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레니샤의 첫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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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레니샤의 첫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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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레니샤의 첫 선물
2022.04.15.
“지금부터 일주일. 일주일 안에 황제가 답을 내어놓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일을 처리한다.”
“예, 카시우스 경!”
카시우스가 어느새 자라난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이것 또한 전쟁이 끝났다는 증거였다.
전쟁터에서는 항상 짧은 머리를 유지해야 했다.
카시우스가 잔에 남은 술을 털어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회 이후로 카시우스의 머릿속에서 레니샤의 모습이 떠나질 않는다.
그날, 레니샤가 어떤 표정을 하고 어떤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는지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되새김질하는 소도 아니고.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후우…….”
레니샤의 그 눈빛 때문이다. 로테라 공작을 꼭 닮았던 눈.
카시우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카시우스 경, 경!”
그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카시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 13살쯤 되었을 소년이 구르듯이 카시우스에게 달려왔다.
카시우스가 초르파 평야에서 구해낸 아이였다.
밤톨 같은 머리에 회색빛 눈동자를 가진 아이의 이름은 테샤.
테샤는 등을 가로지르는 큰 부상을 입고 있었다.
아이는 모든 기억을 잃었고 그 이후로 카시우스를 따르고 있었다.
이름을 붙여준 것도 카시우스였다.
“무슨 일이길래 그렇게 뛰어다녀.”
카시우스가 무심하게 물었다.
“손님이 오셨어요! 엄청 화려한 마차를 타고…… 되게 고귀해 보이시는 손님이세요!”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밖으로 내밀었다.
이 시간에 대체 누가……!
그렇지,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것은 황실뿐이지.
손님의 정체를 확인한 카시우스가 테샤를 뒤로하고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혹시, 레니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기대감이 마음속에 불꽃을 피웠다.
물론,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기대였다.
“황제께서 보내셨습니다. 황성의 시종장, 헨리 플로리안이라고 합니다.”
“……카시우스요.”
“예, 카시우스 경. 전에 한 번 뵌 적 있었지요.”
헨리가 깍듯하게 예를 갖췄다.
역시 황성의 시종장이라 이건가. 남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카시우스가 뛰어오느라 굽히고 있었던 몸을 곧게 폈다.
그것만으로도 거대한 체구가 위압감을 뿜어냈다.
“오늘 늦은 시간에 결례를 범한 것에 대해서 사과드립니다. 황제 폐하의 명인지라…….”
헨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전쟁터에서는 시급을 다투는 일이면 새벽에도 오가기도 하지.”
시급을 다투는 일이 아니면 왜 이 시간에 찾아왔느냐는 타박이었다.
헨리가 헛기침을 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밀었다.
“황제께서 내리시는 명입니다. 3일 후에 황성에서 만찬이 있을 예정이니 그 자리에 참석하시라 하십니다.”
“내게 내려주실 영지와 작위를 고르셨다던가?”
“그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수 있는 답이 없습니다.”
헨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양피지를 펼쳤다.
양피지에는 별다른 말없이 카시우스가 참석해야 하는 모임에 대한 간략한 정보만 적혀 있었다.
헨리가 망설이다가 카시우스에게 힌트를 주었다.
“그날, 드레스코드만 맞춰 입고 오시면 됩니다. 전과 같은 제복은 과한 감이 있으니 적당한 정장으로 맞춰 입어주십시오.”
“……하.”
카시우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카시우스에게 헨리가 한 번 더 친절을 베풀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격식에 어긋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본인이 가장 격식에 맞지 않는 망나니 같던데.
카시우스가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노력해보도록 하지.”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헨리가 다시 에를 취하고 마차에 탔다.
화려한 황성의 문양을 새긴 마차가 카시우스의 작은 저택을 빠져나갔다.
카시우스가 손에 들린 양피지를 움켜쥐었다.
이곳에 가면 다시 한번 레니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지금 마음에 자꾸 걸리는 그 여자에게 전해야 할 말을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러고 나면 이 부채감도 전부 털어버릴 수 있을지도.
카시우스가 양피지를 도로 펼쳤다.
“내가 정장이 어디 있어!”
먹고 죽을 돈도 없구만. 카시우스가 이를 짓씹었다.
***
레니샤에게도 같은 내용의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황제가 여는 만찬이라.”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려 피식 웃었다.
시녀들이 레니샤의 눈치를 살폈다.
공작 부부가 전사한 이후로 레니샤는 감정 없는 종이 인형처럼 굴었다.
황제가 휘두르는 대로 휘둘리면서.
그런 레니샤가 그나마 기운을 차린 것은 살아남은 가족이 있다는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였다.
그리고 전에 참석했었던 연회 이후로는 더 기분이 나아진 것 같았다.
“참석하시겠습니까?”
시종장, 헨리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황제라고는 해도 황후를 강제할 수는 없지만, 렉서스는 달랐다.
만약, 레니샤가 불복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복종하게 만들 사람이었다.
“물론, 가야지.”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이 자리엔 카시우스 경도 참석하겠지?”
“……예, 황후 폐하.”
레니샤가 입술을 문질렀다.
“이만 물러가게.”
헨리가 불안함을 삼키며 물러섰다.
황후가 카시우스에게 평소와 다른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건 황제도 마찬가지지만, 황후도 만만치 않았다.
황성에 어떤 파란이 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헨리가 돌아가고 레니샤가 린데이 시녀장을 불러들였다.
“린데이.”
“예, 황후 폐하.”
“3일 후에 황제께서 만찬을 여신다고 하더군.”
“그 자리에 그 여자도 옵니까?”
