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02화 (102/185)

연(10)

이 세계가 어항이라면, 도대체 비승은 뭘까?

승천문은 또 무엇이고, 봉명성은 무엇일까.

'아니, 아니다.'

나는 과격한 망상들을 지웠다.

'그냥 세상이 이렇게 생겨먹었을 수도 있지. 과대망상 하지 말자.'

무엇보다 이 세계가 어항 같은 곳이라면.

금신자 양수진은 왜 다시 그 좁은 어항에 들어왔단 말인가?

상계에서도 허공을 찢고 다시 내려올만큼 강대한 존재가 왜?

'그냥 이 세상이 이렇게 생긴 것이겠지. 과대망상을 가지지 말자.'

왜냐하면, 너무 큰 상상을 하면 결국 심마(心魔)가 올 것 같았으니까.

"...둥글지 않은 세상이라..."

하긴, 생각해보면 대륙을 뒤덮는 천인기 수도자들이 마구 활개치는 세상이다.

그런 세계의 구조가 애초에 지구와 똑같으면, 그것도 말이 안 되지 않는가.

세계가 얼마나 튼튼해야 그런 걸 버틸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아, 둥근 세계라 하니까, 생각해보니 다른 동화도 떠오르네요."

"....?"

북향화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릴때 읽은 동화책 중에는, 저 멀리 별들이 있는 성계(星界)에도 사람들이 사는데, 성계의 사람들은 둥근 땅에 붙어산다는 내용이었어요.

정말 재밌죠? 땅이 둥글다니. 둥근 땅에 붙어있으면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은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계속 매달려 있어야 하려나요?

정말 재밌는 상상력을 발휘한 동화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나는 어느덧 노을이 지고, 하늘을 덮기 시작하는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성계...'

무수한 별하늘.

어쩌면, 저 별하늘은 제대로 된 행성들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 세상만 이런 기이한 구조인 것일까?

아니면 이 세상 말고도 이런 기이한 구조의 세상이 더 있을까?

이 세상만 이렇다면, 이 세상은 도대체 왜 이런 기이한 구조인 것일까?

나는 몇 가지를 더 생각해 봤지만, 머리만 복잡해 졌다.

'됐다, 일단 지금으로선 알 수 있는 게 없다.'

가장 좋은 건, 천인기 이상이 되고 나서 직접 이 세계의 구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래, 지금은 눈 앞의 일에 집중하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세계의 끝에서 얼마간 하늘을 구경하던 북향화와 함께 다시 배에 올라탔다.

"정말, 아름답네요. 하늘이 발 아래에 있는 저 곳은..."

"...그러게 말입니다."

"휴우, 이제 갈까요?"

"좋습니다. 가주님과 청문 수사도 걱정하고 계실테니, 이만 돌아가죠."

"맞아요, 아 그리고 극서지방이면... 다시 벽라국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려나요?"

"못해도 한두달은 잡으셔야 할 겁니다."

"아버지가 걱정하겠네요."

나는 북중호를 걱정하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

"본디 북 소저의 내기에서, 상품으로 걸린 건 법기들이 아닌 북 소저와의 유람이었으니, 이번 기회에 유람한 걸로 치는 게 어떻습니까."

"그냥 허겁지겁 돌아가는 게 유람이라고요? 서 수사는 아깝진 않나 보네요?"

"아까울 게 무에 있겠습니까. 저야 원래 세상 곳곳을 잘 돌아다니던 산수인지라 유람은 실컷 했습니다."

내 말에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밤바다를 지켜보았다.

나는 그녀의 의념에서 아쉬움의 색을 읽어냈다.

"...돌아가면서, 그래도 성제국이나 연국 등에 들려 조금씩은 유람을 해 보지요."

"네, 그것도 좋겠네요."

"....?"

'왜 기분이 안 풀린 것 같지?'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의념은 사라지지 않았기에 난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 * *

휘이이이-

며칠 후.

