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 (6)
기억이라는 건 무엇일까.
여러 정의가 있겠지만, 내가 느낀 바로 기억이란 일종의 ‘뿌리’였다.
사람을 지탱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이라는 것은 특별한 것이다.
허무하다,
‘첫 번째 회귀였나, 두 번째 회귀였나….’
그 이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처음 죽었을 때.
누가 나를 돌봐줬던 것 같다.
강 씨네 아들이었나, 주 씨네 손녀였나.
평범하게 늙어 죽었던 때의 기억이 점차 시간의 흐름에 의해 침잠되고 풍화된다.
당연하게도 그 이전의 기억들 역시 그러했고.
아마, 괴군에게 잡혔던 일천 년의 세월이 가장 문제였던 것 같았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었다만.
괴뢰에 갇혀, 오직 괴뢰를 장악하기 위해 천 년을 버텼던 그때.
내 영혼이 너무나도 많이 풍화됐던 것이리라.
내 최초의 삶에 대해 그나마 기억나는 것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김영훈,
그리고 김연 정도였다.
둘 다 각각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했던 이들이었으니 말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도저히 생각나지 않는다.’
잊어버리려면 전부 잊어버릴 것이지.
왜 애매하게 잊어버린 것인가.
‘왜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애매한 기억은 남아서,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거냐.’
나는 오현석이 주는 광령성수 한 모금을 마시며 방금 소모된 기혈과 정혈을 보충했다.
생명력이 가득한 광령지의 물답게 순식간에 터졌던 머리가 완전히 나아 버렸다.
“자, 이제 돌아가자.”
“…예.”
나는 오현석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파아앗!
하늘이 일렁이며, 푸른 둔광이 날아왔다.
청문규였다.
“이 미친 놈들! 여기서 뭘 한 거냐!?”
“아… 대련했습니다만?”
오현석의 말에 청문규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는 듯했다.
“괴군이 알아차리면 어쩌려고 이 난리를 피워!”
나는 청문규를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괴군의 시선은 여기까진 절대 미치지 못합니다.”
“뭐? 네가 뭘 믿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그야 당연히, 괴군의 성에서 천 년이나 일해 왔던 입장으로 괴군과 기묘성채의 탐지 범위를 속속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 미친놈 취급받거나, 간첩으로 고문받을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지만.
“괴군의 괴뢰들에 대해서 아십니까?”
나는 땅에 괴군의 괴뢰들의 설계들을 그리고, 그 내부 회로와 기관 장치를 그리며 청문규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일전 하계에 있을 당시, 괴군의 괴뢰들이 남긴 잔해를 뜯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와서 본 한령족의 잔해에서도 괴군의 괴뢰 잔해들을 볼 수 있었고요. 그걸 바탕으로 분석해 봤습니다만….”
괴뢰에 대한 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자, 청문규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그래, 일단 알았다. 뭐 대충 그렇다 치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심하거라. 이곳은 인족의 구역이 아니라, 이종족의 구역이다. 괜히 이종족들에게 잘못 트집을 잡힐 수도 있어!”
“예, 주의하겠습니다.”
나와 오현석은 청문 사형에게 고개를 숙였다.
우리는 그의 잔소리를 들으며, 원정대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이 되었다.
* * *
파아아앗!
나는 회로를 그리던 곳에 가서 눈을 감았다.
지반 밑.
그 아래로 괴군의 기묘성채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회로를 그렸다.
회로를 그리고, 영력을 부여하는 것 자체는 6개월 정도 걸렸었다.
다만 회로를 기묘성채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기묘성채에 접속시켜, 점차 기묘성채의 제어권을 느릿하게 빼앗는 데에만 4년이 넘게 걸렸다.
파츠츠츠츳!
‘그래도, 이제 끝이다.’
예전에는 장악하는 데에 일천 년이 걸린 회로들.
기묘성채의 회로 하면 이골이 나 있는 몸이었다.
내 기억에, 영혼에 회로가 새겨져 있는 느낌이었다.
타앗!
오현석이 밤늦게까지 회로에 손을 대고서 집중하는 내게 다가왔다.
“…일단, 기억이 어디까지 나는지는 대충 말해 줄 수 있느냐?”
“….”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전까지야 들키기가 두려워 입을 닫고 있었으나, 막상 내가 기억이 없다는 것을 들키자 마음이 편하였다.
“김영훈 부장님, 그리고 김연 주임에 대한 기억은 어째 조금 남아 있습니다.”
“그런가….”
“그것 외엔 딱히 뭐가 없더군요.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아니다,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냐.”
한숨을 쉰 그가 내 옆에 걸터앉았다.
