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의 연 (2)
쉬이이이….
녹색의 섬광이 스러지고 난 자리.
그곳은 공간째로 뜯겨 나가, 시커먼 허공간의 공허를 드러내고 있었다.
스르륵….
녹색의 손이, 박도를 자신의 등 뒤로 집어넣었다.
구구구구구!
거대한 성의 조각이, 허공간 아래로 떨어졌다.
두건을 쓴 자.
함천존자 장익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성의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놀랍군… 이걸 피해?]
쿠구구구구….
떨어지는 기묘성채의 조각은, 3분의 1 정도였다.
세 개의 원통형 성이 합쳐진 기묘성채에서, 한 개의 원통형 성만을 꼬리 자르듯이 잘라 버리고.
그의 눈앞에서 도망쳤다.
[재밌는 녀석들이군. 미치지만 않았으면 같이 차나 한잔하며 깨달음을 나눠 봤을지도 모르겠어….]
우우웅!
장익의 옆으로 조그마한 환영이 떠올랐다.
비췻빛 작은 사슴뿔이 이마에 돋아난, 청발의 미청년.
서휼의 환영이었다.
[심족의 존자께, 지족(地族) 총연맹 총군사 서휼이 인사 올립니다.]
[지족 총연맹? 그런 게 생겼나?]
[예, 귀모와 괴군을 비롯해, 학살마 낙뢰자나 기타 여러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지족 전체가 이번에 뭉치기로 했습니다.]
[흐음….]
[그나저나, 어째서 존자께서 괴군을 놓아 주셨는지 여쭈어봐도 괜찮을지요?]
서휼의 환영의 질문에, 장익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백운성사께서 나를 재촉하시긴 하셨다만,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디까지나 귀모를 먼저 처리해 달라고 하셨다. 괴군은 우선 순위가 떨어진다. 안 그래도 분신체라, 힘을 좀 쓰니까 벌써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잖느냐.]
우우우웅….
장익은 반쯤 투명해진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귀모도 위협적이긴 하지만, 이성이 없는 짐승과 다를 바 없습니다. 도리어 광증과 이성이 공존하는 괴군이야말로 앞으로 더 세가 불어날 수 있으니, 그자부터 처리하는 게 낫지 않으신지….]
그 말에 장익은 괴군이 달아난 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번의 공격을 날렸다.]
[…?]
[하나는 저놈의 성을 쪼갰고, 나머지 하나는 놈의 제자 중 하나의 심상에 불어넣었다.]
[…제가 심족의 기오막측한 공법은 이해가 아니 되어서 그런데, 혹여나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실지요? 그리고 괴군의 제자는 한 명인데, 제자 중 한 명이라 함은….]
서휼의 물음에, 장익은 서휼을 흘긋 바라보더니 손을 흩었다.
파스슷!
그 손짓에 서휼의 환영이 어그러진다.
[귀모가 이쪽으로 오는군. 이성이 휘발되긴 했어도 별의 힘이 느껴지는 걸로 봐서, 괴군 놈의 괴뢰보다는 훨씬 더 쇄성기에 가깝구나. 저 정도를 베려면 집중해야 하니, 이제 연락은 이쯤 하지.]
쉬이이….
서휼의 환영이 일그러졌다.
장익은 혀를 차며 말했다.
[더러운 걸 봤군. 지족에도 망조(亡兆)가 들었어. 저런 놈이 총군사 자리를 꿰차다니… 쯧쯧.]
쿠구구구구!
지평선 너머로, 검은 구름과 함께 그 중앙에서 울부짖는 존재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스릉, 스릉….
장익은 등 뒤에서 두 자루의 박도를 꺼내 들고 자세를 잡았다.
[흠, 괴군이나 귀모…. 둘 다 아무리 봐도 저 서휼이란 놈보다 덜 위험해 보이는데…. 백운성사께서 귀모와 괴군만 우선 격살하라 하신 게 맞는 건가? 뭐, 지족이 망하면 심족들도 숨통이 트일 테니… 일단 내버려 두지.]
그는 박도를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작은 그의 몸뚱이를 시작으로, 녹색의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 * *
쿠구구구구….