우리는 동쪽으로 움직인 결과, 다시금 금신천뢰문의 터가 있는 대산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은 금신천뢰문이 터를 잡았던 대산맥의 쇄천봉이라는 곳입니다. 북 소저도 들어보셨겠지요?"

북향화는 쇄천봉의 절경을 보며 작게 탄성을 터트렸다.

'지난 생에는 나와 김영훈에 의해 다 무너졌던 곳들이었는데, 멀쩡한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롭군.'

그녀가 쇄천봉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고서에서 봤어요. 가장 높은 봉우리에 금신천뢰문의 신물(神物), 선보(仙寶) 천뢰번(天雷幡)이 보관되어 있었다죠? 그 역시 천하에 없을 위대한 선보였다고 하던데.

장인으로서 그것 못 본 게 한이네요. 천하삼대신물을 보고 싶었는데, 다 망가진 섭명함 밖에 못 봤으니 너무 아쉽네요."

천하삼대신물(天下三代神物)은 전 대륙에 위명을 울렸던 세 문파의 신물(神物)을 의미했다.

흑색귀골곡의 섭명함(涉冥艦)

금신천뢰문의 천뢰번(天雷幡)

창천개벽문의 청천갑(靑天鉀)

그 보물들은 하나하나가 선보(仙寶), 혹은 선보에 맞먹는 규격 외 법보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금신천뢰문의 천뢰번은 금신자 양수진이 선계에서 사용했다는 전설이 있는 진짜배기 진선의 법보였다.

섭명함이 명계도 건널 수 있다는 전설이 있듯이, 천뢰번은 천겁(天劫)을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는 전설도 있었으니, 그 위력과 위상은 직접 보지 않아도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작 청천갑은 별 소문이 없지만 말이지...'

애초에, 창호자가 볼 때마다 입고 있는 그 푸른 갑옷이 규격 외 법보라는 청천갑일 확률이 높았고, 볼 때마다 단단해 보이는 것 외에는 별 기능이 없어보였다.

때문에 누구도 청천갑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청문세가 역시 가문의 기밀이라 외인인 내가 물으면 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뭐, 애초에 신외지물엔 별 관심 없어서 상관도 없지만.'

북향화는 천뢰번이 머물렀다는, 쇄천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를 하염없이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였다.

"앗...!"

쇄천봉의 아래쪽.

저 아래에서 약초를 캐는 듯 하던 몇몇 노인과 젊은이가, 비행법기로 하늘을 날던 우리에게 공손히 절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북향화는 당황하며 내게 물었다.

"저, 저 분들은 왜 저희한테 절을 하는 거죠?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는데..."

"음... 북 소저. 천색성 바깥으로 한 번도 나와보신적 없으신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사실 벽라국 동부를 벗어난 적은 별로 없어서요. 연국에 간 적도 있긴 하지만. 한 사흘 정도만 법기 때문에 출장을 갔다가 서둘러 왔던지라..."

"아, 그러셨군요."

나는 그녀에게 일반인들이 수도자에 대해 가지는 인식에 대해 알려주었다.

"천색성이나 벽라국 동부는, 공묘세가의 영역인지라 양질의 법기가 끊이지 않아 법기를 찾는 수도자들이 아주 많지요.

때문에 범인들도 수도자들에 대해 상당히 친숙한 반면, 연국이나 성제국은 수도자들의 존재조차 모르는 범인들이 태반입니다. 그냥 전설 속에 전해지는 신선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지요."

"아, 그렇군요..."

'왜 북중호가 자기 딸이 벽문성 놈이 말한 유람을 조건으로 한 내기를 했는데도 가만히 있었는지 알 것 같군,'

바깥 세상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아닌가.

"아, 그런데 저 분들, 뭐라고 빌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런 것 같군요."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요?"

나는 잠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마음이 이끄는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그녀는 악인도 아니었고, 사막의 여행자에게 물을 선뜻 건낼 정도로 선인이니, 그녀라면 범인들에게 간섭해도 문제는 없을 터였다.

