 법술을 뚫을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저 모든 걸 뚫을 수 있을까.’
콰앙, 콰앙, 콰앙!
나는 마을의 골목에서 골목으로 피하며, 수도자들의 가옥을 방패 삼아 황태자의 공격을 막았다.
피하는 건 문제 없다.
계속해서 황태자의 의식 영역 밖에서, 풍인이 올 곳의 의념만 잘 관찰하면 되니까.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림인의 내공은 수도자의 법력보다 불순하기에, 내공이 아무리 많은들 무림인은 수도자보다 훨씬 빨리 지치게 된다.
‘시간을 끌면 안 돼.’
빨리 끝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지금, 바로 지금. 삼화취정에 올라야 한다!’
이 단서를 놓치지 말고, 바로 올라가야 한다.
죽을 각오를 다지고서!
타앗!
나는 월악보와 함께 한 가옥의 지붕에 올라가, 황태자가 던지는 풍탄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부웅!
콰아앙!
등맥의 초식으로 올려 베자, 풍탄은 반으로 쪼개져서 양쪽으로 날아갔다.
징, 징, 징!
‘손이 떨린다.’
그러나 과연 풍탄에 담긴 힘은 가공할 것이었다.
검을 쥔 손이 미치도록 아파 왔다.
‘저 공격들을, 계속 받아친다.’
그러나 나는 피할 생각을 접고, 계속해서 그의 풍탄과 풍인들을 향해 검을 뻗었다.
풍탄과 풍인의 의념이 나를 향한다.
나는 좌우에서 오는 공격을 보며 기수식을 잡았다.
단악검법.
산수화!
대각선의 참격이 좌우로 뻗어 나가며 달려드는 풍인과 풍탄을 벤다.
그러나 그 너머로 또 다시 끝이 없는 풍인들이 몰려 왔다.
‘멈추지 않는다.’
나는 검을 잡고 계속해서 초식을 펼쳐 나갔다.
단악검법.
요산요악.
유릉.
기석.
괴암.
종회무진하며 바람을 베고.
찔러 가며 풍탄을 터트리고.
변초를 준 후 공방일체로 막아 낸다.
그러면서,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접근하기 시작했다.
슈칵!
슈칵!
그 와중에도 미처 피할 수 없는 속도로 쏘아지는 몇몇 풍인들이 내 몸 곳곳을 베고 지나갔다.
어깨, 허리, 뺨, 허벅지.
풍인이 스치고 지나간 곳의 살점은 그대로 넝마가 되었다.
“흥, 어딜 감히 걸어오느냐! 죽어라!”
황태자가 법결을 맺자, 회오리가 꿈틀거리며, 수많은 풍인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풍인들은 이내 곧 한 마리의 붕조(鵬鳥)의 형상을 취하였다.
시뻘건 의념이 나를 향한다.
가공할 살의(殺意)가 내가 서 있는 공간 전체에 내리꽂힌다.
못 막는다.
못 피한다.
저게 날아오는 순간, 나는 죽는다.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그런 것이 걱정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적색의 의념 사이로 이어지는, 미약한 자색(紫色)의 의념을 좇을 뿐이었다.
‘자색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청색은 보신(護身)의 의념이다.
그렇기에 나에게서 뻗어 나간다.
적색은 살의(殺意)의 의념이다.
그렇기에 적에게서 뻗어 나온다.
그렇다면 자색은 무엇일까.
자색은···.
문득, 나는 적색과 청색의 의념이 이지러지며, 어쩐지 태극(太極)을 그린다고 느꼈다.
비록 청색은 적색에 비해 미약한 수준이었으나, 적색과 섞여 들어간다.
그리고, 적색과 청색의 사이.
그 곳에서, 자색(紫色)의 의념이 길을 연다.
‘자색은, 청색과 적색이 섞여 태어나는 색이다.’
적의와 자의.
호신의 의지와 살의의 의지.
어째서 두 의념이 섞일 수 있을까.
나는 문득, 내가 잡은 기수식을 보며 어이가 없었다.
저 무시무시한 공격을 마주하고서, 나는 단악검법 일 초, 월악(越岳)의 기수식을 잡은 것이었다.