기묘성채는 삼분지 일이 뜯겨 나갔음에도 속도가 줄지 않고 빠르게 나아갔다.
허공간을 넘고, 온갖 기이한 강산을 넘어, 마침내 한 자리에 도착했다.
쿠구구구!
천 년 전 기묘성채가 머물렀던 계곡과 비슷한 계곡.
괴군은 그곳에 기묘성채를 내리고, 황급히 [그녀]를 수리하러 기묘성채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눈에 이채를 띄며 말했다.
‘지금이다.’
절호의 기회였다.
기묘성채도 제 기능이 잘 돌아가지 않고, 괴군의 [그녀]도 지금 반쪽이 난 현시점.
지금이야말로 괴군에게서 탈출할 적기였다.
내가 김연에게 내 뜻을 심어로 전달했을 때였다.
“지금 가자고요?”
김연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흠칫 놀랐다.
그녀의 눈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왜?”
절걱, 절걱….
나는 기묘성채가 지금 개판이 난 상황을 이용해, 괴뢰들을 이용해 오류를 잔뜩 만들어 낸 후.
다시 내 얼굴 쪽으로 오류를 몰아넣고 말했다.
“연, 아… 무슨, 의미, 냐?”
“…은현 오빠. 우리가 지금 저 미치광이한테서 그냥 탈출하면, 저 미치광이는 다시 [그녀]를 수리하고, 방금의 패배를 양분으로 삼아 더 성장할 거예요.”
“연, 아….”
“탈출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지금 죽여야 해요.”
그녀의 눈에서 은은한 노기가 느껴졌다.
아니, 은은한 노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용암과도 같은 증오였다.
“연, 아… 너는, 복수를, 하고 싶은, 거니?”
“…네.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어요. 아니, 맞아요! 맹세했잖아요? 괴군의 앞에서 [그녀]를 산산조각 내어 버리겠다고! 우리는 저 미치광이한테 잡혀서 이 꼴이 되어 버렸는데, 저 미치광이는 자기 인형한테 박아 대면서 제 세계에 빠져 언제까지고 행복해할 거잖아요?”
뿌드득….
“은현 오빠.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제 의식으로 장악하고, [그녀]를 괴군의 앞에서 빼앗을 수 있어요…!”
김연이 잔뜩 망가진 표정으로 웃으며 외쳤다.
“지금밖에 오지 않는 기회에요! 오늘 여기서 저 미치광이를 해치우고, 우리를 이렇게 만든 죗값을 받아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콰악!
그녀가, 괴뢰로 개조된 팔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의 가슴에 맺힌 한은 도대체, 도대체 어디에 풀어야 한단 말이에요? 네?”
나는 기묘성채를 바라보았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 저 미치광이에게 쌓인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은현 오빠, 이 기묘성채에서 탈출하게 되면… 그때에 우리 제대로 마음을 터놓기로 했잖아요?”
그랬다.
나는 그녀와 제대로 된 소통을 하게 된 후.
괴군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후에야, 그녀에게서 받은 마음을 돌려 주겠다고 했었다.
“[그녀]를 산산이 박살 내어 버리고, 괴군을 재로 만들어 버린 후에. 이곳에서 저희 제대로 된 혼례식을 올려요. 오늘, 오늘이야말로 기회에요!”
“….”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기묘성신전을 대성한 이후.
그날부터, 그녀의 광증은 상당히 호전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광증 대신 무언가 기묘한 집착이 생기는 것을 알아챘다.
기묘성심전을 대성한 날부터, 김연은 나, 그리고 이 기묘성채에 대한 기묘한 집착이 생겼다.
나에 대한 집착이야 상관은 없었다.
이해도 했다.
하지만 기묘성채에 대한 집착은 살짝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었다.
기묘성심전의 요결의 이해도가 김연을 뛰어넘는 나조차도 살짝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어쩌면 도리어 월도답천에 이르러, 심상에 대한 통제가 완벽한 나였기에 김연보다 기묘성심전의 집착을 잘 떨쳐내는 걸지도 몰랐지만….
‘왠지, 수상하군.’