우우웅!

그녀는 비행법기의 고도를 낮추어 간절히 뭔가를 빌고 있는 이들에게 내려갔다.

"아, 시, 신선님이시다!"

"선인님들이 기도에 응답했어!"

"선인이시여! 부디 저희 마을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은 성제국어로 우리에게 빌었고, 나는 성제국어를 통역해서 알려주었다.

"저런, 어르신.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그녀는 그 중 가장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촌로에게 물었고, 난 촌로에게 그녀의 말을 통역했다.

"무슨 일이오?"

외견상으로 보면 건방져 보이겠지만, 지금 내 정신적인 나이만 치면 이 촌로는 솔직히 핏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생을 넘기면 이제 원립보다도 더 늙은이가 되겠군.'

속으로 자조섞인 웃음을 지으며, 촌로에게 묻자 촌로는 황급히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 선인님! 저, 저희 마을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마을에는 매번 보름마다 지네 요괴가 나타나 혼기가 찬 처녀와 총각을 잡아먹습니다.

하여 관아에 신고도 했으나, 관아에서도 묵묵부답이고, 무림고수님들을 초청하여 물리쳐 달라 했으나 전부 지네 요괴의 밥이 되었습니다!

부디 도움을 주십시오...!"

'관아에 요청을 했다면, 수도가문들이 움직였을텐데...'

나는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대략, 서악이라는 산간지역의 마을은 평화로웠으나,

어느 날부터 지네 요괴가 나타나 마을의 혼기가 찬 처녀와 총각을 보름마다 잡아먹었다.

요괴는 지성이 있는 것 같았지만 다른 공물을 바쳐도 말이 통하지 않았고, 관아에 신고도 해 보았으나, 수상한 행색의 사람들이 지네에게 다녀온 후론 오히려 관아에선 그들을 모른척 했다고 한다.

서악 마을은 답답함에 못 이겨 무림고수를 초빙해 요괴를 잡아달라 했으나, 오히려 무림고수들은 전부 잡아먹히고 요괴의 심기를 건드린 탓에 더 많은 마을사람이 잡아먹혔다고 했다.

'수상한 행색의 사람들이 다녀간 후로는, 오히려 관아가 모른채를 했다고?'

수도가문과 요괴 사이에, 거래가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유추해 낸 후, 내가 유추해낸 사실까지 북향화에게 말해주었다.

"어쩌겠습니까, 소저. 복잡한 일인듯 한데, 도우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듯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돕고 싶어요. 만약, 서 수사의 일정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요."

"하하, 제 일정은 급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북 소저가 돕고자 한다면 저 역시 도와드리지요."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얘기를 나눈 후,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노인과 다른 약초꾼들에게 말했다.

"도와드리겠소. 안내하시오."

"가, 감사합니다...!"

우리는 촌로의 안내를 받아, 배에서 내려 서악 마을로 갔다.

마을의 집은 수 채가 무너져 있었고, 곳곳에 지네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깊은 구덩이가 패여 있었다.

"매번 지네 요괴가 찾아오려 할 때마다 막으려 애쓰지만, 지네 요괴는 늘 거슬리는 건 부숴 버리고, 숨어있던 처녀와 총각을 찾아 집채로 부숴버리고 먹어치웁니다..."

"......"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집에 비밀 공간을 만들어 숨어있거나, 그도 아니면 마을을 떠나려 준비중이지요. 아마 선사님들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저희 서악 마을은 그대로 해체될지도 몰랐습니다."

나는 촌로에게 물었다.

"알겠소, 일단 그 지네 요괴는 어디에 사는지 알 수 있소?"

"저 봉우리 너머에 큰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 안쪽에 삽지요..."

나는 북향화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 한번 갔다와 보겠소."

* * *

우리는 촌로가 알려준 봉우리를 넘어, 지네가 산다는 동굴에 도착했다.

