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수선전-174화 (174/185)

스승의 은혜 (11)

[웃기는 녀석이군.]

흑룡왕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연체공법을 익힌 인족? 감히 내 앞에서? 너희가 익히는 절대 다수의 연체공법이란, 결국 요수공법의 열화판이라는 걸 모르는 거냐? 지족의 최강자 중 하나인 내 앞에서 감히 열등한 공법을 앞세워?]

창호자는 말이 없었다.

치이이이―

“…?”

그리고, 나는 창호자를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색이, 바뀌고 있다.’

말 그대로였다.

그의 양 주먹에 담긴 창령격원결.

본디 푸른빛으로 넘실거려야 할 그의 주먹과, 그의 날개가 점차 다른 색으로 변화한다.

적색(赤色)이 점차 창호자의 몸에서 빠져나온다.

무엇인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생명의 근원이, 그 피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창호자의 전신에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창익천쇄의 청색과 창호자의 혈색이 합쳐지며, 자색(紫色)으로 화하고 있었다.

열 번째 날개가 펼쳐지며, 창호자는 보랏빛의 화신으로 화하였다.

그 모습은 마치, 혼원(混元)의 기운으로 몸을 변화시켰던 오현석과도 얼핏 닮은 듯했다.

[하, 감히 나에게 대적하겠다는 거냐? 연체사가?]

쿠릉, 쿠르르릉!

점차 흑룡왕의 주변으로 먹장구름이 몰려들며, 흑룡왕의 힘을 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창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흑룡왕을 향해 걸어갔다.

쿵, 쿠웅, 쿵!

그리고, 그가 한 발짝을 걸어나갈 때마다 점차 그의 전신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한 발짝을 걷자 일 문(文)만큼 커지고, 두 걸음을 걷자 한 치(寸)만큼 커지며, 세 걸음을 걷자 한 척(尺)만큼 커진다.

네 걸음을 걷자 한 칸(間)만치 거대해지며, 다섯 걸음을 걷자 한 길(仞)만치 다시 거대해졌고, 다시 여섯 걸음을 걷자 한 정(町)만큼 또 거대해졌다.

마침내 일곱 걸음을 걸었을 때, 창호자의 몸은 일 리(里)만큼 또 커져 있었다.

쿠웅!

여덟 걸음.

창호자는 다시 10리만큼 거대해진다.

쿠웅!!!

아홉 걸음.

100리!

그리고 마지막.

열 걸음!

콰아아앙!

[뭣…!?]

흑룡왕이 당황하였다.

그리고, 창호자의 몸은 그대로 계속 거대해지기 시작했다.

‘저게, 창령성광오채대법으로 천인기에 이르면 펼칠 수 있다는, 거신화 신통…!’

하지만 저 모습은 내가 들었던 것보다도 더더욱 거대한 신통이었다.

‘생명을 태움으로써, 사축기가 아닌 그 너머의 힘을 얻는 거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을 힘이다!

이내 산맥만 한 크기의 흑룡왕보다도 더더욱 거대해진 창호자가, 주먹을 들어 올렸다.

마치, 자색의 거신(巨神) 같아 보이는 모습!

어느새 창호자의 날개는 그의 몸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의 양팔에 두 마리 자색의 용(龍)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뭣…!]

그리고 흑룡왕이 채 당황을 추스르기도 전.

콰아앙!

창호자의 일격이 흑룡왕에게 내리꽂혔다.

꾸구구구구궁!

“…!?”

말 그대로.

천지가 찢겨 나간다.

흑룡왕이 만들었던 흑색의 바다가, 그대로 찢어발겨진다.

그리고 여태껏 우리를 상대로 선전하는 듯했던 흑룡왕이 입에서 피를 토하며 내려앉는다!

[이…놈…! 생명을 태운다는 거냐!?]

쿠르릉, 쿠릉!

창호자의 몸은 마치 자색의 우주(宇宙) 같아 보였다.

그의 몸 안쪽으로 무수한 자색 성천의 형상이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창호자는 흑룡왕을 상대하면서도 말이 없었다.

그저 몰아붙일 뿐!

‘저게, 창령성광오채대법, 최후의 단계.’

창익천쇄의 일격이, 목숨을 태우는 동안 기본(基本)이 된다.

창령격원결의 최후절기인 창익천쇄가 기본적으로 주먹에 둘려 있는 상태, 거기에 성광호체공의 성체화(星體化)로 거신화를 한 후, 오행장원전의 막대한 동력(動力)이 그를 지탱한다.

어둠을 두른 흑룡왕과 싸우는 그 거대한 거체는, 마치 자색의 천신(天神)과도 같아 보였다.

