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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착하게 굴어야지? (8/135)


8화. 착하게 굴어야지?
2022.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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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미소 짓고 있었다.

겉으로 내보이지는 않지만 카나리아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카나리아가 빨개진 얼굴로 애써 웃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카나리아. 황제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카나리아!

그것이 카나리아가 구축해온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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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그런 게 있었군요.”

카나리아가 침을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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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군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카시우스 경.”

최대한 여유롭게 대답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카나리아의 노력에도 카시우스는 별반 관심 없는 것으로 보였다.

카시우스는 카나리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씨근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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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놈은 왜 저렇게 건방진 거지? 노예 출신 주제에……!’

물론, 눈길을 끄는 외모를 가진 것은 알겠다.

그것이 무기가 되는 세상이니 사람들이 카시우스를 힐끔거리고 있는 것도 안다.

거기에 카시우스가 곧 로테라 공작위를 수여받게 될 거라고 하니 친분을 다져보려고 했었던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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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좋아서 말 건 게 아니라고!’

전쟁터에서 굴러서 그런지 귀족답지 않은 밀빛 피부와 핏빛 머리카락에, 짐승 같은 금안.

거기에 검은 슈트 안에 싸여 있는 위협적인 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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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해.’

카나리아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한 번도 그를 훔쳐본 적이 없다는 듯이.

다음에 만찬장에 들어온 이는 레니샤였다.

레니샤가 고개를 치켜들고 만찬장 안을 훑었다.

예쁘게 입고 온 카시우스가 보였다.

마담 투리엘은 레니샤의 취향대로 카시우스의 옷을 맞춰주었다.

깔끔하고 심플한 검정색 정장.

고급스러운 소재로 포인트를 주고 검붉은 보석들로 장식을 더한 디자인이었다.

레니샤의 황금빛 드레스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만찬장에 있던 이들의 눈이 황홀하게 빛날 정도였다.

금사로만 짜인 이 드레스는 오로지 황후인 레니샤만이 입을 수 있는 드레스였다.

황후궁의 사람들이 밤을 새워가며 만들어낸 역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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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늦었나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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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황후 폐하. 저희가 서둘렀습니다.”

입을 다물고 고고한 척하던 귀족들이 황후에게 한 마디씩 던졌다.

그들은 레니샤를 향해 마땅한 예의를 표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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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일어설 필요 없으니 앉아 있게.”

레니샤가 우아한 모습으로 카시우스의 곁에 앉았다.

본디 정해진 자리라는 것을 아는 듯이.

카시우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장미향이었다.

그냥 달콤한 꽃향기가 아니었다.

싱싱한 초록빛 줄기와 오소소하게 돋아난 가시들까지 전부 느껴지는 그런 향기였다.

로테라의 레니샤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은, 그런 입체적인 향기.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레니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로테라 공작이 생전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공작의 말이 맞았다.

레니샤는 로테라 공작을 꼭 닮은 자식이었다.

다른 귀족과 이야기를 나누던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카시우스와 레니샤의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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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경. 지난번에 보고 또 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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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 폐하.”

카시우스가 왠지 모르게 말문이 막힌다고 느꼈다.

말을 할 때마다 로테라 공작의 잔상과 눈앞의 레니샤의 모습이 뒤섞여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리고 왠지 저택의 기사들이 마담 투리엘을 보고 난리를 친 이유를 지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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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분이시라고요! 전쟁터에는 없는 그 여성분이요!’

카시우스가 가슴을 들썩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레니샤의 향기가 몰려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사람 마음을 동요하게 만드는 향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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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보지?”

레니샤가 나긋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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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묻고 싶은 건 많았다.

선물의 저의는 무엇인지. 레니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전해야 할 말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를 부드럽게 손으로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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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게 하고 왔군.”

그러고는 쓰다듬듯이 어깨를 쓸고는 손을 떼어냈다.

레니샤가 속삭이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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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려.”

카시우스의 볼이 머리카락처럼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스스로가 왜 그러는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런 제 모습이 타인에게는 위협적으로 비친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이기도 했다.

귀족들이 놀란 얼굴로 카시우스의 눈을 피했다.

카나리아만이 그런 카시우스를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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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폭력적일 거야. 노예로 자라 배운 것도 없을 테고. 전쟁터에서 지냈으니 사람 도리를 하는 법도 모르겠지? 잘됐어, 레니샤.’

한껏 불행해질 레니샤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카나리아의 기분이 좋아졌다.

레니샤는 그간 카나리아를 무시한 벌을 받는 것이다.

카시우스의 저 폭력적인 면들이 레니샤를 지옥으로 몰아넣을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자는 렉서스였다.

항상 그렇듯이 렉서스는 제멋대로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도착했다.

카나리아가 렉서스가 오자마자 교태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렉서스를 기다리는 동안 카나리아를 진심으로 대해준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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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카나리아는 페하만을 기다리고 있었는걸요.”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어깨를 끌어안고 이마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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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기다리는 게 좋아 늦었나 보군. 자, 다들 자리에 앉으시게.”