곳곳에 사람의 인골이 낭자해 있었고, 안쪽에는 거대한 기운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런가, 축기 후기경 요괴였군.'

나는 왜 수도가문 사람들이 이 요괴를 처리하지 못했는지 알 것 같았다.

축기경이라면 나름 수도가문의 장로급 인사였다.

그것도 장로들 중에서도 상당한 고서열의 장로.

그렇다고 범인들의 생활을 위해 굳이 결단기 가주나 원로급 인사가 나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우우웅!

동굴에 들어선 우리에게, 의식영역을 통해 지네의 영언이 울려왔다.

[누구, 냐?]

나는 잠시 동굴 안쪽의 어둠을 직시했다.

뭔가가 안쪽에서 꿈지럭거리더니, 이내 거대한 지네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영언으로 지네에게 물었다.

[왜 인간 마을을 습격해서 그들을 잡아먹나? 다른 사냥감도 많을텐데. 거기에...]

나는 여우 요괴의 반응을 생각하며 말했다.

[사람 고기가 너희에게 그렇게 맛이 좋은 건 아닌 듯한데, 어째서 사람 고기를 굳이 찾아 먹는 거지?]

지네는 잠시 더듬이를 꿈지럭대더니 말했다.

[사람, 고기. 먹으면, 나와 같은, 자식들을, 낳을 수 있다.]

[뭐?]

[나, 외로웠다. 내 동족들은, 나와 같은 지성이 없다, 동족들과, 아이 낳아도, 내 아이들은 수명이 짧다.

예전에는, 나와 말이 통하는, 친구들,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하늘을 움직이는 인간들이 내 친구들, 다 잡아갔다. 기운이 강한 이들은 잡아가고, 이 근방엔, 나밖에, 안 남았다.]

나는 지네 요괴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생각, 했다. 지성이 있는 사람, 먹으면, 자식들도, 지성이 있을, 거다. 그래서, 사람 중에서 아직 순수한 피를 가진, 처녀와 총각이란, 것들을, 먹었다.]

요족은 본디 일반적인 짐승이 오래 살아 요단을 얻음으로써 탄생한다.

하지만 일반적인 짐승이 오래 살아 보았자, 뭘 얼마나 오래 살겠는가.

보통 일반적인 짐승이 요족이 되는 것은 엄청나게 희박한 확률을 타고나거나,

대형 요족이라 불리는 거호족, 성붕족, 해룡족 등 특별한 피를 받고 태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특별한 피를 가진 대형 요족이 아닌, 일반적인 요족들은 그 형질이 딱히 유전되진 않았다.

수도자들은 수도자끼리 혼인하면 영근이 유전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수도세가라는 것이 있는 것이었고.

하지만 요족은 어떤가.

이들은 요족이라고 통틀어 불릴지언정 사실 전부 다른 종족이었고, 같은 종족끼리 만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

거기다가 같은 종족끼리 만나서 교미한다고 해도, 그 자체로 영성의 유전 확률은 인간 수도자들보다 낮았다.

그리고, 그런 것은 딱히 사람 고기를 먹는다고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네가 그런 걸 먹는다고, 네 자식들이 요단을 가진 채 태어나진 않는다.]

[아니, 반드시, 태어날, 거다!]

[누가 그랬지?]

[내, 직감이, 그랬다! 인간들은, 요단이 없어도, 머리가, 좋다! 분명, 그런 인간들, 먹으면...]

나는 지네의 말을 끊었다.

[그런 일은 없다. 네 자식들이 너와 같아지는 방법은, 그저 자식들이 오래 살아남아 영성을 깨치고 받아들여 요단을 스스로 응결하는 법 밖에 없어.]

[아니다! 너희, 영기를 품은 족속도, 내게 찾아와 말했다, 응원한다고! 그리고, 마을 먹는 거, 허락해줄, 테니, 나한테, 허물, 달라고, 했다!]