김연도 보고만 있지 않고 흑룡왕을 향해 합체기 괴뢰들을 움직여 그를 몰아붙였다.

합체기 괴뢰들과 팽팽하게 맞서 싸우던 흑룡왕이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아니, 그는 창호자를 상대로 분명히 점차 패퇴하고 있었다.

꾸과과광!

창호자의 주먹이 그의 비늘을 스칠 때마다.

흑룡왕의 몸 곳곳이 뜯겨 나가는 게 한눈에 보였다.

꽈아앙!

흑룡왕이 피를 토하며 밀려나간다.

그가 피를 흘리며 우리를 노려보았다.

[네놈들… 크, 크흐… 감히… 감히…!]

그가 진노한다.

그리고, 흑룡왕이 울부짖었다.

[내가 네놈 따위들에게 질 것 같으냐!? 나는 지지 않는다! 나는 흑룡왕 현음이다! 다시 위대한 자리로 돌아갈 자란 말이다!]

치이이이이!

그와 동시에, 그의 전신에서 붉은 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흑룡왕의 검은 비늘 사이로, 붉은 혈기(血氣)가 치솟기 시작했다.

[좋다, 네놈들의 각오를 알았으니, 나 역시 각오를 좀 하지. 광영으로 여겨라, 이 몸의 수명을 줄여서라도 네놈들을 격살하려는 것이니!]

키이이잉!

“…!?”

그리고 다음 순간.

흑룡왕의 몸에서 뿜어지는 혈기가 더더욱 치솟으며, 흑룡왕이 갑자기 존자의 좌족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와 동시에, 흑룡왕과 존자의 좌족이 합체하였다.

키이잉!

붉은 빛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꿈틀거린다.

그리고.

[오오오오…!]

꿈틀거리는 존자의 좌족, 그 붉은 산호의 촉수 안쪽으로, 흑룡왕의 몸체가 끌려들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존자의 좌족이 완전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

존자의 좌족은 구름이 되었다.

아니, 폭풍이 되었다.

쿠릉, 쿠르르릉!

동시에 그것은 바다였다.

붉은 혈운이, 안쪽에서 검은 번개를 품고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동시에 그 붉은 구름 사이사이에 가득 차 있는 핏물은 마치 바다와도 같아 보였다.

우릉, 우르릉!

“…!?”

흑룡왕은, 존자의 좌족과 합체하여 하나의 천지현상(天地現象)으로 화하였다.

진마계의 마기가 붉은 폭풍 안쪽으로 끌려 들어가며 거신으로 변한 창호자를 덮쳤다.

창호자는 검붉은 폭풍 속에 파묻히며 묵묵하게 흑룡왕과 존자가 합쳐진 거대한 뭔가를 막아섰다.

김연 역시 합체기 괴뢰들을 총동원해서 저 붉은 폭풍을 막아서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막을 수 없다!’

이미, 합체기 수사의 힘을 넘어섰다!

나는 저 정도 힘을 뿜어내는 존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녀]!

괴군이 쇄성기 급이랍시고 개조했던, [그녀]가 딱 저 정도의 권능을 뿜고 있었다!

‘도와야 한다!’

나는 생명을 태우는 창호자를 바라보았다.

저 붉은 폭풍은 단순히 그의 몸만을 공격하고 있지 않았다.

정신!

창호자의 정신 역시 빠르게 저 폭풍에 의해 갉아먹히는 것이, 내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물리적으로 저 폭풍을 막을 순 없다. 아마 김연이 기묘성채를 총동원해도 힘들겠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는 다시금 덜걱거리는 몸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그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그의 마음 안에 축복을 불어넣는 것뿐!’

의해은산은 원영을 뿜어 가르는 것 외에도, 일순간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뿜어내는 일격이다.

원영뿐 아니라, 당연히 몸에도 어마어마한 무리가 간다.

지난번, 의해은산을 써 존자의 일격에게서 모두를 구하고, 김연의 금제를 해제하기 위해 다시 한번 의해은산을 썼다.

하루에 두 번씩이나 모든 것을 쥐어짜 내는 절초를 펼쳤기에, 내 몸 상태는 그때부터 굉장히 좋지 못했다.

아마 이번에 또 의해은산을 쓴다면, 못해도 수명이 200년은 깎이리라.

하지만….

‘그 정도면 별 거 아니군.’

어차피 원영기쯤 되면 시간은 남아난다.

그러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도 없다!

츠츠츳!

나는 전신에 힘을 쥐어짰다.

김연은 합체기 괴뢰들을 움직이며 창호자를 지원했고, 오현석 역시 창익천쇄를 짜내며 힘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기묘성채의 인족 패잔병들 역시, 모두 기묘성채 바깥으로 나와, 각기 창호자를 지원할 법술을 준비했다.