‘살기 싫어진 건가?’
아니, 아니다.
나는 늘 살고 싶어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수식 또한 살고 싶다는 내 의지가 만들어 낸 기수식이라는 의미.
‘아, 그렇지.’
이건 단순한 월악이 아니다.
월악은 단악검법의 시작이자 끝.
그렇기에, 오의인 단악(斷岳)의 초식을 여는 초식 또한 될 수 있는 것이다.
끼에에엑!
붕조가 날아온다.
나는 붕조를 향해, 단악검법 이십이 초, 단악(斷岳)을 시작했다.
월악(越岳).
입산(入山).
등맥(登脈).
유릉(流陵).
괴암(塊巖).
기석(奇石).
심산(深山).
유곡(幽谷).
산수화(山水畵).
용맥(龍脈).
단애(斷崖).
십이광일출봉(十二光日出峰).
횡 베기를 하고, 하단세로 다시 베며, 검을 잡고 올려 베고, 구부정하게 찔러 든 후, 공방 일체의 태세로 회전하며 변초를 주고 달려들어 올려 벤다.
상대의 힘을 비틀어 흘려내어 무화시키고, 대각선으로 수차례 난무한다.
일순간 검기를 강화해 빠르게 종 베기를 한 후,
다시 속도에 변화를 주어 올려 벤 후, 그 너머로 열두 갈래의 검기를 쏘아 낸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뤄졌다.
나는 미친 듯이 단악검법을 펼치며, 끊임없이 자색의 궤적을 좇았다.
붕조의 힘이 더더욱 강해진다.
붕조의 몸에서 뿜어지는 칼바람에, 전신 곳곳에 칼자국이 나고 상처가 벌어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눈앞이 흐려졌다.
‘조금 더, 조금 더!’
계속해서 검을 움직여라.
한 발자국이라도 더 저 색에 가까워져라!
다음 순간, 죽을지라도!
‘재능이 없으면.’
요산요악(樂山樂岳).
기산심천(氣山心天).
첩첩산중(疊疊山中).
산중호걸(山中豪傑).
능곡지변(陵谷之變).
공곡전성(空谷傳聲).
‘미치기라도 해야지!!!’
지금 죽어도 좋다.
그러니, 제발 내게 길을 보여 다오!
그 순간.
나는 문득, 나를 향해 쏘아지는, 거대한 붉은 의념을 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무(武)를 겨루는 데에는, 나도 남도 없는 걸지도.’
나는 지금껏, 타인(他人)의 의념은 무조건 붉은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보자면,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념은 푸른색이고, 내 의념은 붉은색일 것이다.
나는 절정 고수의 세계가 타인의 의념과 내 의념밖에 없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어쩌면 틀린 생각일지도 몰랐다.
타인의 의념도.
나의 의념도.
관점의 차이일 뿐, 어쩌면 모두가 같은 색일지도 모른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관점을 달리하자, 내 의념이 붉은빛으로, 붕조의 의념이 푸른빛으로 보인다.
다시 눈을 깜빡였을 땐 다시금 색상이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의(意)가 사실 모두 같은 것이라면, 남는 것은 내 무(武)일 뿐인지도···.’
나의 색과 황태자의 의념의 색의 경계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 녹아들며, 내 눈앞에는, 천지사방이 자색으로 물든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몸은 실시간으로 넝마가 되는 중이었으나, 동시에 나는 기묘한 황홀경에 접어들었다.
무(武)라는 것은 결코 홀로서 완성되지 않는다.
이 무를 가진 나와 함께 춤출 상대가 필요한 것이다.
‘아, 그렇구나.’
나는 삼화취정의 경지가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상대와 통(通)하는 경지!
상대의 의념과 내 의념의 경계가 사라지며, 상대의 의도를 읽는 것에 있어 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세심해진 경지!
상대의 의(意)를 통해, 자기 자신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 역시 가능해지기에 자신의 모든 초식과 행동에 허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경지인 것이다.
나는 황태자의 의념에, 내 모든 식(式)을 거울처럼 비추며, 내가 그동안 얼마나 기(氣)를 낭비해 왔는지.