'역시, 수도가문들은 지네의 허물을 댓가로 지네를 내버려둔 거로군.'

어차피 수도가문에게 범인들의 마을 한둘 따위야 알 바도 아니고, 지네도 예상외로 강하니 응원하는 채 하며 허물이나 받아낸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너를 응원한답시고 기만한 것이다. 그들이 응원한다고 네 자식이 갑자기 영험해지진 않는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 마라!]

내 말에 지네는 갑자기 몸을 뒤틀며 노한 기색을 드러냈다.

[내 자식들은, 전부, 나와 같아질 거다! 너희도, 순결한, 처녀와 총각이니, 너희를 먹으면, 가능할, 가다!]

쿠구구구구!

지네가 몸을 뒤틀며 독을 내뿜었다.

나는 그 독기에 격공장을 쏘아 물리며, 북향화를 바라보았다.

"아예 말이 안 통하는군요. 사람도 이미 수십은 잡아먹은 놈인 듯하니..."

"...예, 삶을 끝내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녀는 동굴 곳곳에 쌓인 인골을 보며 참담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나는 무형검을 쥐고, 지네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갔다.

그때였다.

키이이이익!

지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자, 동굴 안쪽에서 수천마리의 박쥐떼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곳곳에서 다른 지네들은 물론이고 뱀과 전갈 등, 수많은 독물(毒物)들이 주변에서 기어나왔다.

쿠과광!

지네는 무형검을 꺼낸 내게 몸통박치기를 시도했고, 나는 동굴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녀석은 정순지력을 풍기는 나를 먼저 사냥할 예정인지 내게 달려들었고, 지네가 불러낸 독물들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북 소저, 괜찮겠습니까?"

나는 독물들에게 노려지는 그녀에게 소리쳤고, 북향화는 말 없이 저물법기를 열었다.

쿵, 쿵!

쿵쿵쿵쿵쿵!

그리고, 그녀의 저물법기에서 수십개의 비검 법기, 거울, 비파, 방울, 비수, 바퀴, 베틀, 북, 거문고 등 수백개에 달하는 법기들이 튀어나와 그녀의 주변을 메웠다.

"제 걱정은 마세요."

쿠구구구구!

그리고, 수많은 법기들이 동시에 발동하며 빛을 뿜기 시작했다.

"늘 주머니는 든든하게 하고 다니거든요."

그 말과 동시에, 사방으로 비검과 수많은 법기들이 날아가며 독물들을 밀어내고, 강력한 법술들을 흩뿌렸다.

"하..."

나는 아득하게 많은 법기들을 꺼내 주변으로 흩뿌리는 그녀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걱정할 건 없는 여자로군.'

나는 눈 앞에서 독안개를 흩뿌리는 거대 지네를 보며 무형검을 들어올렸다.

[네 자식 얘기는 안타깝지만, 네가 먹어온 인간들은 무고한 인간들이고, 네 자식들이 영성을 갖추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계속 사람을 먹겠다니 어쩔 수 없군.]

부웅!

나는 무형검을 휘둘렀다.

일순간 검이 천변만화하며, 내게 뿜어지던 독안개를 모조리 걷어내어 버렸고, 그대로 지네를 후려쳐 떨쳐 버렸다.

'단단하군.'

지네의 갑피는 상당히 단단했다.

'아무리 공격용이 아니라 안개를 걷어낼 용도로 휘두른 거라 해도 한 번은 막아낼 줄이야...'

물론 정작 무형검을 얻어맞은 지네는 입에서 독혈을 토하며 비틀거리는 중이었다.

딱 봐도 상태는 좋아보이지 않았다.

"잘 가라."

나는 지네의 위쪽으로 떨어지며, 지네의 머리에 무형검을 박아넣었다.

콰아아앙!

전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결단기 수준의 무형검이다.

축기경 후기 수준의 지네 요괴는, 이젠 솔직히 전투의 대상도 아니었다.

[키...이익, 키에엑...]

