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12)
쌍선무의 제는 달이 중천에 뜨자 서서히 흥이 식었고, 점차 정리되었다.
"힘들었지만, 상당히 재밌었네요."
북향화는 싱긋 웃으며 땀을 닦았다.
"마음에 드시니 다행이군요."
나는 축제가 끝난 후에도 몇 번이나 축제 때 밟았던 보법과 춤사위를 반복하며 대답했다.
"그런데, 뭘 하시는 건가요, 서 도우?"
"아, 어째 이 춤사위가..."
붕, 붕, 붕!
나는 몇 번이고 회전하며 춤사위에 숨겨진 동작을 이끌었냈다.
"창법(槍法) 같아서 말입니다."
파앙!
허공에 강기를 씌워 손에 잡고, 그대로 허공을 찌르자, 춤사위 속에 숨겨져 있던 창법이 내 손에 구현되었다.
'공방일체의 무결성을 추구하는 창법이군...'
창법의 무리(武理)가 자연스럽게 춤사위에 섞여있어 쌍선무를 추며 체득할 수 있었다.
어느덧 무공을 익힌지도 수백년을 넘었다.
일정 경지 이하의 무공들은 그 생성 원리와 무리를 간단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해졌기에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몇 번 정도 창법을 펼치며, 창법을 완전히 복원해 보았다.
'상당히 훌륭한 창법이다. 김영훈이 직접 개량해준 24초의 단악검법에는 못 미치지만, 초창기 내게 만들어줬던 12초의 단악검법에는 충분히 비할만한 좋은 무공이야.'
나는 창법을 복원해 본 후, 나를 옆에서 신기하게 바라보는 북향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색성에서도 간혹 봤어요. 그게 '무공'인 건가요?"
"예, 범인들이 익히는 호신술입니다. 수도자들에게는 잡기 취급당하는 정도지만, 제대로만 익히면..."
우우웅!
나는 무형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런 경지까지 도달하는 게 가능하지요."
부웅!
무형검이 다시 사방으로 날아가며, 마을에 침입하려 드는 독물들을 격추시켰다.
"아하, 서 도우가 지닌 그 법술은, 그러니까 원래 무공이었던 거군요."
"음, 원래 무공이 아니라 지금도 무공이긴 합니다만..."
사실 이제는 몸을 움직이는 무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위력이 강해진 점은 있었다.
"어쨌든..."
나는 무형검을 보여주며 말했다.
"정 북 선자가 법기를 만들고자 하시면, 참고하라고 알려드렸습니다."
"어머, 그동안은 계속 부정적인 쪽이시더니 갑자기 마음이 바뀌셨나보네요?"
"문득, 무인(武人)들도 쓸 수 있는 법기는 없을까, 만약 있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아하, 그러셨군요."
그러나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저는 무인들을 위한 법기가 아니라 서 도우에게 맞는 법기를 만들 예정인데."
"뭐, 일단 완성이 되면 추후에 한 번 보도록 하지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무인인 걸 알게 된 이상, 무인에게 맞는 법기가 완성될테니.'
"그럼 축제도 재밌었으니, 이제 일을 해 볼까요?"
쿠웅!
그녀는 다시 저물법기에서 휴대용 공방을 꺼내,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마을의 수호법기를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까앙, 깡, 까앙!
공방의 안쪽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고는 다시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밤이 깊어갔고, 그날을 기점으로.
나와 북향화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 * *
며칠 후.
쿵, 쿵, 쿵, 쿵!
북향화는 네 개의 장승을 꺼냈다.
"약 2년은 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호법기입니다. 이 법기들을 마을의 사방에 설치하시면 독물들이 침입하지 못할 거에요."
"가, 감사합니다, 선인님!"
북향화가 만든 장승들은 마을의 사방에 설치되자, 빛을 뿜으며 마을을 뒤덮는 결계를 만들었다.
얼마 후, 결계가 빛나더니 투명하게 변했고, 장승들 역시 투명하게 빛나며 보이지 않게 변했다.
"혹시 수도가문들에서 마을에 와서 법기들을 발견하면 괜히 귀찮으니, 은신기능도 넣어놨죠."
"좋은 생각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다음 날 독물들이 결계 안으로 제대로 침입하지 못하는 걸 본 후에야 우리는 다시 출발하기로 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을 길이 없습니다. 선인님들..."