얼마나 초식을 펼칠 때 쓸데없는 동작들이 많았는지를 완전히 이해했다.
후우우우―
나는 호흡을 들이마셨다.
내가 초식을 펼치며 쓸데없이 흩뿌렸던 내력(內力)을, 다시 끌어 모은다!
***
어좌 암중 호위대는 마비산에 당해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서은현과 황태자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젊은 나이에도 압도적인 실전 경험을 가진, 백전노장의 절정 고수!
그것이 서은현이 암중 호위대에 들어왔을 때부터 받았던 평가였다.
그런 노련한 고수가, 몇십 년의 세월을 지새며 고련했다.
하지만 암중 호위대 모두가, 그가 황태자를 이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수도자였으니까.
무림인과는 별격(別格)의 존재였으니까.
실제로 서은현은 황태자와 싸우며 실시간으로 넝마가 되어 갔다.
몸에 바람구멍이 뚫려 갔고, 전신에 상처가 났으며 입에서는 피를 토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발악이, 무의미하리라는 것을.
그때였다.
대원들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서은현이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라리 검무(劍舞)에 가까워 보였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동작들.
하지만 그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다음의 일이었다.
서은현의 의념의 흐름이 정련된다.
동시에, 절정 초, 중기인 대원들이 도저히 그 궤적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리고, 주변으로 퍼지듯 이어지던 서은현의 의념은 어느 순간 세 개의 점으로 귀일(歸一)하였다.
“사, 삼···.”
검무(劍舞)를 추는 그의 머리 위로, 세 송이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삼화(三花)···취정(聚頂)!”
잠시간 그의 머리 위에 머물던 세 송이의 꽃은, 이내 그의 코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
후우우웁!
낭비되었던 모든 기력이 일거에 돌아온다.
단악검법을 연이어 펼치며 소모되었던 내력들이 순식간에 다시 차올랐다.
나는 대주가 공곡전성의 초식이 왜 삼화취정에 닿아 있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상대의 힘을 받아 되치는 초식.’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상대와의 의념을 주고받으며, 결국 통(通)하게 하는 연습이나 다름없었다.
‘···고맙소, 형님.’
지난 삶의 김영훈에게 마음속으로 깊은 감사 인사를 올리며, 나는 계속해서 검을 움직였다.
너도 없고 나도 없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오직, 무(武) 그 자체일 뿐.
어째서 삼화취정의 고수들이 무아지경에 빠지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형이상학적인 대답이 아닌, 네 의념도, 내 의념도 없는 상태에 도달하라는 조언이었던 것이다.
산명곡응(山鳴谷應).
구산팔해(九山八海).
무아지경에서 검을 떨친다.
검을 펼치는 데에 있어, 단 1푼의 낭비도 존재하지 않는다.
청색과 적색을 벗어난 자색의 영역에서, 나는 검의를 계속 불어넣었다.
‘너도 없고 나도 없이, 무(武)만이 존재한다면, 의(意) 역시 네 것도 내 것도 없겠지.’
검기가 검과 하나 되어 기를 불어넣고.
검사가 검의(劍意)를 깨달아 불어넣는 것이라면.
그 다음은.
‘검의(劍意)가, 세계(世界)를 흐르는 의념과 통(通)하게 하는 것일 터.’
파아아앗!
검사(劍絲)가 진화한다.
희미하게 검을 두르던 검사가 굵어지며, 빛무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마치, 검(劍)에 별빛(罡)이 맺힌 것만 같았다.
검강(劍罡)!
왜 내 본신의 힘만으로는 아무리 내력을 쏟아부어도, 검강을 1초 이상 유지시키지 못했는가.
삼화취정의 경지에서는 뻔한 얘기였다.
무(武)란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펼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의 의(意).
그리고, 세계의 의(意)와 통해야, 진정한 무를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이다.
단악검법.
천지(天池)!
나는 투명한 호수가 되어, 그대로 눈앞의 붕조의 ‘흐름’을 검으로 쓸었다.
기경팔맥이 존재하지 않는 술법체이건만, 나는 어째선지 붕조의 구조를 알 것만 같았다.