벌레 요괴는 생명력이 끈질긴 것인지, 녀석은 머리에 무형검이 박혔음에도 몸을 몇 번이 꿈지럭 거렸다.

[내, 자식, 들... 자식...들...]

잠시 꿈지럭거리던 녀석은, 독혈을 뿜어내며 읊조렸다.

[이...놈, 곱게는, 안, 죽을, 거다...]

우우웅!

지네의 머리에서부터 어떤 파동이 뿜어지며 주변으로 흩어졌다.

그 파동은 지네 요수가 부리던 독물들에게로 가 닿았고, 북향화를 상대하던 독물들은 이내 갑자기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방금 그건...'

요족어를 할 줄 아는 나였기에, 방금 지네가 뿜은 파동을 읽을 수 있었다.

'놈... 독물들로 하여금 마을을 계속 습격하라는 명을 내렸군.'

당장 오늘밤부터, 독물들이 마을을 습격하기 시작할 터였다.

"빠르게 끝내셨네요."

"흠, 소저는 그걸 보고도 아직도 내 법기를 만들 생각이 드십니까?"

"아하하, 그건 제 자존심이라니까요. 꼭 만들 거에요."

그녀는 두 주먹을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네 요수는 죽었고, 할 말이 있습니다."

나는 지네 요수가 마지막에 독물들에게 내린 명령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일단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 독물들까지 해결해 줘야겠지요. 소저는 무슨 방법이 없습니까?"

"흠..."

잠시 고민하던 북향화는 금세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런 류의 주문은, 보통 3~5달. 정말 길면 반년까지 가곤 해요. 그러니까, 마을에 반년 정도만 작동하는 수호법기를 하나 설치해주면 될 것 같은데요?

그리고 독물들은 밤에만 습격을 한다 했으니, 밤에만 마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면 되고요. 그렇게 반년 정도만 버티게 하면 나머지는 자연히 알아서 해결될 거에요."

"호오..."

연기사는 이런 방면으론 유용한 듯싶었다.

"좋은 방법이군요."

"그렇죠, 그나저나..."

그녀는 동굴 안쪽을 둘러보며 말했다.

"유해들을 수습해 볼까요?"

* * *

나는 서악 마을 사람들을 불러와, 동굴 안쪽에 있던 독기들을 법술로 빼낸 후 그들이 동굴로 들어가 친지의 유해를 수습하게 해 주었다.

"감사, 정말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눈물투성이가 되어, 자신의 아들의 유해를 되찾고는 내 손을 잡고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니외다."

나는 담담히 촌장의 감정을 받아준 후, 그에게 지네 요수가 독물들에게 내린 명령을 전달했다.

"그, 그런..."

"걱정 마시오, 내 벗이 그런 점 역시 며칠 안에 해결해 준다 하니."

나는 마찬가지로 마을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는 북향화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 며칠 동안은 내가 독물들의 침입은 막아주겠소."

"아아...! 감사드립니다!"

촌장은 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북향화에게도 가 인사를 했다.

그녀는 성제국어는 몰랐으나, 촌장의 인사를 받고 따스한 미소를 지어줄 뿐이었다.

모든 이들의 유해가 다 수습되었다.

"이만 마을로 돌아가지요."

"잠시만요, 서 수사."

"예?"

북향화는 저 계곡 아래 떨어진 지네 요수의 시신을 가리켰다.

"혹시 저 근처로 함께 가주실 수 있나요?"

"아, 물론이지요."

우리는 지네 요수의 사체 근처로 다가갔다.

"어떤 일 때문이십니까? 아, 혹시 법기 재료를 구하려 하십니까?"

"음..."

잠시 지네 요수를 쳐다보던 그녀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이 요수도 묻어줄까 해서요."

북향화는 요수의 앞으로 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 요수도 자식들의 어머니였던 거잖아요. 죄없는 사람들을 먹어치운 극악한 요괴이긴 하지만, 전부 모성애로서 행동한 것이니 단순한 악이라 보기엔 힘들겠죠. 그리고..."