카나리아가 도전적인 눈빛을 레니샤에게 던졌다.

레니샤로서는 전혀 부럽지 않은 일이었다.

남자의 애정에 기대어 사는 저 삶이 부러울 리가 있겠는가.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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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께서도 즐거우신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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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카나리아가 점점 더 예뻐지는군요.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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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황후도 나처럼 즐겁게 만들어주는 이를 한 명쯤 곁에 둬도 괜찮을 거야.”

렉서스가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광기로 가득한 렉서스의 눈동자가 레니샤와 카시우스를 번갈아 보았다.

카시우스는 뱀 같은 눈동자로 핥아지는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고 레니샤는 무던하게 웃어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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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빌어먹을 자식은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게다가 제 아내 앞에서 정부와 쪽쪽거리는 짓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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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상종도 하기 싫은데 이 나라의 황제라니.

카시우스는 귀족이 되기 위해서 아등바등했었던 그의 과거가 무가치해지는 것을 느꼈다.

염치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카시우스는 제 몸을 제물로 삼으면서까지 전쟁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것이 아니다.

카시우스가 시선을 비꼈다.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테이블 아래로 가려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서늘하고 가는 손가락의 주인은 분명 레니샤일 테다.

레니샤의 손바닥은 부드럽고 촉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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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가 전쟁터에서 부대끼며 지내온 자들과는 전혀 다른 인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목울대가 불거졌다.

마담 투리엘이 카시우스의 몸을 가판에 올린 돼지고기처럼 만지작거리며 수치를 잴 때도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심장이 벌떡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굴려 간신히 레니샤를 보았다.

레니샤는 여전히 황제와 눈을 마주한 채로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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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폐하. 저는 폐하의 반려로서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레니샤의 미소가 버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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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황후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주신 그대들에게 감사를 표하네. 그동안 공무가 바빠 미뤄왔던 것을 하려고 그대들을 초대했지.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카시우스 경?”

이름을 불린 카시우스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니샤의 손이 카시우스의 손에서 스르륵 떨어져 내렸다.

무슨 의미였을까?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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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정작 궁금한 건 묻지 못하고 딱딱한 대답만 내놓았다.

카시우스의 야생적인 금안과 황제의 나른한 눈동자가 맞부딪혔다.

황제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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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내가 섭섭하게 했었지! 미안하네, 미안해. 사실 이 자리가 하는 것 없어 보여도 해야 할 것이 참 많은 자리거든. 찾는 이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의무도 많지.”

렉서스가 돌연 몸을 숙여 자리에 앉아 있던 카나리아의 턱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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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

카나리아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렉서스가 진득하게 카나리아의 입술을 빨았다.

저속한 소리가 만찬장에 울렸다.

카나리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고개를 틀어 카시우스를 응시한 렉서스가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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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무도 있고.”

렉서스의 번들거리는 눈이 이번에는 레니샤를 향했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오른편에 동요 없이 앉아 있었다.

렉서스가 레니샤의 손목을 붙들어 자리에서 일으켰다.

제 품으로 레니샤를 끌어당긴 렉서스가 드러난 레니샤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레니샤가 눈살을 찌푸렸다.

역겨움에 숨을 고른 레니샤가 천천히 렉서스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카시우스를 자극하기 위해서 이런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니 당해주었으면 그만이다.

레니샤가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덮고는 뒤로 물러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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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무도 있지. 그러다 보니 자네를 잊고 있었어. 황후, 다시 자리에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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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카시우스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레니샤는 고고한 사람이다. 로테라의 자식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다.

긍지와 명예를 중요시하는……!

그런데 지금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했다.

좌중은 조용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레니샤가 당한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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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저렇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카시우스에게 렉서스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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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는 자네에게 상을 내려야겠지!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본디 이 전쟁은 로테라 가문이 이끌었지 않나! 로테라 공작위를 내리지. 자네는 이제 카시우스 로테라가 되는 거야!”

렉서스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렸다.

홉뜬 눈동자는 번들거리는 무언가로 젖어 있었다.

카시우스가 욕설을 속으로 짓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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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기쁘지 아니한가! 반역을 저지른 로테라 가문의 죄를 자네가 씻어주는 것이니 말이야!”

황제가 서 있는 카시우스에게로 걸어와 그의 두 어깨를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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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새끼가……!’

감히, 로테라를, 그의 우상을 더럽히는 황제를 더 이상 참아줄 필요가 있을지 생각할 때였다.

레니샤와 눈이 마주쳤다.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카시우스를 직시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이전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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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입니다, 폐하.’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전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 하기엔 지금의 분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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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굴어야지.’

레니샤가 턱을 괜 채로 생긋 미소 지었다.

대체 저 여자는 카시우스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말 잘 듣는 강아지?

카시우스가 사나운 눈빛을 황제에게로 돌렸다.

카시우스가 숨을 크게 들이켜자 그의 위협적인 몸이 꿈틀거렸다.

사람들은 카시우스가 황제를 후려칠 거라고 생각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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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입니다, 폐하.”

레니샤가 시키는 대로 착하게 굴어버렸다. 제기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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