붕조 내부를 흐르는 의념의 흐름이 훤히 보인다.
붕조의 힘이 일순간 내 검으로 빨려 들어왔고, 나는 납검과 함께 단악검법 오의를 펼쳐 냈다.
단악검법.
오의.
“단악(斷岳).”
촤아아악!
납검했던 검을 다시 발검하며, 붕조를 향해 내뿜는다.
내 검에는 환한 검강이 뚜렷하게 맺혀 있었다.
쩌엉!
검강이 붕조를 산산이 갈아 버린다.
“후우···.”
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투명한 눈으로 회오리 속에서 이를 갈고 있는 황태자를 쳐다보았다.
“하, 이놈. 법술 하나를 파훼했다고 좋아하지 말아라.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수많은 풍인들이 뭉치며, 이번에는 거대한 교룡의 형상으로 변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저것들이 나를 죽일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았다.
타닷!
나는 월악보를 펼치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크오오오!
풍룡이 울부짖으며 날아든다.
나는 보법을 펼치던 중,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산군무(山君武)와 월악보(越岳步)는, 하나의 무공이었군.”
그동안 재능이 일천해서 깨닫지 못했었다.
그러나, 삼화취정에 오르자 이제야 보였다.
김영훈이 이 보법을 만들어 주며, 보법에 남겨 놓은 의도가.
산군(山君)이, 큰 산을 넘는다(越岳)!
‘그리고, 날아오른다.’
산군월악비(山君越岳飛).
나는 겅중겅중 뛰어오르며, 풍룡을 날듯이 피한 후, 그의 영역 안쪽으로 접어들었다.
“긴장하시지요. 전하.”
이제부터는, 월수궁무록을 펼치는 데에 아무런 제약도 없어졌으니까.
그의 영역에 들어간 순간, 황태자가 가진 식의 흐름이 내 전신을 쓸어 오는 듯한 느낌이 느껴졌다.
나는 월수궁무록을 사용해, 의(意)를 날카롭게 벼려, 상대의 식(識)을 그대로 잘라 내었다.
방금 전까지는 황홀경에서 무의식중에 잘라 낸 것이라면, 지금은 완전히 인지하고서 펼치는 일 식!
“하, 또 다시 잔재주를 쓰는구나. 하지만 네가 감히 이 회오리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황태자를 둘러싼 회오리.
저것은 수천수만의 풍인(風刃)들이 회전하는 법술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자신감이 생기는 듯 했다.
‘쳐 낼 수 있다.’
법술의 귀퉁이.
가장 풍인의 회전력이 약한 곳.
나는 그곳으로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카앙!
수십, 수백 개의 풍인들이 나를 향해 쏘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의념을 감지했다.
느껴진다.
카앙, 캉, 캉, 캉!
산수화(山水畵)!
수십 개의 참격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며 풍인들을 떨쳐 냈고, 나는 무사히 회오리의 안쪽에 진입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쯤 들어서자, 황태자의 의식은 더욱 더 농밀하게 응집되어 있어 더 베기 힘든 지경이었다.
‘상관은 없지.’
그러나, 이 거리면 어차피 내 검이 닿는 거리였다.
검강을 불어넣는다.
파아앗!
새하얀 빛이 검에서 터져 나왔고, 그제야 나를 발견한 황태자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방금 전에는, 검사로 방어 법술을 뚫지 못했지만.’
검강(劍罡)은 다를 것이다!
콰앙!
내 일 검에 황태자의 방어 법술이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크아아악!”
촤악!
내 검이 그의 목 일부분을 뜯어 냈다.
파아아앗!
황태자는 무언가 다급히 바람의 법술을 펼쳐 내 검을 피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의 눈에는 처음으로 공포가 떠오르는 듯했다.
“히, 히익. 오, 오지 마라.”
파앗!
나는 황태자에게 득달처럼 달려들며 월수궁무록으로 그의 식을 베어 갔다.
다시금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황태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꺼, 꺼져라! 꺼지란 말이다! 어, 어서, 저리 꺼져!”
콰아아아!
광풍이 몰아친다.