“연, 아… 괴군은, 미친놈, 이지만… 동시에, 이성이 공존하는, 자이다. 그가 우리의 배신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 리 없어.”
“…괜찮아요, 오빠.”
우우우웅!
스르르륵!
그녀의 의식이, 실처럼 풀어헤쳐졌다.
사락, 사라라락!
순식간에 그녀를 중심으로, 기묘성채에 의해 통제받던 괴뢰들이 그녀에게 통제권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실처럼 늘어진 의식이, 괴뢰들의 영력 회로로 들어가 삽시간에 괴뢰들을 장악한다.
“괴군, 그는 내 진짜 능력이 뭔지 이해하지 못해요. 단순히 의식이 큰 게 아니에요. 은현 오빠, 오빠의 마음을 확인한 날부터, 500년 전의 그 날부터, 저는 제 명(命)을 깨달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녀가 싱긋 웃었다.
어쩐지 그녀의 웃음에는 기이한 광기가 깃들어 있다고, 나는 그렇게 느꼈다.
“제 능력은 제 운명과 관련되어 있어요. 아마 오빠도,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각자의 명을 깨달으면 능력의 실체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거예요.”
쿠구구구!
그녀의 의식에, 점차 무시할 수 없는 힘이 깃들기 시작했다.
“…천상금뢰지체? 귀도음화선근? 일문성체? 그런 멍청한 체질들이 아니야… 우리가 이 세상에 떨어지며 얻은 ‘진짜’ 권능은… 자질을 확인한 이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기에 헛소리나 해댄 것뿐….”
우우우웅!
파아아앗!
그녀의 의식이 빛을 뿜었다.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새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의식은 기묘성채 전체를 뒤덮었다.
괴군의 성이, 새하얀 실에 뒤덮여 먹히고 있었다.
[괴군은 분명 대단한 자에요. 그가 창조한 기묘성심전이, 대성할 시에 제 권능과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가 되는 것을 보면… 하지만 그개 끝이야. 은현 오빠, 저를 도와주세요.]
파츠츠츠츠!
김연의 전신이, 그녀의 의식을 따라 새하얗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마치 새하얀 실이 뭉쳐진 유령 같아 보였다.
[저를 도와, 저 미치광이를 처단하고, 우리 해로하며 살아요.]
“…알, 겠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느릿하게 말했다.
“일이 끝나고, 내 마음을, 제대로 말해 주마.”
[고마워요.]
그녀는 싱긋 웃더니, 기묘성채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변의 괴뢰들을 장악했다.
우우우웅!
서 장군의 육신에 깔린 영력 회로가, 전부 내 의식의 통제 하에 놓인다.
서 장군의 영력 회로뿐이 아니었다.
괴군의 괴뢰들.
그 괴뢰들이 연동되는 영력의 흐름 역시, 일종의 보이지 않는 영력 회로나 마찬가지였다.
의념을 닮은 그 영력의 흐름들 역시, 전부 내 의지 하에 놓이기 시작했다.
기기기기긱!
기묘성채 전체의 통제권 중 일부가 내 의식 하에 놓인다.
기묘성채가 거부 반응을 보이며, 수십억에 달하는 ‘웅성임’을 뇌리로 쏟아 냈지만, 나는 기묘성채를 바라보며 웃었다.
“천 년을, 너를 파악해 왔다.”
한없이 생명체에 가까운, 광기의 요람.
수많은 인공 혼에서 뿜어지는 유사 의념의 파장을 엮어, 중심부로 모아 진짜 의념을 만들고, 한없이 진짜에 가까운 영혼을 제작하는 미치광이의 공방.
오로지 광기로 운용되는 녀석.
하지만, 나 역시 천 년을 버티며 회로를 몰래 장악하고, 녀석의 광기를 파악해 왔다.
“네놈에게, 지지, 않아…!”
우우우우웅!
나는 기묘성채를 장악해 갔고, 김연은 괴뢰들을 장악해 갔다.
천 년.
괴군에게 잡히고 일천 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가 약해진 틈을 타 드디어 반역을 시작하였다.
* * *
철컥, 철컥, 철컥….