“스승님!”

오현석이 크게 외치며 뛰어나간다.

촤라라락!

그의 등 뒤에서 총 일곱 장의 날개가 뻗어 나왔다.

필시 수명까지 깎아서 만들어 낸 날개였다.

무수한 이들이 펼쳐 낸 일격이 창호자를 도우려 할 때.

그때였다.

문득, 폭풍을 막아 내던 창호자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창호자의 눈을 본 순간,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소리쳤다.

“스승님! 안 됩….”

다음 순간.

쿠구구구구구!

창호자는 우리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

그의 주먹이 움직이며, 점차 그가 입고 있던 갑옷.

그의 공법에 따라, 자색으로 함께 물들었던 청천갑(靑天鉀)이 벗겨지며 이쪽으로 함께 날아왔다.

그리고 청천갑의 공능일까.

우리는 그의 주먹에서 뿜어진 권풍(拳風)에, 공간 자체가 뒤로 밀리며 그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호자의 목소리가 나직이 우리에게 닿는다.

[총연맹에서, 곧 있으면 다시 차원문을 닫을 거다. 빨리 나가라.]

“스승님!!!”

오현석이 눈물을 흘리며 창호자를 불렀고, 나는 필생의 집중력을 동원해 의해은산의 초식을 사용하였다.

파아아앗!

섬광이 나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내 원영은 창호자에게 닿지 못했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탓에, 그에게 닿으려면 더더욱 원영을 몸에서 멀리 떨어뜨려야 한다.

아슬아슬하게, 내 원영은 창호자에게 닿지 않고 내게로 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입을 다물고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의해은산으로 휘둘렀던 원영이 창호자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

나는 견신이 준 신통을 사용했다.

기괴고(奇怪蠱)의 술!

피이잇!

내 원영에서, 혼(魂)의 조각이 떨어져 나가며 창호자의 체내로 스며든다.

본디 혈음계의 존재들의 정신 간섭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술법.

나는 기괴고의 술을 통해, 창호자의 영혼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리고 그의 영혼을 지원하며, 그의 정신을 좀먹는 존자의 정신 간섭에 같이 저항해 갔다.

‘너는… 서은현?’

내 혼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창호자가 물어왔다.

나는 창호자의 의식에 힘을 실어 주며, 그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금이라면 아슬아슬하게 스승님께서 광한계로 넘어오실 수 있습니다!’

나는 기묘성채의 위쪽에서 창호자에게 남긴 분혼과 시야를 공유하며 창호자를 설득했다.

점차 저 뒤쪽으로, 창호자가 부수고 왔다는 광한계의 차원문이 보인다.

우리는 창호자가 날린 권풍과 청천갑의 권능에 의해 차차 차원문을 향해서 밀려가고 있었다.

차원문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닫히는 중이었다.

‘지금 빨리 오신다면 스승님까지만 이쪽으로 오시고, 저 괴물은 못 건너오게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은현아.’

그리고, 창호자가 부드럽게 내 말에 대답하였다.

‘총연맹에 잠시 차원문을 열게 하는 대가로, 내가 무얼 약속했는지 아느냐?’

‘예?’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쇄성기 존자의 진격을 막겠다고 했다. 혈음계 존자가, 분체라도 광한계에 발을 디디면 그 즉시 광한계와 혈음계 간의 차원 좌표가 공명하고, 혈음계 존자‘들’이 광한계로 넘어올 수 있는 단초가 된다고 하더구나.’

창호자가 쓰게 웃으며 나를 격려하였다.

‘이것으로 괜찮다. 내 후학들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제자들을 구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 만족한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츠츠츳!

기묘성채는 기어이 광한계의 차원문을 넘었다.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후학들을 위하려 하는 겁니까? 제가 아는 수도자들은 이기적이고, 오직 저만을 아는 이들이란 말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면 아니 된단 말입니까!’

‘….’

얼마간 침묵하던 창호자가 내 분혼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은현아, 현석이에게 내 유언(遺言)을 전해 다오.’

콰득, 콰드드득!

점차 창호자의 정신 방벽을 깨고서, 붉은 빛살들이 들어온다.

나는 분혼을 갈아 가면서 막아 내려 했으나, 쇄성기 존자의 힘은 분혼 정도로는 도저히 막아 낼 길이 없었다.

뿌드득….

나는 잠자코 창호자의 유언,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다.

우우우웅!

창호자의 몸이 점차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언을 끝마친 그가, 완전히 갈려 가는 내 분혼에게 말하였다.