그는 내가 보이지 않으니 사방팔방으로 바람을 뿌려 댔으나, 나는 바람의 결을 빠르게 잘라가며 다시금 그에게 접근했다.
촤아악!
검강을 사용하며 또다시 녀석을 노렸다.
황태자는 기함하며 다시금 법술을 썼고, 또 다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어라! 죽으란 말이다!”
파아앗!
녀석이 법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자, 다시금 붕조와 풍룡, 봉황과 기린 등의 형상을 한 풍계 법술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삼화취정에 완전히 발을 디디고, 월수궁무록을 사용하는 내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슈칵!
심산의 초식으로 붕조에게 달려들어 베어 버리고, 다시 유릉의 초식으로 풍룡을 찔러 터트려 버린 후.
산군월악비를 펼쳐 다른 법술을 피하며 황태자를 쫓아갔다.
다시금 녀석은 강력한 법술을 쏟아내며 나에게서 도망쳤다.
상황이 역전되었다.
“흐, 흐억! 흐어억!”
황태자는 비참하게 도망치며 계속해서 법결을 맺었다.
단 한 푼의 낭비도 없이 내공을 사용하는 나에 비해, 맞지도 않을 큰 규모의 법술을 끊임없이 날려 대던 황태자는 어느새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주, 죽어! 제발 죽으란 말이야! 흐아아아!”
‘다음 일격으로 끝낸다.’
나는 기산심천의 초식을 준비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였다.
“하, 핫! 크윽!”
도망치던 황태자가 급격히 방향을 바꿔, 법술까지 쓰며 도약했다.
‘기산심천!’
슈칵!
내 검기가 크게 늘어나며 황태자의 다리를 노렸고, 그의 다리를 이내 잘라 버렸다.
“크아아아악! 제길, 제길! 무림인, 무림인 따위가! 왜 무림인 따위가!!”
그는 다리가 잘려 고통스러워하며, 나를 향해 이를 갈았다.
“너! 네가, 네가 지금 하는 게 옳은 일인 줄 아느냐? 네가 함께하는 진가 놈들은 뭐가 다를 줄 아느냔 말이다!”
나는 말없이 검을 들고 녀석에게 다가갔다.
“하하하! 그래, 네놈도 몇 년 전 아버님께 축허단을 하사받지 않았느냐! 축허단은 축기단과 같은 재료로 만들었지.
너 말이다. 연기기 수도자가 축기기로 올라갈 때 먹는 축기단이 뭔지는 아느냐?”
시끄럽게 떠드는 녀석을 향해 검을 들어올렸다.
“축기단은 인간의 100년 치 생명력과 정혈을 재료 중 하나로 한다! 축기기 수도자 중에서 축기단을 먹지 않고 축기기에 이르는 수도자가 있을 것 같나?
9할 9푼 이상의 축기기 수도자들이 축기단을 처먹고 경지에 오르는 것이야! 네가 따르는 진가 놈들도 결국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사람을 잡아먹는 건 똑같단 말이다!
너도 축허단을 먹은 이상, 다를 건···.”
퍼억!
나는 황태자의 가슴을 발로 걷어찼다. 그는 컥컥 거리며 숨을 토해 냈다.
그러나, 나 역시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너무 피를 많이 흘렸다.
살점이 송두리째 뜯겨 나간 곳도 있었으며, 허벅지 쪽에서는 점차 감각이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잠시 아래에서 컥컥거리는 황태자를 내려다본 후, 품에서 비단궤를 꺼냈다.
그리고, 비단궤의 안쪽에 있던 축허단을 꺼내 보았다.
붉은빛이 도는 탐스러운 단약.
범인이 한 알을 먹으면, 수명을 10년이나 늘려 준다는 천고의 영약.
나는, 오늘에서야 축허단에 도는 붉은 빛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툭―
뿌드득.
난 이 더러운 단약을 황태자의 옆으로 던진 후, 발로 밟아 으깨 버렸다.
“걱정 마라. 앞으로, 너희 수도자들이 만든 더러운 단약은 절대 먹을 생각이 없으니까.”