괴군의 공방 안쪽.
괴군은 [그녀]의 조각난 몸을 수복하여 대강 형체를 잡아 주었다.
“오오, 다행이구려. 그래도 전투 기능만 망가졌고, 중요 기능은 대부분 멀쩡하오.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오….”
괴군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기묘성채가 진동하며, 괴군에게 그의 제자의 반역을 알렸다.
“흠?”
따악!
괴군이 손가락을 튕기자, 공방 안쪽에 있던 기관 장치들이 움직이며, 괴군의 앞으로 한 개의 거울을 가지고 왔다.
거울로 영기가 몰리며 거울이 일그러지더니, 점차 괴뢰들을 장악해 가며 상층으로 올라오는 김연의 모습을 비췄다.
김연은 새하얀 실 같은 의식을 사방으로 뻗치며, 새하얀 빛에 뒤덮인 기이한 모습이었다.
괴군은 그 모습을 잠시 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음, 도망치지 않고 여기로 온다는 건, 역시 기묘성채를 장악하러 온다는 건가?”
마침 광증이 도지는 게 아닌, 이성이 조금 돌아온 모양새.
그는 김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기묘성심전의 유혹과, 나에 대한 증오를 못 이겼나 보군.”
잠시 거울을 들여다보면 괴군이 눈을 감았다.
“…기묘성채도 반파되고, 당신도 제대로 된 꼴이 아닌 지금에서야 기묘성채를 장악하는가…. 진즉 미쳤다고 생각했거늘, 이성이 남아 있었단 말인가?”
괴군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안타깝군, 더 좋은 상황에서 기묘성채의 탈환을 시도했으면 좋았을 것을…. 뭐, 어쩔 수 없는가.”
어쩐지,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게 최선이라면 받아들여야지. 길었구나….”
괴군이 [그녀]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드디어, 오늘… 기묘성채가, 완성된다.”
잠시 [그녀]와 포옹을 하던 괴군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기묘성채의 최중심부이자, 최상층.
공방의 위층이자, 지금껏 김연에게조차 개방하지 않은 마지막 층.
철컥, 철컥, 철컥….
그의 손짓에, 마지막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천장에서부터 나선형으로 내려왔다.
괴군은 [그녀]와 손을 잡고 천천히 마지막 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마지막 층으로 올라가면서도, 계단을 없애거나 하지 않았다.
* * *
콰아앙!
괴뢰들을 장악하고, 서은현을 통해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넘겨받은 그녀가, 기묘성채 전체를 점차 그녀의 의식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네. 이 기분….’
기묘성채의 광증과 웅성임은 서은현이 대신 떠안아 준다.
그리고 그녀가 기묘성채의 괴뢰들을 움직여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다.
먼 옛날, 칠성제의를 뚫을 때 이후로 이런 상황이 얼마나 있었는가.
비록 이번에는 새로운 경지를 뚫는 것은 아니었으나, 새로운 삶을 향해 도약할 기회를 얻을 시간이었다.
콰아앙!
김연의 명을 받은 괴뢰들이, 괴군의 공방을 두들겼다.
‘드디어….’
김연은 의식을 조종하며 공방 너머를 노려보았다.
기묘성채의 최중심부는 의식으로도 탐지할 수가 없었다.
특수한 금제가 걸렸다기보다는, 너무 진짜 같은 의념들이 미친 듯이 표면을 휘몰아치고 있었기에, 의식을 함부로 뻗는 것만으로도 광증에 휩싸이니 말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공방도 이제, 끝이야.’
콰아앙!
마침내 공방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이제, 이곳은 나와 오빠의 집이 될 거야….’
그녀의 가슴 속에서 깊은 분노와 고통이 치솟아 올랐다.
비록 서은현은 아직 괴뢰 속에 가까스로 남아 있다지만.
그가 처음 괴뢰가 되었을 때.
어떤 고통이 있었는가.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수백 년을 반쯤 미쳐 지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괴군은 그녀의 몸 역시, 기묘성채를 다루는 데에 더욱더 도움이 된답시고 개조까지 하였다.
‘용서할 수 없어.’