"아니외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꼬마아이가 들고 있는 설화집을 잠시 떠올렸으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몇년 후면 더 클 테니, 그때 다시 와서 설득하고 받아오는 게 좋겠지.'
"...우리도 축제때 잘 놀았소."
"영광일 뿐입니다."
우리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한 후, 그들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법기를 타고 다시 날아올랐다.
성제국의 산간지역을 지나,
나와 북향화는 성제국의 중심 수도,
성제국 동쪽 연국과의 국경지역,
연국의 수도,
연국 곳곳의 문파들,
연국과 벽라국의 국경지역,
벽라국의 서부 등.
수많은 장소를 거쳐 유람하고, 독특한 문화를 그녀에게 소개해주었다.
그 중에서도 연국은 현재 황조가 바뀐 터라 상당히 혼란스러웠으나, 북향화는 그 특유의 분위기 역시도 나름 색다르게 받아들이며 좋아하는 듯 했다.
그렇게, 우리는 벽라국 동부.
천색성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약 4개월만의 귀환이었다.
* * *
"...정말 미안하군."
천색성에는 청문중진과 청문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전송진이 작동했을 때엔 전송진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기에, 애초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었다.
그 후로 너희가 죽었거니 하며 명복을 빌어주고, 다시 서쪽으로 날아와 천색성으로 돌아왔다만..."
청문령이 청문중진의 말을 받아 말했다.
"다행히도 자네의 아버지인 북 수사가 자네의 생존사실을 확인해주어 기다리고 있었다네."
북중호는 목에 건 반지 목걸이를 들어보며 말했다.
"향화의 노리개와 이 반지는 연결되어 있기에, 향화가 살아있으면 이렇게 반지가 빛이 나지."
우웅!
반지는 한쪽 면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어쨌든 자네도, 서 도우도 함께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네. 걱정했다만 정말 안심이 되는군."
"흠... 어쨌든 가주인 내 실책으로 그런 위험에 빠졌으니, 추후에 배상금도 따로 내어주마."
북향화는 웃으며 청문령과 청문중진의 사과를 받아주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덕분에 세상의 끝에도 가 보고, 곳곳을 유람하면서 서 도우와도 더 친해질 수 있었는걸요? "
"저도 상관 없습니다. 다행히 제가 아껴두던 비술을 사용해 살아나올 수 있었으니까요. 살았으니 지난 일은 따지지 않겠습니다."
나 역시 그의 사과를 받아주며 배상금은 거절했다.
하지만 청문중진은 오히려 더욱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지난 일은 따지지 않다니.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엄연히 잘못을 한 사실이 있으니, 정 배상을 받지 않겠다면, 추후에 두 사람이 원하는 건 들어줄 수 있는 한에서 한 번씩 들어주는 것으로 하지."
"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죠."
"저 역시 가주님께서 정 그리 말씀하시면 거부친 않겠습니다."
나와 북향화는 고개를 끄덕이며 청문중진에게서 소원권을 받아내었다.
청문중진은 우리에게 다시금 사과를 한 후, 청문세가의 일 때문에 다시 본가로 돌아갔다.
"자, 그럼 다시 바로 진법 연구를 시작하지...라고 말하고 싶지만..."
청문령은 북향화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
"우선은 여독을 풀 시간이 필요한듯 하니, 연구는 사흘 후에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네!"
그녀는 북중호와 얘기도 나누고, 짐을 풀고, 유람 중 만들었던 법기들, 그리고 성제국과 연국에서 산 법기들을 법기점에 쏟아두며 짐들을 풀었다.
나는 천색성의 성벽 위로 간단한 인지방해 법술을 걸고 올라가, 저 앞의 끝없는 사막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연국의 성은 일종의 행정체계로 그 일대 지역을 일컫는 말이었으나, 벽라국의 성은 이름 그대로 성 한채만을 일컫는 것이었기에, 천색성 역시 이 성 한채만을 의미했다.
나는 이 작은 성 안쪽에서 느껴지는 복작복작한 의념들과, 눈 앞의 사막에서 느껴지는 광활한 영기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지난 4개월간...'
솔직히, 재밌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왜 김영훈이 지난 생에 제대로 삶을 살아보라고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이, 편하군.'
북향화와 친해지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번 원행에서 그녀와 친해지며, 그녀의 옆에 있을 때는 상당히 마음이 풀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나 자신을 꽉 억죄던 그 무언의 압박에서 순간만이라도 벗어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조절했다.