‘…고맙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벌써 존자의 정신에 먹혀, 어쩌면 현석이를 내 손으로 죽이러 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스승님.’

‘다시 말하지만, 부디 현석이에게도 내 말을 전해 다오. 너 역시 내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 다오. 그래….’

그가 싱긋 웃었다.

‘지금껏, 스승으로서 너희에게 아주 많이 배웠다. 고맙다, 제자들아.’

번쩍!

다음 순간.

내 분혼은 완전히 갈려 나가 버렸고, 창호자의 정신 안쪽으로 붉은빛이 밀려들었다.

나는 창호자의 안쪽에서 스러지며, 창호자가 전력을 다해 기운을 끌어올려 자폭을 하는 것을 보았다.

파아아앗!

나, 오현석, 김연.

그리고 기묘성채에 있던 무수한 인족들.

그들은, 저 너머의 마계에서 커다란 별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마치 폭죽 같기도, 불꽃 같기도 하였다.

확실한 것은,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이었다는 것이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오현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별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우리는 차원문을 넘어서 광한계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리고 우리의 주변으로 어마어마한 기운들이 우리를 둘러쌌다.

합체기 태수(太修)들!

인족 합체기 태수들 7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그들은 투영(投影)이었다.

자신들의 모습을 천지영기에 투영하여 우리에게 보낸 일종의 분신인 셈.

그리고 그 분신들은 각기 결인을 맺으며, 우리가 나온 차원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폐문(閉門)!”

쿠구구구!

차원문이 닫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오현석이 절규하며 외쳤다.

“자, 잠깐! 잠깐 기다리십시오, 스승님이, 스승님이 저기에 계십니다!”

그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외치며 창호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용! 가만히 있어라. 창호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 맹세하고 너희들을 구하러 갔다! 네 스승의 죽음을 헛되이 할 셈이냐!”

합체기 태수 중 한 명이, 오현석을 쳐다보며 준엄하게 외쳤다.

그러나 오현석은 반쯤 실성한 채로 기운을 끌어모았다.

“자, 잠깐! 네놈, 뭐 하는 짓이야!”

그의 등에서, 여덟 번째 날개가 돋아났다.

명백한 사축기 최정상 급의 힘이 그에게서 뿜어졌다.

오현석 역시, 수명을 깎아 가며 창호자를 구하려 하는 것이었다.

“비켜라! 스승님을 구할 거다!”

파아앗!

눈부신 푸른빛이 일렁이며, 합체기 태수들이 닫으려던 차원문을 찢어발겼다.

그 결과, 차원문이 일렁이며 닫히는 속도가 늦어졌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새로.

콰아앙!

‘뭔가’가, 광한계에 손을 디밀었다.

“이, 이런 빌어먹을 놈이!”

“제길, 존자의 혈시(血屍)다!”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팔’이었다.

차원문의 틈새에 내리꽂힌 ‘팔’은 점차 움직이며 차원의 틈새를 열어젖히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차원의 틈새 너머로, ‘팔’의 주인이 내던 목소리와 똑같은 목소리 들려왔다.

“은…현, 아. 현, 석…아. 열어, 다오. 뒤에서, 놈이, 쫓아오고, 있, 어.”

“스, 스승님…!?”

오현석은 놀라서 ‘팔’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와 합체기 태수들이 동시에 외쳤다.

“형님, 안 됩니다!”

“그만! 그만해라, 저건 창호자가 아니다!”

뿌드득….

나는 이를 갈았다.

원립이 자기 얼굴을 주물럭거리며 향화의 얼굴로 내게 목숨을 구걸하려 했던 순간이, 그 모독적인 분노가 다시금 뇌리에 치솟았다.

창호자는 죽었다.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리고, 저 빌어먹을 쇄성기 존자라는 놈은, 그리고 흑룡왕이라는 놈은!

원립처럼 죽은 이의 고혼을 모독하는 것이었다!

“현, 석, 아…! 괴, 괴, 롭다! 아, 아아! 네, 가, 도와, 주면… 살, 수 있….”

“스, 스승님? 정말 스승님이….”

뚜두둑!

나는 덜걱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김연에게 말했다.

“연아, 현석 형님을 제압해 줘.”

“…네.”

김연 역시 괴로운지, 입술을 질끈 쥐어뜯으며 괴뢰들을 움직여 오현석을 제압했다.

촤락, 촤라라락!

그와 동시에, 합체기 태수들의 투영 역시 법술을 써 오현석을 꽁꽁 포박했다.

“안 돼! 놔! 놓으라고! 서은현! 지금 뭘 하는 거냐, 스승님이 저기 있잖아! 스승님이…!”

“….”