린데이가 사납게 얼굴을 구기고는 말했다.
그 순간 방 안에 모여 있던 시녀들이 입을 꾹 다물고 레니샤를 응시했다.
린데이가 그 여자라고 칭할 여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카나리아?”
“예!”
린데이가 주먹을 움켜쥐고 말했다.
“카나리아가 올지는 나도 모르겠네. 황제가 여는 작은 만찬 아닌가. 무슨 명분으로 어떤 이들을 초대하려는 건지는 나도 알 수 없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이군요.”
레니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카나리아는 레니샤의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카나리아가 무슨 짓을 하든 레니샤는 동요 한번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녀들은 카나리아를 향해 항상 전의를 불태우곤 했다.
“새로운 드레스를 준비해야겠어.”
“그 예전에, 로테라 소공작께서 보내주셨던 루비를 꺼내는 건 어떨까?”
“그것도 좋지. 드레스는 금사로 수놓은 은색 드레스는 어때? 거기에 흰 구두를 신으면 고귀하면서도 아름다우실 거야.”
벌써 시녀들이 전투적인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로하고 레니샤가 시녀장을 다시 불렀다.
“린데이.”
“예, 황후 폐하.”
“자네 가문의 이름으로 선물을 하나 보내줄 수 있겠나?”
“……?”
“카시우스 경에게 이번 만찬에서 입을 옷을 보내게.”
굳이 황제가 만찬을 벌여 손님들을 초대할 이유는 하나뿐이다.
이 만찬은 레니샤와 카시우스를 위한 자리였다.
레니샤가 피식 차갑게 웃었다.
레니샤는 그날 카시우스가 황제가 그녀를 위해 준비한 패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카시우스도 그녀를 알아보았을지는 모를 일이다.
“옷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린데이 시녀장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가 무슨 의도로 이런 명령을 내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카시우스일까.
그러나, 스산한 얼굴을 하고 있는 레니샤에게 더 이상 묻지 못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오전, 린데이 가문의 이름으로 의상실에 주문이 들어갔다.
***
제국에서 레니샤의 위치는 애매했다.
아이를 낳아 미래를 준비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황제와 살가운 사이도 아니다.
그러나, 레니샤가 없다면 이 제국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데에 사람들은 모두 동의를 표했다.
레니샤는 훌륭한 황후였던 것이다.
겨울이 되면 가난한 자들은 레니샤가 베푼 솜옷을 입고 혹독한 계절을 견뎌냈으며, 봄이 되면 레니샤가 황실의 예산으로 풀어준 곡식으로 곯은 배를 채웠다.
뛰어난 미모와 사교술을 가진 레니샤의 주도로 이루어진 외교로 상인들은 먹고살 수 있었다.
황실이 한 일들에는 모두 레니샤의 이름이 붙었으니 그녀를 칭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는 카나리아가 고집을 부려도 꺾을 수 없는 아성이었다.
황제가 만찬을 연다는 소식은 이른 아침이 되자마자 의상실에 돌았다.
지난 밤, 그 자리에 초대받은 카나리아가 황후의 옷을 지어주는 의상실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내용의 경고장을 보낸 것이다.
“정말 가소롭지 않니?”
마담 투리엘이 혀를 차면서 경고장을 부리는 점원들에게 내밀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평민 출신의 정부 주제에 감히 황후 폐하께…….”
“아무리 로레타가 멸문했다고는 해도 황후 폐하께 제깟 게 이렇게 비빌 수준이나 되나요?”
“그러게 말이다. 세상이 말세야, 말세.”
투리엘이 혀를 내두르고는 말했다.
“전에 황후 폐하 사이즈 재둔 것 있지?”
“네, 마담 투리엘.”
“그 사이즈에 맞춰서 화려한 흰 공단 구두를 만들어서 보내드리렴. 내가 그런 평민 여자 말을 들어야겠니?”
마담 투리엘은 게다가 자작 부인 출신의 의상 디자이너였다.
그런 마담 투리엘에게 카나리아의 말은 그저 밖에서 짖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좋은 생각이세요, 마담 투리엘.”
그때였다.
투리엘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의상실 안에 들어와 모자를 벗은 린데이가 환하게 웃으며 투리엘에게 인사했다.
“투리엘!”
“린데이? 이렇게 직접 오는 건 오랜만인데? 무슨 일이 있어?”
투리엘 또한 반갑게 린데이를 맞이했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공유한 친구 사이였던 것이다.
“황후 폐하의 명을 받고 왔어, 투리엘.”
“음?”
“카시우스 경이라고 알지?”
“아.”
“황후 폐하께서 그 남자가 만찬에서 입을 옷을 선물하고 싶어 하셔.”
투리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린데이가 가방에서 황후의 문양이 새겨진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문은 우리 가문의 이름으로 넣으려고 해. 해줄 수 있지?”
투리엘이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물론이야. 황후 폐하께서 또 무슨 일을 꾸미시려는 모양이군.”
황후가 겨울에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솜옷을 앞장서서 만들고 있는 것이 투리엘의 의상실이었다.
그리고 황후의 선행에 동참하려는 귀부인들도 솜옷을 만들어 투리엘에게로 가져오고 있었다.
투리엘의 의상실은 황후의 가장 큰 조력자 중에 한 곳이었던 것이다.
린데이가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투리엘이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의상실 문을 닫아! 카시우스 경의 옷을 맞춰드려야 하니 검은 원단은 종류별로 챙기도록 해! 아, 구두 만들 가죽도 챙기고!”
“네, 마담!”
“그러면 몸 좋은 기사들을 잔뜩 볼 수 있겠네요?”
점원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린데이와 투리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