'이 이상으로 나가면 안 된다.'
제자들과, 스승님과, 벗과, 무수한 김영훈들과 헤어지며.
어떤 고통과 아픔을 겪었던가.
남녀사이에 연(戀)이 통한다면, 헤어질 때의 고통은 어떠하겠는가.
벗과 벗 사이에선 연정(戀情)을 가질 일이 없다.
때문에 아무리 친애했던 이들일지라도, 그 고통을 가슴에 묻고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감정이 깊어져 연정을 가지게 되면, 나는 아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터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정신이 붕괴해 버릴지도 몰랐다.
'그건 안 되지.'
지난 4개월간 즐거웠던 기억들을, 그저 그 상태로만 남겨놓자.
이 기억들이 더 위험한 감정의 선을 남지 않게 하자.
그리 결정했을 때였다.
휘이이이!
천색성의 노을이 보이고, 내 뒤로 익숙한 영기가 내려앉았다.
북중호였다.
그는 성벽의 끝으로 올라와, 내 옆에 걸터앉았다.
"그래, 딸애와 유람은 즐거웠는가?"
"북 선자가 워낙 성정이 밝아 심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하, 즐거웠다니 다행이군."
그는 문득 의미심정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서로 호칭이 바뀌었던데... 딸애가 자네를 '수사'가 아니라 '도우'로 부르더군."
"아..."
"거기에 자네도 호칭이 조금 바뀌었고."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북 선자에게 벗 이상의 감정은 없습니다. 거기다가, 북 선자는 어머님이 정해주신 운명의 상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것 말인가?"
북중호는 피식 웃으며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만나러 올 사람이 남자일지 여자일지 어떻게 아는가? 그 자가 여인이면 의자매나 맺는 거지. 안 그런가?"
"하하, 그럼 절반의 확률로 혼약자이니, 어찌됐든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절반의 확률이라, 아예 그쪽에서 만나러 오지 않을 가능성은 생각지도 않나 보군."
"예...?"
북중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딸애야 어미의 유언이니 저렇게 기다린다지만, 상대쪽이야 모르지 않나. 이쪽만큼 그 약속을 간절히 안 지킬 수도 있고."
"그렇더라도..."
"솔직하게 말하겠네."
해는 지평선 아래로 들어갔고,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주변이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딸애에게 운명의 상대 같은 사람은 없네."
"예?"
"내 약령환은 두 개의 노리개 법기와 연결되어 있지. 딸애가 가진 것 말이네. 법기의 주인이 살아있으면 약령환의 한쪽 면이 빛을 내는데, 보게나."
그가 목에 걸고 있던 반지 목걸이를 내 앞에 내밀었다.
"딸애가 열한살 때. 그애의 어미가 죽고 이, 삼년 후. 지금으로부터 십일년 전. 반지 반대편의 빛이 꺼졌네.
그 애의 운명의 상대? 그런 사람은 이제 없어. 죽었네. 객사했든, 급사했든, 타살이든 자살이든..."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주인이 바뀌면 바뀐 표시라도 나야 할진데, 그런 표시조차 없이 몇 년째 아무 빛도 안 들어온다는 소리는, 상대가 아무도 없는 객지에서 객사했을 확률이 높단 걸세."
"......"
"딸애도 이미 알고 있어. 애당초 노리개도 나머지 한쌍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진즉 알았을 걸세.
저 애는 그냥... 유언을 핑계로, 제 어머니와 함께했던 이 성을 떠나지 않으며 추억을 되새기는 것 뿐이라네."
북중호는 나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나름 좋다 자부하지. 그래서 저번에 벽문성 그 녀석이 그런 내기를 제안했어도 허락했던 거고."
난 벽문성이라는 축기기 후기지수를 떠올려 보았다.
'불순한 의념이 가득했었는데...'
하지만 나는 떠오른 생각을 집어삼키며 조용히 있기로 했다.
"내가 볼때, 자네도 상당히 괜찮은 사람 같군. 아니, 솔직히 벽문성보다도 자네가 한참 더 나은 사람 같아 보여. 자네는 어떤가? 딸애에게 마음이 있지 않나?"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하군요. 저는 북 선자에게 벗 이외의 마음은 없습니다."
"흐음..."
잠시 나를 의미심정하게 본 북중호는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지. 한번 지켜보겠네."
휘이이이!