‘그렇군.’

나는 지난 생.

오현석이 어째서 타락해서 미쳐 버렸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과 상황은 달랐겠지만.

창호자는 그 때에도 오현석을 구하러 진마계로 들어갔고, 그 때에도 자폭하며 오현석을 탈출시켰으리라.

하지만 지난 생의 창호자는 내 기괴고의 술로 정신도 보호받지 못해, 어쩌면 자폭 전에 존자에게 아예 몸을 뺏겼을지도 몰랐다.

지금에야 팔 한쪽만 남긴 채 존자에게 쓰이고 있다지만, 지난 생에는 어쩌면 육신 전체를 존자에게 뺏겨 저 짓을 했고.

합체기 태수들은 망설임 없이 저 꼴이 된 창호자를 오현석의 눈앞에서 격살하고 진마계의 입구를 닫았으리라.

존자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창호자의 입을 빌려 오현석에게 살려 달라고 했으리라.

그렇게 끝까지, 창호자의 죽음을 모독했으리라!

그리고!

이번 생에는, 내가 그의 제자로 들어갔으니.

절대로 그리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죽음을….”

뿌득, 뿌드드득!

전신이 삐걱거린다.

움직이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움직인다.

자세를 잡고, 의해은산의 초식을 준비한다.

“그 더러운 입으로….”

쿠우웅!

다시금 원영을 쥐어짜며, 창호자의 팔을 덜렁거리며 그의 죽음을 모독하는 녀석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모독하지! 마라!”

번쩍, 번쩍 번쩍!

김연의 괴뢰들이 저마다 광선을 쏘고 법술을 발하며, ‘팔’을 차원 밖으로 내보낸다.

태수들의 투영들 역시 저들 나름대로 ‘팔’을 내보내려 노력했다.

“오 사형(師兄).”

현석 형님의 동생, 서은현이 아닌.

창천개벽문의 제자로서 오현석을 부르며 나는 기력을 일 점 집중했다.

“태, 수, 들! 내가, 좋은 정보, 알려 주마! 저놈, 심족, 이다! 심도공, 법을 익혔, 다!”

‘팔’이 꿈틀거리며 나를 가리켰으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스승님의 유언을 당신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지난 생의 오현석은 어째서 타락했을까.

어째서 정신이 나가 버린 채로 슬퍼했을까.

그것은 혈음계 존자의 농간도 있었을 터지만, 어쩌면 창호자의 유언이 그에게 전해지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창호자가 가진 무력의 상징인 청천갑은 물려받았지만, 창호자의 진정한 근간이 되는 그의 정신은 물려받지 못했던 것일 터였다.

그랬기에, 그는 힘만을 가진 채 정신이 주저앉아 타락했으리라.

지이이잉!

‘팔’이 점차 붉게 물든다.

그리고 ‘팔’에서 붉은 산호가 돋아나며 주변을 물들였다.

흑룡왕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 사방으로 울렸다.

[악덕(惡德)이 느껴지는군. 같은 동족을 헌신짝처럼 마계에 버려 두고 문을 닫은 더러운 인족의 악덕이….]

치이이이!

“이, 이게 무슨…!”

“혈음계 존자가, 뭔가 사술을 쓰고 있다!”

“혈음계의 마공이다!”

합체기 태수들의 투영에서 붉은 산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산호는 그대로 광한계의 천지영기를 마기로 물들였고, 그 마기는 ‘팔’에게 힘을 더해 주고 있었다.

점차 합체기 괴뢰들의 공격에 밀리던 ‘팔’이, 이쪽으로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또 다른 악덕이 느껴지는구나. 광기에 미쳐서 멀쩡한 타 종족을 꼭두각시로 개조한 미치광이의 악덕이….]

그리고, 김연이 조종하던 합체기 괴뢰들에게서도 갑자기 붉은 산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덜걱, 덜걱덜걱덜걱…!

“크윽…!”

김연이 이를 악물고 합체기 괴뢰들을 조종하려는 듯했으나, 붉은 산호가 그녀와 괴뢰들의 사이에 명령 체계에 균열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붉은 산호가 뿜는 붉은 기운이 김연의 의식 실을 타고 역류하며, 그녀의 상단전을 침범했다.

“아아악!”

김연이 고통을 이겨 내며 의식을 운용해 붉은 기운을 뇌리에서 밀어내려 발악하였다.

삽시간에 김연이 무력화되었다.

[또 다른 악덕이 느껴지는구나…. 같은 지성종을 아무 거리낌 없이 단약으로 구워 잡아먹은 더러운 이들의 악덕이….]

“흐아아악!”

“이, 이게 뭐야…!”

