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예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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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예쁘게
2022.05.03.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어도 맞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카시우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나는 경을 알고 있는 편인 것 같군.”
로테라 공작이 즐거워 보여서 레니샤도 편지를 읽으며 종종 미소 지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 옷을 선물한 것은 내 의지였지만, 받아들인 것은 경의 의지였어. 나는 내 아버지가 신뢰했었던 자네에게 도박을 걸어보려 해.”
“…….”
“내 혈육들이 살아 있어.”
레니샤가 느릿하고 작지만 확실한 어투로 내뱉었다.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레니샤가 말을 쏟아냈다.
“내 오빠와 그의 아내, 그리고 내 조카 이사벨라까지. 브릭스턴 로테라와 헤일린 노바 로테라. 그 사람들을 은밀하게 찾아주게. 렉서스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줘.”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글쎄.”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멀어지는 것이 순간적으로 아쉽다고 생각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차갑게 오시했다.
“내 비밀을 들었으니 목숨을 잃게 되겠지. 바로 이 자리에서.”
작은 몸으로 잘도 협박을 일삼는다.
레니샤가 잡았던 손목에 자국 하나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대담하게 하는 건지.
허세라면 정말 대단한 일이고 숨긴 수가 있다면…….
카시우스가 별 의미 없이 손목을 만지작거릴 때였다.
차가운 금속이 목에 느껴졌다.
카시우스가 날카로운 살기에 반응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카시우스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흉흉한 눈빛이 당장이라도 카시우스를 죽일 것 같았다.
“이런.”
카시우스가 신음처럼 말을 흘렸다.
방심했다. 아니면, 레니샤에게 홀렸거나.
이들이 가까워지는 것을 눈치도 채지 못하다니.
“내 아버지께서 내게 남겨주신 로테라의 정예 기사들이지. 경이 아무리 뛰어나다고는 하나 이들을 뚫고 무사히 나갈 수는 없을 거야.”
달콤한 꿀과 채찍을 한 번에 쓰는 여자였다. 제도 여자들은 다 이런가?
“내가 준 선물도 다 돌려받을 거야, 카시우스 경. 그러니 잘 선택해야겠지?”
옷을 홀딱 벗기겠다는 협박이었다.
카시우스가 웃고 있는 레니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카시우스가 제대로 사람을 본 거다.
레니샤는 화려하고 예쁘기만 한 꽃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무엇보다 날카로운 가시를 숨기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레니샤의 향기가 카시우스를 덮쳤다.
어차피 거절할 생각도 없는 제안이었다.
레니샤가 로테라의 딸인 이상, 카시우스는 그녀를 거역할 수 없었다.
도망쳐온 노예를 받아주고, 그의 출신을 소멸시켜준 은인의 딸이니 말이다.
로테라 공작은 카시우스가 이국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붉은 머리를 가졌군. 정말로 불타는 것처럼 붉은 머리야.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멸절한 이국의 왕족들이 자네와 같은…… 문신을 가졌다지?’
로테라 공작은 카시우스의 어깨에 새겨진 하샴의 표식을 알아보았다.
그것을 직접 지져 지워준 것이 로테라 공작이었다.
‘긍지는 그런 표식에 남는 게 아니네. 살아남아야 긍지도 있는 것이지. 위험한 요소는 배제하는 게 좋아. 이제 자네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노예 출신의 기사가 되었네.’
카시우스는 로테라 공작에게 많은 빚을 졌다.
이런 짓을 하지 않았어도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뜻을 따랐을 것이다.
“은밀하게 수소문해보겠습니다. 그분들을 찾아 제 목숨을 걸고 보호하겠습니다.”
“좋아.”
레니샤가 손짓했다.
그러자, 기사들이 검을 거두고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물러섰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가까워진 거리에 카시우스가 숨을 들이마셨다.
어쩜 이렇게 자유자재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거지?’
카시우스가 이를 까득 물었다.
레니샤가 나긋한 손길로 카시우스의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풀었던 단추를 잠그고 간신히 매달려 있던 보타이를 바르게 매주었다.
몸을 옥죄는 조끼와 재킷까지.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으로 돌려놓은 레니샤가 다시 한번 미소 지었다.
카시우스가 휘어지는 눈동자를 홀린 것처럼 응시했다.
달빛을 부숴 자아낸 것 같은 속눈썹 아래 둥근 분홍빛 눈동자가 사람의 마음을 흔들리게 했다.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왕 예쁘게 하고 왔는데 아깝잖아.”
“……예쁘게?”
“그래, 예쁘게. 경은 이런 옷이 참 잘 어울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뺨을 톡톡 쳤다.
그제야 카시우스가 제정신을 차렸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게. 내 사람이 경을 밖으로 안내해줄 거야.”
“잠깐. 드릴 말씀이……!”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카시우스 경. 우리 인연은 이게 끝이 아닐 거거든. 그 이야기는 다음에 듣도록 하지.”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서 떨어졌다.
신호가 왔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아. 힐로샤인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아무도 모르는 황금과 꿀, 그리고 신의 축복이 내린 땅이지.”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레니샤는 나타났던 것처럼 급작스럽게 사라졌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약 레니샤가 남기고 간 하녀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그러신가?”
“네?”
하녀가 길을 안내하다 놀란 얼굴로 반문했다.
“황후 폐하 말이야. 원래, 그렇게…….”
제멋대로?
아니면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카시우스가 잠시 멈칫했다.
레니샤를 형용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했다.
그 대신에 하녀가 답을 내놓았다.