“…일단, 네가 그런 줄 몰랐으니… 앞으로 나 역시 기억에 도움이 되는 영약이나, 공법서들을 조금 알아보마.”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현석이 나를 쳐다보았다.
“원영기에 오를 때 있었던 일이었다만, 혹시라도 이게 네게 도움이 될 수 있으니 말해 주마.”
“어떤 도움입니까?”
“원영기에 올라, 체내에 원영(元靈)을 생성하던 그 순간. 나는 마치 주마등 같은 것을 보았다.”
“주마등?”
“그래, 인생의 모든 순간이 빠르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는데, 이게 만약 원영기에 오를 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사항이라면 너도 이 주마등 같은 것을 보며 뭔가 기억을 찾을 확률도 있지 않겠느냐?”
“…그렇군요.”
나는 눈을 빛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원영기에 오르는 것으로 이 기억의 소실을 막을 수도 있는지도 몰랐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은 원영기를 목표로 더 수행해 보지요.”
아무리 늦어도 원영기에 진입하는 데에 천 년이 다시 걸릴 리는 없었다.
‘결단기에 이른 이후, 수명이 600년은 조금 넘을 정도로 늘어났으니, 그 안에 결단기 대원만에서 원영기에 못 이를 리는 없겠지.’
그리고 오현석의 말이 사실이라면, 원영기에 이르면 조금은 희망이 생기는 셈이었다.
‘물론, 일단 지금은 김연과 접촉부터 해 보자.’
우우우웅!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기묘성채의 제어권 일부를 기묘성채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장악한 후.
기묘성채의 괴뢰 중 하나의 눈을 통해 기묘성채 곳곳을 둘러보았다.
‘김연이 지내는 곳이라면 아마….’
부우웅!
나는 벌 괴뢰의 몸을 움직여 기묘성채의 내부로 들어가, 기묘성채 안쪽의 장원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부우우웅!
저 멀리, 연분홍빛 경장을 입고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는 김연이 보였다.
나는 우선 기묘성채 전체의 흐름을 읽어냈다.
기묘성채 전체에 흐르는 거대한 유사 의념과 광기의 흐름.
그리고 그 흐름은 괴군의 작업실 방향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괴군은 현재 공방에 있다, 그렇다면….’
나는 벌 괴뢰로 그녀의 앞에 내려앉았다.
김연이 멍하니 벌 괴뢰를 바라보았다.
나는 초췌해진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의식을 움직였다.
‘기묘성심전, 발동.’
우우웅!
벌 괴뢰를 장악한 내 의식이 움직였다.
기묘성심전은 진즉 대성한 지가 오래인 공법.
그리고, 기묘성심전의 최종 형태에 따라 내 의식이 올올이 풀려나기 시작했다.
파스스스!
내 의식이 마치, 김연의 의식처럼 실처럼 올올이 풀려나갔다.
그것은 마치 범인들의 의식과도 비슷해 보였지만, 범인들의 의념이 각각이 색이 있다면, 기묘성심전의 의념의 실은 모두가 의식 영역과 같이 투명했다.
“어…?”
벌 괴뢰에서 의식의 심이 뿜어져 나오자 움찔하는 그녀였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 벌 괴뢰를 통해 나의 의식 실을 그녀의 의식에 접속시켰다.
“이, 이게 무슨….”
―연아.
그리고, 나는 내 의식 실을 통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
통했다.
그러니, 이제 만나러 가겠다.
파아아앗!
나는 내 옆의 허공에 강환을 띄워 올렸다.
내 의식이 떨어져 나간 분신이 내 옆에 섰다.
나는 강환을 괴군의 회로에 불어넣었다.
츠츠츠츠츳!
회로를 통해 강환이 빠르게 기묘성채 쪽으로 이동하고, 기묘성채에 도착한 강환이 내가 만든 벌 괴뢰에 안착하였다.
그리고, 김연의 눈앞에 ‘내’가 나타났다.
우우웅!
겉보기에는 동그란 구슬 같은 기운 덩어리.
하지만, 의식을 다룰 줄 아는 그녀의 눈에는, 강환의 진짜 모습이 보일 터였다.
―…잘 지냈니?
나는 강환을 통해 심어를 전달하며 물었다.
그리고, 그녀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절걱, 절걱….
그녀의 왼손은 어느새 괴뢰 팔로 개조당한 상태였다.
‘내가 부탁까지 했는데도, 기어이 이 정도는 개조를 해 놨군.’
우우웅!
그녀의 경지는 현재 나와 같은 결단 대원만의 수준이었다.
이전 생에는 이즈음에 벌써 원영기는 뛰어넘었던 것 같았으나, 아무래도 이번 생에는 내가 옆에서 기묘성채의 광증을 막아 주고 기묘성심전의 해석을 돕지 않아서 원영기에는 도달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이, 이게 무슨….”