“내, 내 몸이…!?”

그리고, 주변에 있던 인족 패잔병들의 몸에서 붉은 산호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나는 그 광경을 보며 기함했다.

‘악덕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저렇게 다룰 수가 있다고? 아니, 그보다… 혈음계 존자의 왼손이나 왼발은 저런 술법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흑룡왕이 존자의 왼발과 합체하고 나서부터 저런 법술을 쓰기 시작하는 건가?’

피싯, 피싯….

내게도 산호가 돋아나긴 했지만, 다행히도 내게서 돋아나던 산호들은 그대로 말라비틀어져 죽어 버렸다.

그런 것들을 보며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흑룡왕은 그저 요족의 용왕 중 하나였을 뿐이다.

선수 진혈을 조금 타고나긴 했지만, 그 정도일 뿐인 합체기 흑룡왕.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혈음계 쇄성기 존자의 육신과 합쳐진 지금, 흑룡왕은 무언가 [다른] 존재로 변모한 것 같았다.

‘쇄성기 존자의 분체조차도 쓰지 못한 법술을 자유자재로 쓴다…. 도대체 뭐지, 저 자는?’

악덕이란 개념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사용한다고?

“크윽, 안 돼!”

“제길, 혈음계 놈이…!”

태수들의 투영이 삽시간에 산호에 뒤덮였고, 차원문 인근의 인족들이 모조리 산호에 뒤덮여 전멸하기 시작했다.

‘하….’

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창호자가, 아니.

스승님이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렇게 되어 버렸다면, 나 역시 그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 나밖에 없다면, 내가 지금 그의 의지를 받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저물도에서 이전에 구해 둔 백홍주를 얼른 꺼내 마신다.

무색유리검이 내 혼과 단단하게 연결된다.

나는 이를 악물며 의해은산을 끌어올렸다.

눈앞의 저 존재에게 심상을 파고드는 일격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저 존재의 사고 구조는 내가 당최 읽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혼(魂)의 계위를 파고드는 데에 쓰던 의해은산의 힘을, 모조리 물리력으로 전환한다.’

키이이이잉!

원영을, 기의 계위에서 폭발시켜 버린다!

그 정도의 일격이라면, 녀석이 이 주변을 마기로 치환시키든 어쩌든 충분히 저 너머로 보내버릴 수 있다!

“들으시오, 오 사형.”

나는 서슬 퍼렇게 눈빛을 태우며 저 존재에게로 다가가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전하신 마지막 가르침이오.”

사락, 사라라락!

등 뒤로 무수한 인영들이 나타난다.

만상인연도.

본디 만상인연도를 이루는 기령들은, 내 눈에만 또렷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뿐.

타인들의 눈에는 그저 희뿌연 안개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마 지금 오현석과 김연의 눈에는, 내 뒤로 무수한 안개 같은 것들이 깔린 듯이 보일 터.

그리고 이 만상인연도는 기령들로 하여금 그 장면의 기억을 ‘재현하는’ 식으로 기억을 보관하는 방식이었으므로 기령 안에 딱히 기억이 담겨있거나 하지 않았기에, 기본적으로 만상인연도를 통한 기억의 전송 등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 영혼이 폭발하는 그 순간이라면.

내 영혼의 기운이 갈가리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순간이라면, 그 순간에는 ‘죽음’이라는 이름 하에 자타(自他)의 경계가 사라지기에, 내 만상인연도를 아주 짧은 찰나에 타인에게 보여 줄 수 있다.

나는 그 짧은 시간을 틈타, 만상인연도로 창호자가 내게 유언을 전달하던 그 순간을 재현해내 오현석에게 보여 줄 요량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오현석.

그리고,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김연.

김연의 눈이 떨렸다.

다행히 그녀의 머리를 침범한 붉은 기운 자체는, 충분히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가지… 마세요.”

내가 하려는 걸 알아챘는지,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

난 이를 악물었다.

나라고 죽고 싶지 않았다.

회귀자에게 목숨은 무한하다지만, 이 시간은 한 번뿐이니까.

매 순간은 한 번뿐이니까.

오히려 회귀하기에 죽음이 너무나도 공포스럽다.

오히려 회귀하기에 이 순간을 버리고 시간을 역류하는 것이 너무나도 원통하다.

그리고.

오히려 회귀하기에, 이 순간은 너무나도 소중하다.

소중하기에.

나는 이 소중한 이들을 지킬 것이다.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스승님의 유언처럼… 특권(特權)이니까.

창호자가 마지막에 전해 준, 그의 의지를 떠올렸다.

단악검법(斷岳劍法).

또다시 새로운 초식을 개화한다.