그는 다시 성벽을 내려가 버렸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천색성 곳곳의 불이 켜져, 성 전체가 환해져 있었다.
나는 하염없이 천색성을 바라보았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북향화가 납치되었다.
"이건..."
북중호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붉게 변한 약령환을 쥐고 나와 청문령을 찾아왔다.
"지금 향화가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소! 부디 도와주시오!"
"구조신호?"
"이건, 납치당했을 때만 쓰는 구조신호인데..."
북중호의 말에, 청문령의 안색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감히... 지금 청문세가와 함께 일하는 연기사를 납치했다는 건, 본가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뜻인가?"
청문령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 역시 눈쌀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북중호는 차차 사정을 설명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북향화가 방에 없었다.
방이 쓸데없이 어질러져 있었고, 어젯밤 처소의 금제가 교묘히 해체된 흔적이 있었으며, 지금 약령환으로 노리개를 통해 구조신호가 나오고 있다고 했다.
'누가 갑자기 납치한 거지?'
나는 우선 감각을 끌어올렸다.
"일단 북 소저의 방으로 데려다 주시지요."
요족의 지각을 끌어올린 상태로, 영기의 흐름을 추적해 보기로 했다.
* * *
휘이이이!
사막 한 복판.
그곳에서 한 비검 형태의 비행법기가 빠르게 날아가고 있었다.
비검 위에는 벽문성이 커다란 마대 자루를 어깨에 들쳐맨 채 모래바람을 떨치고 있었다.
"얌전히 계시지요, 향화 선자. 어차피 아무리 선자가 발버둥 치셔도, 선자는 지난 4개월간 준비한 제 계획에 따라 납치되셨습니다. 어디를 다녀오셨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덕분에 준비시간이 많아져서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지요."
그는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으며, 마대자루 속에서 꿈틀거리는 북향화에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제가 뿌리고 온 밀은향(謐隱香) 때문에, 특수한 추적용 요수가 아니면 저희를 추적할 수 없을 테지요. 그리고 그런 요수는 저희 벽씨세가에서 취급합니다.
제가 요수를 취급하는 장로님께 말해서 앞으로 칠주야간은 요수가 벽라국 어느 시장에도 나돌지 않을 것이니, 포기하시는 게 편할 겁니다."
꿈틀, 꿈틀..
그러나 여전히 마대자루 속에서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벽문성은 비릿한 표정을 지으며 남쪽을 바라보았다.
"우선 남쪽 바닷가에 준비해놓은 배를 통해 연국으로 갈 예정입니다. 연국으로 가서 몇 개월 후에 다시 벽씨세가의 영지로 갈 예정이지요.
그 사이에 선자도 제 말을 잘 듣는 게 좋다는 걸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선자가 지닌 자질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니, 선자에게도 나쁜 것만은 아닐 겁니다.
하하, 그만 꿈틀대시지요. 손발이 묶이고 법력이 제한당했는데, 아무리 선자라고 해도..."
투둑...
"으음...?"
촤아아악!
벽문성은 흠칫 놀라며 뒤를 바라보았다.
그가 메고 온 마대자루가 틑어지며, 그 안에 들어있던 북향화가 그대로 빠져나가 아래로 떨어진 것이었다.
"무, 무슨...!"
우우웅!
북향화는 법술을 써 사막 위에 안전하게 착지했고, 벽문성을 노려보았다.
"벽 공자께서 이런 저열한 짓을 하실 줄은 몰랐군요."
"아, 아니..! 손발을 다 묶어놓고 법력을 봉인하는 부적도 붙여두었는데..."
북향화는 한 손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손 위에는 작은 딱정벌레 모양의 작은 괴뢰가 만들어져 있었다.
딱정벌레 괴뢰는 부적 조각으로 보이는 종잇조각을 막 입 속으로 집어넣고 있는 중이었다.
"괴군 선배님의 괴뢰들을 참고해서 만들었는데, 쓸만하더군요."
"아, 아니...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그걸 만들었다고? 왜 자꾸 꿈틀거리나 했더니만, 하, 나무 부스러기 같은 것들로 그런 걸 만들어..?"
벽문성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다가도 웃음을 지었다.
"역시, 북 선자는 대단하시구려. 북 선자의 자질이 개화만 된다면 어떨지 더욱 궁금해지는군. 날 믿어주시오, 북 선자! 내게는 정말로 선자의 자질을 괴군과 같이 개화시킬 방안이 있소!"