그녀는 옥색 노리개를 들어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쩐지, 제 어머니 생각도 나네요."

"...알겠습니다. 같이 묻어드리죠."

우리는 동시에 토둔술을 사용해서 지네 요수를 땅속으로 묻었다.

그리고 북향화는 지네 요수를 묻은 후 자신의 저물법기에서 유리팔찌를 빼내서 그 위에 놓아주었다.

'벽라국인들은 죽은 이의 무덤에 유리 부장품을 놓는다 했었지...'

"이제 가죠."

"그러지요."

나는 북향화를 따라가며, 그녀가 만들어준 지네 요수의 무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 위쪽에는 그녀가 놓아둔 유리 팔찌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서악 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죽은 이들의 유해를 수습하고, 한바탕 슬픔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이젠 더는 공포에 떨며 마을을 떠날 걱정에 떨지 않아도 되는 것이 더욱 더 그들에게 크게 다가온 모양이었다.

"일단, 죽은 이들의 위령제를 겸해 조촐한 마을 축제를 열 예정입니다. 혹여 두 선인 분께서 참석해주시어 축제를 빛내주실 수 있으신지..."

나는 촌장의 말을 북향화에게 전했고, 그녀는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참석하겠다고 하였다.

"북 소저는 참석하겠다 하외다."

"알겠습니다. 하면 선인 님은...?"

촌장은 나를 보며 물었다.

'참여해야 하나...?'

별로 축제에는 흥미가 없어, 고민할 때였다.

"반려 분도 참여하신다 하시는데, 어찌 신랑 분께서 참여를 망설이십니까. 허허.."

"...우리 둘은 딱히 반려가 아니오만."

"아, 저런. 아직 혼인을 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아니, 애초에 북 소저에겐 따로 혼인이 약속된 사람이 있소."

"아, 그렇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외다. 나는 그럼 마을 외곽에서 독물들을 대비해 경계를 서고 있을테니 축제 준비를 하시오."

나는 북향화에게 축제에 대해 설명을 한 후,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곧 해가 떨어질 터였다.

"음?"

그때, 나는 마을 외곽에서 한 서책을 들고있는 꼬마 여자아이를 발견했다.

"얘야, 마을로 들어가거라. 축제가 시작될 거다."

"아, 선인님."

아이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언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언니가 곧 돌아온다고 했거든요."

"그랬니? 언니는 어디갔는데?"

"언니는 저 산 너머로 갔어요! 산 너머 부잣집에서 일을 하고 온다고 했어요!"

아이가 가리킨 산은, 지네가 살았던 산이었다.

"......"

나는 순진하게 서책을 들고 기다리는 아이를 보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잠시 침묵했다.

"...그나저나, 그 서책은 뭐니?"

"아, 옛날옛적 설화들이 담긴 서책이에요. 언니가 돌아오면 읽어준다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어요."

나는 씁쓸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는 게 어떠니?"

"조금 더 기다릴 거에요. 오늘 마을 어른들이, '많은 사람들이 돌아왔다'고 했어요. 제 언니도 돌아올 거에요."

"...얘야. 그 책은 내가 읽어주마."

"음... 언니한테 읽어달라고 하고 싶은데..."

"...나는 선인이잖니? 내가 읽어주면 네게도 복이 있을 거란다."

아이는 순진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정말요?"

"그럼."

"그럼 읽어주세요."

나는 아이가 든 설화집을 받아들고, 토 속성 법술을 써 흙을 들어올려 나와 아이가 앉을 의자를 만들었다.

"와아..."

"신기하지? 앉아라. 읽어주마."

나는 설화집을 펼쳤다.

그리고, 나는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에, 절로 헛숨을 들이켰다.

"뭣...!"

설화집의 첫 장에는, <제일장(第一章), 종명자(終命者) 이야기>라는 소제목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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