아니, 사실 새로운 초식이라 하기에는 조금 어폐가 있다.

제이십육초(第二十六招).

의해은산이 원영을 검에 담고, 그 안에서 모든 힘을 통합시켜 내지르는 일격이라면.

새로 만들어낸 초식은, ‘내지른다’라는 과정을 ‘폭발시킨다’로 변형한 것에 불과하니.

‘스승님.’

“일멸도차안(一滅導此岸).”

내 손에 쥔 검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온다.

원영 속에서 모조리 통합시켰던 힘을, 기의 계위에서 있는 힘을 다해 폭발시킨다.

다음 순간, 새하얀 빛이 온 만상을 덮으며, 뇌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원영(元靈)이 무너진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것으로 내가 이번 생에 맺어 온, 나의 소중한 인연들을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무수한 인영이 내 뒤를 따른다.

만상인연도를 통해, 지금껏 만났던 모든 이들은 내 인연이며, 동시에 내 스승이었다.

그렇기에 스승들에게는 받은 만큼 은혜를 돌려주었다.

그러나 창호자에게 받은 은혜는 돌려주지 못했다.

그러니 창호자의 의지를 받드는 것으로, 도리를 다하자.

나는 그렇게, 창호자의 말을 품에 안고서 웃으며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 *

“아, 아아….”

김연은 눈물을 흘렸다.

죽는다.

서은현이, 혈음계의 저 사악한 존재가 쓰는 법술에 아무도 반응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움직일 수 있기에 목숨을 바쳐 혈음계의 존재를 막는다.

‘그럴 수 없어!’

그녀가 있는 힘을 다해 힘을 끌어올리며 그를 막으려 할 때였다.

사라라락….

그녀의 눈앞으로.

희미한 환영들이 떠올랐다.

서은현의 뒤편에 떠올랐던 희뿌연 안개가, 마치 사람처럼 구현화되며 어떠한 인물을 그렸다.

그것은 창호자였다.

창호자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저건…!’

서은현의 기억 속 장면이다.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안 김연의 눈동자가 바싹 졸아들었다.

그리고, 창호자의 모습을 본 오현석 역시 눈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도대체 왜 그렇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후학들을 위하려 하는 겁니까? 제가 아는 수도자들은 이기적이고, 오직 저만을 아는 이들이란 말입니다! 당신도! 그렇게 살면 아니 된단 말입니까!]

서은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의 질문은 오현석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오현석도 창호자에게 묻고 싶었다.

도대체 의(義)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정(情)이 무엇이기에… 당신은 어떻게 그리도 쉽게 후학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었습니까.

[은현아, 현석이에게 내 유언(遺言)을 전해 다오.]

그리고, 창호자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오현석은 창호자의 투영이 마치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기까지, 도저히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 온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의(義)를 지켜 오고, 선(善)을 내 나름대로 지켜 온 이유는, 그것이, 살아오며 은혜를 받아 온 모든 사람의 임무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特權)이다.]

창호자의 유언이 이어졌다.

[의를 행하며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의를 행하고 끝없는 고난을 이기며,

의를 위하여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의를 향한 고귀한 이상을 위해 죽는 것.

의를 바라보며 잘못을 고칠 줄 알고….]

그것은 그의 노래였다.

창호자가 평생을 추구하여 온 믿음이었다.

타고나기를 강하고 축복받은 신체로 태어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서 살아오며.

선택받은 자로서,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능력 있는 자에게 기회를 주며, 어른으로서 후학을 지키며.

자신의 아래에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다하는.

괴군에 의해 순수하다고 평가받은 창호자가 추구해 온 순수한 선의(善意)의 노래였다.

[…순수함과 선의로 서로 사랑하는 것.

불가능한 꿈속에서 긍지를 가지고….]

창호자의 노래를 듣는 오현석은 눈물을 그쳤다.

눈물을 닦고 일어서, 정중하게 창호자의 환영을 향해 절을 올렸다.

김연 역시 더 이상 서은현을 막으려 시도할 수 없었다.

모든 수도자들.

그중에서도 원영기 이상, 천인기가 되는 이들은 모두 미치광이이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어느 한 부분이 맛이 간 이들뿐이다.

그랬다.

창호자는 선의(善意)에 미친 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순수함에 미친 자였다.

남을 위해, 자신이 책임진 자를 위해, 자신의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는, 미친 논리를 진정으로 믿고 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김연은 서은현의 행동을 더는 막을 수 없었다.

서은현은 지금, 창호자의 의지를 계승하였다.

창호자가 남긴 유언을 가슴에 묻고, 진정으로 그 의지를 받들고 있었다.