―조용. 괴군이 들을 수 있다. 의식을 진동시켜서, 눈앞에 있는 내 환영에 불어넣어라. 얇은 실을 눈앞에 두고, 그 실 안에다가 네 소리를 불어넣는다고 상상해라.
나는 천천히 기묘성심전의 구결을 그녀에게 알려 주며, 그녀가 의식을 통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도왔다.
[…은현, 오빠…?]
―그래, 나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하다.
[아….]
“으….”
그녀가, 결국 육성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신음을 흘렸다.
털썩!
김연은 자리에 주저앉아 괴뢰 팔로 얼굴을 가리고, 계속해서 울었다.
―…나는 지금 근처에 있다. 근처에서 네게 의식 분신을 보낸 것이니, 일단 기묘성채에서 현재 나올 수는 있는 상황이느냐?
[…네, 나갈 수는 있어요. 다만 기묘성채 근방 100리를 넘어서면 천인기 급 괴뢰들이 감시역으로 따라붙어요.]
―그럼 됐다. 천인기 급 괴뢰들을 데리고 우선 나오너라.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오랜만에 다시 보자꾸나. 내가 말하는 곳으로 나와라. 우선….
* * *
치지직….
괴군의 회로를 통한 연결이 끊겼다.
이 이상 기묘성채에 접속하면 기묘성채가 알아차릴 수도 있을 터였다.
“…현석 형님.”
“뭐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김연 주임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오, 정말이냐?”
“예, 저희가 싸웠던 황무지 쪽으로 올 예정입니다. 현석 형님도 만나고 싶으십니까?”
“당연하지, 옛 동료를 보는 건데!”
나는 오현석과 함께, 다시금 우리가 대련했던 황무지로 나아갔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커다란 달이 떠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기이하단 말이지.’
이 광한계는 수계보다도 훨씬 거대할 터였다.
정말, 대충 생각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거대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 ‘달’이라는 게 떠 있는 걸까.
‘어쩌면 저것도, 달이 아닐지도 모르겠군.’
나는 달을 노려보며 잠시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파아아아앗!
저 멀리서 괴뢰들의 느낌이 이쪽으로 느껴졌다.
‘괴뢰들이 오자마자, 괴뢰들의 괴뢰 회로를 제압한다.’
기묘성채에서 떨어진 상태의 괴뢰들이라면, 얼마든지 빠르게 회로를 제압할 수 있다.
괴뢰들의 원영기든 천인기든, 천 년간 괴군의 회로를 다뤘던 내게는 상성이 극단적으로 좋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괴뢰들에게 휩싸여서 오는 김연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의념의 색이 왜….’
오싹!
그리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옆에서 기다리던 오현석의 몸을 잡고 옆으로 피했다.
타앗!
늙고 쭈글쭈글한 손가락이 내가 있던 자리의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김연이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도, 도망치세요, 오빠!”
“흐히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찌릿, 찌릿….
사축기 급에 도달한 노괴가, 어둠 속에서 몸을 드러냈다.
“공방에서 나와 보니, 제자가 잔뜩 들뜬 의념으로 어디를 가려 하길래 살펴봤더니, 머릿속으로 온통 네 생각을 하고 있더구나. 그래, 서은현이라 했던가? 드디어 약속을 지키러 온 게로구나!”
괴군이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보며 소리쳤다.
내가 언젠가 기묘성채로 찾아가 김연의 괴뢰가 되겠다는, 웃기지도 않는 약속.
물론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으나, 그걸 믿은 모양인지 괴군의 눈은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철컥, 철컥, 철컥!
괴군의 옆으로 몇 기의 괴뢰들이 더 나타났다.
하나하나가 사축기 급의 괴뢰들.
그리고 사축기 최정상급의 힘을 지닌, [그녀] 역시 그 옆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현석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김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너를 무슨 괴뢰로 개조할지, 정말 많이 고민했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그런 동화가 있었거든. 일국의 왕녀를 마도 수사로부터 구하기 위해 타국의 왕자가 와서 구해 주는 그런 동화였었나. 제자를 위해 망설임도 없이 괴뢰가 되겠다는 네 모습을 보고, 나는 마치 네가 왕자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 ‘서 왕자’는 어떠냐? 그래, 왕태자! 너를 ‘서 태자’로 진화시켜 주마! 마음에 들지 않으냐?”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 장군 외에, 다른 건 더 필요 없을 것 같군요.”
그리고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나와라, 진본(眞本) 서 장군.”
쿠구구구구구!
내 등 뒤에서, 괴군과 뒤지지 않는 기세를 지닌 거체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