“멋있으시죠! 아름다우시고, 똑똑하시고……. 그리고 박력 있으시고……. 저는 황후 폐하가 너무 좋아요!”
하녀가 순수하게 제 감상을 떠들어 댔다.
카시우스가 생각한 건 저렇게 가볍고 들뜬 감정들이 아니었다.
뭔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은 그런 묵직함. 그것이었는데…….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무슨 상관인가.
카시우스는 살아갈 수 있는 땅을 얻게 되었고 로테라 공작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을 기회도 잡았다.
전부 잘 되어 가고 있었다.
***
한바탕 카나리아와 뒹군 렉서스가 몸을 세워 나무에 기대앉았다.
고요함이 황제궁 정원에 내려앉아 있었다.
만찬은 만족스러웠다.
제가 바라는 대로 레니샤와 카시우스를 나란히 앉혀놓고 그녀를 모욕했다.
레니샤는 항상 그렇듯이 동요 없는 표정을 지었으나 그 속이 문드러졌을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지금 렉서스가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레니샤를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으니.
죽일 수 없으니, 이상하게 레니샤만큼은 죽일 수 없으니 스스로 그 목숨을 내려놓도록.
렉서스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레니샤는 태어남과 동시에 내내 고귀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레니샤가 황후의 자리에서 쫓겨나 카시우스와 힐로샤인으로 떠나는 꼴이 기대된다.
엉망으로 뒤틀려버린 감정들이 널을 뛰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런데…….
“너무 잘 어울린단 말이지.”
렉서스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단 한 가지였다.
카시우스와 나란히 앉아 있었던 레니샤는 퍽 괜찮아 보였다.
분명 극과 극처럼 다른 두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예에? 무슨 말씀이세요, 폐하?”
카나리아가 졸린 눈을 비비며 깔고 누운 렉서스의 옷에 고개를 파묻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 말이야. 잘 어울리지 않았느냐?”
“음……. 카니리아는 잘 모르겠어요. 하암, 이리 오세요, 폐하.”
물론, 레니샤에게 그 노예가 딱이었다고 이죽거리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언가 렉서스의 심기를 거스른 듯싶었다.
카나리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하곤 팔을 벌렸다.
황제의 정원에서 이렇게 누워 호사를 부릴 수 있는 건 이 제국에 카나리아뿐이다.
이 특권을 평생 누리고 싶었다. 그리고 지금도.
“추워요, 폐하. 카나리아를 이렇게 춥게 두실 건가요? 따뜻하게 해주세요.”
카나리아가 달콤한 목소리로 졸랐다.
렉서스가 고개를 돌려 제 자신을 드러낸 카나리아를 응시했다.
“너는 부끄러움도 없느냐?”
“카나리아에게 그런 게 있어야 하나요? 저는 폐하가 즐거우시면 좋아요.”
렉서스가 웃음을 흘렸다.
빤히 보이는 거짓말인데 그에 속아주고 싶을 정도로 달콤하다.
달콤한 것은 사람을 망치는 독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놓고 싶지 않았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그래. 너는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렴. 계속 말이야.”
카나리아가 속내를 숨긴 채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미소 지었다.
오늘은 완벽한 날이었다.
렉서스는 모두의 앞에서 레니샤를 망신 주었다.
로테라의 죄를 노예 따위가 씻어준다니!
박수를 치던 레니샤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 그 눈빛이라니.’
카나리아가 완벽했었던 오늘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를 흘리며 렉서스를 끌어안았다.
레니샤를 그런 꼴로 만들어준 렉서스라면 몇 번이고 안아줄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렉서스는 사랑스러운 연인이었다.
***
테리언이 말을 끌고 오며 묘한 눈으로 카시우스를 훑어보았다.
“왜 그런 눈빛으로 보나?”
“너무 멀쩡한 몰골이셔서요.”
“뭐?”
“이미 다 풀어헤치고 오실 줄 알았는데. 보타이 매실 때 표정이 정말 험악하셨거든요.”
카시우스가 헛기침을 했다.
물론, 카시우스는 만찬장에서 나오기 무섭게 보타이를 끌어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멀쩡한 꼴이실까.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보타이를 푸르면 목을 자르겠대요?”
“아니다.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을 텐데? 황제가 드디어 땅을 내렸거든.”
“예? 어딥니까! 작위는요?”
“공작위.”
“호오! 웬 일이랍니까! 황제가 미쳤대요? 아니지, 원래 미쳐 있는 사람인데?”
테리언이 호들갑을 떨었다.
“로테라 공작위를 내렸으니 진짜 미친놈은 맞지?”
“예에?”
테리언의 눈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입을 덜덜 떠는 테리언을 옆으로 밀어낸 카시우스가 말 위에 올라탔다.
여러 가지로 피곤해서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테리언이 얼떨떨한지 고개를 털어내고는 다른 말에 올라탔다.
테리언이 카시우스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황후께서는 뭐라고 안 하셨습니까? 로테라 공작위라니. 정말 황제가 돌아버리기라도 한 건지……. 하, 그래서 영지는 어디입니까?”
“힐로샤인.”
“네엑?”
“힐로샤인이라고 했다.”
“……망했다.”
“왜 그런 반응이지?”
“……힐로샤인에 대해서 모르십니까?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그 불모의 땅을 말입니다……! 우린 다 굶어죽게 생긴 거라고요. 황제는 미친 게 아니었네요. 버리려던 것만 모아서 던져줬으니까요!”
“글쎄.”
레니샤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레니샤가 그렇게 말했을 때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