기묘성심전으로 심상을 읽을 수 있기에, 그녀는 그 단호한 서은현의 마음을 읽고서, 더더욱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창호자의 노래가, 그의 순수가 마침내 끝나간다.

[…그렇게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단순한 시가 아니다.

이것은, 서은현과 오현석.

그리고 남아 있을 창천개벽문의 모든 제자들에게 전하는, 그의 순수함이었다.

[부디 현석이에게도 내 말을 전해 다오. 너 역시 내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 다오. 그래….]

파아앗!

창호자의 몸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방금 보았던 것처럼, 그가 노래했던 것처럼.

창호자는 별이 되어 갔다.

[지금껏, 스승으로서 너희에게 아주 많이 배웠다. 고맙다, 제자들아.]

번쩍!

창호자의 기령이, 창호자 본인과 똑같이 별이 되어 사방으로 빛을 밝혔다.

순수함에 미쳐 버렸던 광인.

하지만, 이 세상이 지옥이라면 어쩌면 그는 순수하기 때문에 지금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선하기에 더 살아가지 못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서은현을 통하여 오현석에게 확실히 전해졌다.

오현석은 별이 된 창호자 너머, 새하얀 빛무리와 함께 흩어지는 한 사람을 보았다.

“…앞으로, 계속 이 의지를 계승시키겠다.”

오현석이 주먹을 쥐고 외쳤다.

“그렇게 해서… 반드시. 반드시 스승님의 마음이 의미 없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피안에서 지켜봐 다오, 서은현!”

오현석은 결의를 다지며 울음을 삼키고 서은현에게 외쳤다.

단순히.

사람의 마음이, 사람에게 전해진 것.

단순히 그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창호자 사후 폐인이 될 오현석의 운명은 비틀렸다.

저벅, 저벅….

김연은 천천히, 서은현에게 다가갔다.

서은현은 검을 휘두른 자세를 한 채, 그렇게 서 있었다.

서은현은 그렇게 선 채로, 자신의 원영을 격발시켜 죽었다.

차원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고, 창호자의 팔은 완전히 사라져 더 이상 모독을 당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는 채로 죽었다.

어쩌면 자신의 인연들을 지킨 채 죽을 수 있었다는 안도감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서은현에게 다가가, 그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서은현의 몸은 그제야 쉴 수 있겠다는 듯, 천천히 김연의 품으로 쓰러졌다.

김연은 고개를 숙이며, 쓰러진 서은현의 입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오현석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너는… 정말 많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었나 보구나, 은현아.”

서은현의 주변에는, 희뿌연 무수한 인영들이 그를 중심으로 서 있었다.

그 인영들은 김연과 함께 잠든 서은현을 안아 주고 있었다.

“내게 있어 스승님은 한 분뿐이셨다만, 은현아…. 네게 있어 스승은, 지금 너를 감싸 주는 모든 사람이겠지?”

오현석은 언뜻, 그 인영 중에서 자신의 인영을 본 것 같다고 느끼며 눈을 감았다.

“잘 자라, 서은현. 네가 지키려던 그 모든 스승들의 은혜는, 충분히 갚았다. 이제… 피안(彼岸)에서 쉬어라.”

오현석은 그렇게 서은현을 추도하였다.

하지만 오현석의 바람과는 다르게, 서은현은 피안에 이르지 못했다.

일멸도차안이라는 절학명처럼, 서은현이 도달할 곳은 또 다른 차안(此岸)일 뿐.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삶 속에서 만났던 모든 스승의 은혜를, 있는 힘을 다해 갚고,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잠든 지금만큼은.

서은현은 편안하게, 수많은 사람들의 품에 안겨 잠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서은현의 열다섯 번째 회귀(回歸)였다.

작가의 말: 창호자의 유언은 ‘돈키호테’에서 오마쥬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창호자는 돈키호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입니다. 특히나 돈키호테의 ‘순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돈키호테와도 같은 창호자의 순수함은 서은현에게 전승되었네요.

창천개벽문 에피는 최근 서은현도, 저 자신도 초창기의 조문도석사가의같은 마음을 조금 잊은 것 같아, 서은현과 작가 자신을 일깨우기 위해 만든 에피였습니다.

이제 창호자의 순수를 전승받은 서은현은 불가능한 꿈을 안고서, 무적의 적과 싸우며, 끝없는 고통을 견디면서도 고귀한 이상을 위해 다시 죽을 수 있는 마음을 얻었습니다.

어찌 보면 초심을 되찾았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초심을 되찾는 것이 이번 에피소드의 주 목표였던 만큼, 서은현도, 그리고 작가 본인도 앞으로 초심을 찾고 더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봐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의 말씀 올리며,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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