김연의 눈에서 증오가 활활 타올랐다.
‘나와 은현 오빠의 사랑을 망친 그 미치광이는, 그 미치광이가 가장 아끼던 것을 박살 내는 것으로 벌할 거야.’
저벅, 저벅….
괴군의 공방 안으로 들어간 김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건… 하.”
천장을 향해 나선형으로 난 계단.
기묘성채의 마지막 층이자, 숨겨진 공간.
“추하게 기묘성채의 최심부에 숨으셔서 저를 상대하시겠단 건가요? 스승님… [그녀]의 엄마 아빠 할애비를 다 데리고 와도 이 판도는 이제 바꿀 수 없습니다.”
저벅, 저벅….
그녀는 이를 악물고 괴군이 남겨 놓은 나선형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부터, 기묘성채는 제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사랑을 나눌 거예요.”
저벅….
그리고, 계단의 끝자락에 도달해.
공방의 위층에 올라선 김연은 흠칫 놀랐다.
“…이건…?”
* * *
우우웅!
기묘성채 바깥에서, 김연에게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넘기고, 기묘성채의 광증을 받아내던 나는 기묘성채의 중심을 바라보았다.
‘연결이… 희미해졌다.’
김연의 의식 실은 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는 의식을 연결한 채, 실시간으로 소통하며 기묘성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와 연결된 의식의 실이, 희미해졌다.
마치 뭔가, 굉장히 시끄러운 장소에 있을 때 조금 멀리 떨어진 친구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이.
굉장히 강렬한 의념의 격류들이 나와 그녀의 연결을 방해하고 있었다.
‘…도와줘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당장 기묘성채의 광기를 상대하기만도 버거웠다.
지금 당장이라도 서 장군의 머리가 박살이 날 것만 같았다.
아마 여기에서 더 무리한다면 서 장군의 머리가 폭발해 버리고, 나는 그대로 영혼이 흩어져서 죽어 버릴 터였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사해라!’
나는 이를 악물며 김연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 * *
“…이게, 뭐야?”
김연은 황당한 눈으로 괴군이 숨겨 놓은 층을 쳐다보았다.
“왔느냐, 제자야?”
괴군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눈으로 김연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 깃들어 있던 광증은, 씻은 듯이 없어져 있었다.
“…꽤 안색이 좋아 보이시는군요, 스승님. 귀모와 그 녹색 난쟁이에게 제대로 교육을 당하시고 나니 정신이 치료되셨나 보죠?”
“하하하, 그럴 리가 있느냐. 내 정신을 치료한 건 너란다, 제자야.”
괴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예?”
“길고도 길었다. 네가 광기에 미쳐서, 그 거대한 의식으로 내 기묘성채를 빼앗아 탈환할 날을 기약하고 있었다.”
“무슨….”
“한데, 예상 외로 정신이 멀쩡해 보이는구나. 내가 가장 약해지고, 기묘성채가 다 망가진 지금에야 나를 습격한 것을 보면….”
김연이 괴군을 노려보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게, 다 계획된 일이었다고?”
“그렇단다. 기묘성채를 진정으로 완성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지.”
“뭐…? 그게, 무슨 뜻이야…?”
그녀는 괴군에 대한 최소한의 존칭마저 집어던졌다.
“너를 발견하기 전까지만 해도, 광증에 미쳐 있을 때는 그러려니 했지만, 이성이 돌아올 때면 항상 막막했지. 기묘성채를 제대로 완성하려면, 내가 최소한 쇄성기 급에는 도달해야 하고, 괴뢰들의 수도 천억을 넘겨야 하며, 어마어마한 자원을 들여서야 기묘성채를 만들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너를 찾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너만 있으면 그런 막대한 자원도, 괴뢰도, 경지도 필요 없을 테니까.”
“….”
“여기까지 성장해 주어서 고맙구나, 제자야. 네가 기묘성채를 탈환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네 막대한 의식에, 기묘성채가 제대로 가동되며… 드디어 기묘성채가 완성될 거란다.”
괴군의 입에서,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미안하구나. 이 미치광이를 원망해라.”
“…당신.”