"정중하게 제게 찾아오셔서 말씀을 주셨다면 들어드렸겠으나, 이런 무례는 너무 참기 힘들군요."
북향화는 싸늘한 눈초리로 벽문성을 쏘아보며, 귀에 차고 있던 귀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귀걸이가 빛을 내며, 한 개의 저물대를 뱉어냈다.
벽문성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하, 그게 저물법기였다니... 하지만 고작 법기 몇 점으론 연기기와 축기기 수도자 사이의 힘의 간극을 메울 수..."
그리고, 북향화가 저물대를 열자, 저물대 안쪽에서 수십, 수백 개의 비검 법기들이 튀어나와 사방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쿵, 쿵, 쿵쿵쿵쿵!
우우우웅!
북향화가 의식을 불어넣자, 수백개의 비검 법기들이 빛을 뿜으며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길...!"
벽문성의 안색이 썩어들어갔다.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나도 선자를 거칠게 데려갈 수밖에 없겠구려!"
"헛소리 마시고...앗!"
그리고, 벽문성이 정순지력을 끌어올릴 때였다.
"흠!"
벽문성과 북향화가 동시에 한쪽을 바라보았다.
쿠구구구구!
무색(無色)의 뭔가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래폭풍의 중심에는 한 인영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벽문성이 안색을 찌푸렸다.
"제길, 누가 벌써 쫓아온 건가..? 어떻게 온 거지? 추적용 요수가 없으면 찾을 수가 없을텐데..."
그는 저물법기에서 비검 법기를 꺼내 쥐며, 모래폭풍의 중심에 있는 자에게 외쳤다.
"그래, 어디 와 봐라! 내가 바로 벽씨세가의 검도천재라 불렸던..."
부웅, 콰아아앙!
무색(無色)의 검광(劍光)이 벽문성의 옆으로 스쳐지나가며, 사막에 거대한 계곡을 만들고 저 너머의 모래언덕 하나를 폭발시켰다.
쿠구구구구!
땅이 진동하며, 사방팔방으로 모래바람이 휘몰아쳤다.
벽문성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겨, 결단기 선배님...?"
"아...!"
반대로 북향화는 검광의 주인을 알아보고, 순간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잠시 한눈을 판 그 순간.
"부, 북 선자! 도망가야 합니다!"
"뭣.. 이거 놓으세요!"
벽문성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북향화에게 접근해, 그녀를 들쳐업고 비검 법기에 올라탔다.
"자, 잠깐!"
"북 선자!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닙니다. 어떤 결단기 선배님이 노하신 겁니다! 도망쳐야 살 길이 보일 겁니다!"
"아니..."
파아아앗!
벽문성은 그대로 쏜살같이 하늘을 날아도망쳤다.
그에게 들쳐메인 북향화가 수결을 맺자, 사막 바닥에 꽂혀있던 수많은 비검 법기들이 날아올라 그들을 쫓아왔으나, 정순지력으로 법기를 구동시키는 벽문성을 제대로 쫓아가지는 못했다.
그리고,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그들을 쫓아왔던 검광의 주인.
서은현은 어이가 없단 얼굴로 둘을 바라보았다.
"저 놈이 여러사람 피곤하게 하는군."
그는 바로 어젯밤 북중호의 얘기를 떠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북 수사, 사람 보는 눈이 자세한 거 같진 않군요. 저 놈이 마음에 들었었다니...'
서은현은 허공을 박차며, 무형검과 함께 벽문성을 쫓았다.
"히, 히익! 선배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사, 살려주십시오!"
벽문성은 모래폭풍 속에 잠긴 서은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고, 서은현은 묵묵히 그를 쫓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사막에서의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짜증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거기 서라...!"
쿠과과과광!
다시 한 번 서은현이 무형검을 내려쳤다.
다시금 사막에 계곡이 생겨났고, 벽문성은 더더욱 공포에 질려 전신의 정순지력을 비검 법기에 잔뜩 짜넣었다.
벽문성은 뒤쪽에서 쫓아오는 정체불명의 결단기 수도자가 벌인 참상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괴물, 괴물같은 결단기 수도자가 진노한 채 나를 따라오고 있다...! 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쿠구구구!
그리고, 벽문성은 그를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결단기 수사'가 힘을 모으는 것을 느꼈다.
'주, 죽는다...!'
투명한 뭔가가, 허공을 가르며 그에게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