화르륵, 화르르―
막리세가의 거점이 되는 영지는, 어느새 진씨세가 수도자들이 쓰는 염계 법술에 의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영지의 상공에는 축기기 수도자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김영훈 역시 그 싸움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빨리··· 도우러 가야 하는데.’
방금 축허단을 먹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움직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인간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더러운 단약 따위, 입에 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스릉―
나는 검을 들었다.
“잘, 가시오.”
그리고, 황태자를 내리쳤다.
슈칵!
뭐지?
왜, 내 몸이 거꾸로 서 있는 걸까.
나는 문득, 목 아래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렇구나. 내 목이 잘린 거로군.’
황태자의 가슴 어림, 그가 차고 있는 목걸이에서 갑작스레 날아온 풍인 때문이었다.
그 풍인은 나로서는 감히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이 빨랐다.
‘베야··· 하는데.’
이제야, 경지에 올라.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죽는 건가.
‘···아니, 아니다.’
이렇게 죽을지언정.
한 푼이라도 도움이 되어라.
바라던 경지에 올랐을진대,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소냐!
‘벤다! 벤다!’
설령 죽더라도, 벨 것이다!
***
“허억···헉···.”
연국의 황태자, 막리현은 갑작스레 목이 떨어진 서은현을 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 살았다.’
연국의 황태자인 그에게 주어지는, 구명법기.
축기기 수도자급의 일격을 낼 수 있게 해 주는 일회용 법기가 발동된 것이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
그는 미친 듯이 웃었다.
“내가, 내가 이겼다! 이 범인 녀석아! 너 따위는 절대 수도일족에게 도전할 수 없단 말이다! 하, 하하! 커헉! 컥!”
그는 피가 섞인 기침을 토했다.
무리하게 강력한 법술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법력이 전부 닳았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단 영석으로 법력을 회복하자.’
그는 상공을 바라보았다.
서은현과 함께 온 무림인 중엔, 어찌 되먹은 놈인지 축기기 장로들과 정면에서 일전을 벌이는 괴물마저 있었다.
‘괜히 공을 세워 보겠다고 왔어. 일단 빠져나가야 한다. 자칫하면···.’
그때였다.
꿈틀―
“···?”
목이 떨어진 서은현의 시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막리현은 멍청하게 시체를 바라보았다.
목이 떨어진, 몸만 남은 사체가, 기수식을 잡는다.
“뭐, 뭐야! 흐, 흐아아아!”
법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강시도 아니었다.
“왜, 왜 움직이는 거냐!”
그는 일어서서 도망치려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그의 의식 영역에 서은현의 의념이 잡혔다.
‘이건···.’
집념(執念)!
무슨 일이 있어도, 일단 앞의 상대를 베겠다는, 가공할 집념이 서은현의 몸 안에서 남아 날뛰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범인 따위가 가질 수 있는 집념이란 말이냐!’
서은현의 시체가, 기수식을 잡는다.
시체인지라 검에 기(氣) 따위는 모이지 않았으나, 막리현은 현재 법력도 없고, 몸은 움직이지 않는 상태였으며, 일회용 구명법기조차 써 버린 상황이었다.
검이 움직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어떻게 범인 따위가 이런 집념을 가졌단 말이냐! 어떻게 그런 걸 가질 수 있다는 말이야! 왜, 왜! 죽어서도 포기하지 않는 거냐!”
서은현의 육신이.
그가 평생 동안 무(武)를 연마해 온 그의 육신이.
수십 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검을 으스러져라 잡던 그의 손이.
평생을 연단(鍊鍛)해 온 그의 무(武)가, 죽어서도 스스로 움직이며, 제 할 일을 수행한다.
“왜 포기하지 않는 거냐! 왜 죽어서까지 저항하느냔 말이다!!!”
슈칵!
서은현의 검은 막리현의 입 위쪽을 깔끔하게 잘라 내어 버렸다.
그의 입은 죽는 순간까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벌어져 있었고, 그의 눈은 죽는 순간까지 믿을 수 없다는 공포감이 깃들어 있었다.
서은현의 목은, 떨어진 상태에서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쉬지 않고 자신을 연단(鍊鍛)해 온 그의 이번 생애가 끝났다.
그것이, 서은현의 다섯 번째 회귀(回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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