김연이 냉혹하게 웃으며 괴군을 노려보았다.
“당신 말에 의하면, 내가 괴뢰들로 그냥 기묘성채를 때려 부수기만 해도 당신이 고통받을 수 있단 거 아닌가?”
“하하, 괴뢰들은 기묘성채를 공격하지 못하게 설정되었단다. 만약 그 설정마저 바꾸고 기묘성채를 공격하게 하려면, 너는 기묘성채를 장악해야 하고, 기묘성채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기묘성채를 우선 완벽하게 발동시켜야 한다는 거지.”
김연은 입술을 짓씹었다.
만약 그가 여기서 그냥 기묘성채를 돌려주고 나가 버린다면?
그럼 괴군은 다시 미치광이가 되어서, 기묘성채를 다시 되찾고 그녀를 개조해 버릴 테였다.
잠시 침묵하던 김연은 괴군을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착각하는 게 있군, 당신은 내 재능이 뭔지 몰라.”
“그래, 알고 있단다. 그 어떤 문헌을 뒤져 봐도 너 같은 의식을 지닌 자는 없으니까. 하지만 잊은 게 아니냐? 기묘성심전을 대성한 내 의식과 네 의식이 닮은 점이 있다는 것을…. 그 말은, 처음 보는 네 자질이라 한들 내가 도달한 경지에서 어느 정도는 추론하는 게 가능하다는 거란다.”
“…그래서, 추론해 보셨나?”
“…글쎄, 한번 직접 확인해 보거라.”
괴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김연의 의식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기묘성채의 통제권을 더욱더 무섭게 장악하기 시작했다.
“기묘성채로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당신이 뭔가를 발동시키기도 전에 더 빨리 성 전체를 장악하면 끝날 일.”
기이이잉, 철컥철컥철컥….
기묘성채 최상층.
그곳으로, 수많은 인공 혼들의 의념의 파장들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김연의 명을 받은 괴뢰들이 미친 듯이 기묘성채의 최상층으로 날아든다.
두 괴뢰사의 기묘한 대결이 시작되었다.
김연이 기묘성채를 장악하고, 괴군이 기묘성채 심부에 있는 괴뢰들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우우웅!
김연 역시 괴군의 괴뢰들을 빼앗으려 했으나, 괴뢰들은 그녀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 괴뢰들은 조작 방식이 조금 특이해서 말이지. 아마 네가 기묘성채를 10할 완전히 손에 넣고서야, 천천히 통제권을 뺏을 수 있을 게다.”
그리고, 최상층의 괴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김연은 미소를 잃지 않고 법력을 끌어올렸다.
“잊으신 건 아니겠죠? 사축기에 이르렀지만, 이미 제 실력은 합체기에 비견된다는 사실을…. [그녀]도 아닌 이딴 괴뢰들로는 저를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괴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안다. 애초에 전투용 괴뢰가 아니란다.”
동시에, 괴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김연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괴군이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
그리고.
점차 김연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뭐야, 당신… 이건…?”
그리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혼을… 제작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
괴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
김연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졌다.
“아니야. 웃기지 마…. 당신은 그래서는 안 돼….”
쿠구구구구!
김연의 의식이 점차 기묘성채를 장악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묘성채의 10할을 장악한 순간.
김연은 괴군의 목적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이 기묘성채를 괴군 대신 발동시켜 준 것만으로, 아니.
괴군조차 못 끌어내는 기묘성채의 ‘모든 힘’을 이끌어 낸 그 결과로 인해.
괴군이 진정으로 만들어 내고 싶었던 풍경이, 그녀의 앞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웃기지 마! 웃기지 말라고!]
김연이 미친 듯이 발광하며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가 기묘성채를 통해, 눈앞의 풍경을 중단시키려 해도 눈앞의 풍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괴군이 수천 년 동안 쌓아 올린 위업.
미치광이가 만들어 낸 대작.
괴군이 부채를 들고서 입을 열었다.
“기묘성채 최후단계. 연의 연(宴). 발동.”
그 날.
괴군 조연이 진정으로 만들고자 했던 작품이.
김연의 손에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