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레니샤의 티파티 (12/135)


12화. 레니샤의 티파티
2022.05.10.


16548753337808.jpg

 
레니샤의 초대장이 카나리아에게도 도착했다.

카나리아가 사뿐사뿐 걸어 초대장을 들고 렉서스의 품으로 돌아왔다.

초대장을 펼친 카나리아의 눈가가 흐드러지게 휘었다.

16548753337814.png

‘황후가 내게 이런 애교를 부릴 때가 다 있네?’

황후도 정신을 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간 레니샤는 단 한 번도 카나리아를 공식적인 자리에 초대해준 적이 없었다.

카나리아의 주제를 알라는 듯이.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다.

처음으로 레니샤로부터 받아보는 초대장이었다.

16548753337814.png

‘쫓겨날 때가 되고, 내가 황성에 남게 될 테니까 걱정이 되긴 했나 봐? 하긴. 누가 봐도 다음 황후는 나잖아?’

카나리아가 씰룩이는 입가 위에 초대장을 올렸다.

그에 맞춰서 임신을 하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다.

아직 후계가 없는 렉서스다.

카나리아가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아무 반대도 없이 평탄하게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안달을 해도 여태까지 아무런 효험도 없다는 거지만.

16548753337814.png

‘정말로 황후 말대로……. 황제에게……?’

카나리아가 그런 의문을 품는 순간이었다.

렉서스가 그 생각을 알아차린 듯 초대장을 빼앗아갔다.

카나리아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렉서스 앞에서는 생각도 조심해야 하는데 실수할 뻔했다.

카나리아가 순진하게 눈을 파닥거렸다.

16548753337814.png

“폐하, 이리 주셔요. 처음으로 보내주신 초대장이란 말이에요.”

카나리아가 귀엽게 투정했다.

16548753337814.png

“처음으로 보내준 초대장? 레니샤가?”

16548753337814.png

“예. 드디어 황후께서도 저와 친하게 지내시려나 봐요. 그동안은 카나리아가 찾아가도 데면데면 하셨었거든요. 마음이 풀리셨나?”

카나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16548753337814.png

“폐하.”

카나리아가 초대장을 곱게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려 렉서스의 허벅지를 타고 앉았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갈색 머리카락을 손에 감았다.

16548753337814.png

“드레스 코드가 있대요. 게다가 파트너도 동행해야 한다네요? 카나리아를 위해서 새 드레스와 구두를 사주세요, 폐하.”

카나리아가 귀엽게 졸랐다.

사실 카나리아 스스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렉서스로부터 얻어낸 것들이 좀 더 힘을 가지기 마련이었다.

16548753337814.png

“좋아. 바라는 대로 해.”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16548753337814.png

“그리고 카나리아를 위해서 같이 가주세요. 저는 아는 이도 한 명 없는데. 이러다가는 파트너가 없어서 가지 못하게 생겼어요, 폐하.”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대답 없는 황제를 보며 카나리아가 작은 불안을 품었다.

16548753337814.png

‘왜 바로 대답하지 않는 거지? 설마……. 황후의 파트너로 가시려고?’

카나리아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렉서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렉서스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반드시 보내야 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황후와 부딪힐 자리를 계속 만들어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멋대로 황후를 폐위시키고 카시우스에게 던져줄 수도 있겠지만, 신전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감히 렉서스의 뜻에 반기를 드는 신전이 고깝기는 하나, 신전은 렉서스에게 도움이 되는 세력이었다.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고. 그러니 명분이 필요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와 사랑에 빠져 도덕적인 책임을 물어 내쫓는다는 명분.

렉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대단한 여자가 사랑을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렉서스는 그간 살면서 레니샤가 그 누구에게도 애정을 내비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레니샤가 고작 노예 따위를 사랑해서 폐위된다니.

레니샤의 일그러지는 표정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16548753337814.png

“나는 그날 바빠서 안 될 것 같군.”

16548753337814.png

“폐하……?”

16548753337814.png

“대신 다른 이를 붙여주지. 전에 만찬장에서 보았던 카시우스 경은 어떠하냐.”

16548753337814.png

“카시우스…… 경이요?”

카나리아가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16548753337814.png

“싫어요!”

16548753337814.png

“어째서?”

나른하게 풀어져 있지만 렉서스의 어투에 가시가 돋쳤다는 것을 카나리아도 알아차렸다.

자신의 뜻에 반기를 드는 것을 싫어하는 렉서스다.

카나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그날, 카시우스와 어울리던 황후를 보며 얼마나 즐거웠던가.

황후를 처음으로 발밑에 둔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의 파트너가 되라니?

곧 죽어도 싫었다.

사람들은 카시우스와 선 카나리아를 보면서 과거의 하녀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하녀에게 어울리는 건 노예라고 떠들어 댈지도 모른다.

하지만, 카나리아가 할 수 있는 말은 한마디였다.

16548753337814.png

“……저는 폐하와 가고 싶었단 말이에요. 질투해주세요, 폐하. 저를 사랑해주세요.”

카나리아가 달콤하게 졸랐다.

16548753337814.png

“카나리아가 다른 남자와 팔짱을 끼고 그곳에 가는 게 질투난다고 해주시면 안 돼요?”

렉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레니샤와는 다르게 나긋하게 휘어지는 카니라아가 마음에 든다.

정치에 손을 대고 렉서스를 기만하며, 로테라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한 레니샤와 달라서 좋았다.

카나리아가 조르는 것은 고작 이런 것뿐이다.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턱을 긁었다.

16548753337814.png

“귀여운 카나리아. 이번만큼은 내 뜻을 따라주렴. 다음에는 반드시 네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마.”

황제의 날카로움이 가신 것을 느끼며 카나리아가 긴장을 풀었다.

카나리아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까지도 카나리아의 자리는 위태롭다.

그것을 방금 전에 똑똑히 느꼈다.

16548753337814.png

‘황제의 아이……. 임신…….’

그 단어가 자꾸만 떠오른다.

그리고 레니샤가 심어놓은 불안의 싹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16548753337814.png

‘황제가 아이를 못 낳는 몸이라면…….’

카나리아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총애가 떨어지고 아름다움을 잃고 나면 카나리아는 더 이상 렉서스 곁에 머물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하녀로 돌아가는 건 죽어도 싫었다.

카나리아가 그날 어떤 생각을 마음에 품었는지는 그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


16548753402657.png

“……소공작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16548753402662.png

“그럴 만도 하지. 그러니 황제도 찾지 못하고 애를 먹고 있는 것 아니겠나.”

로테라 공작 부부가 죽고 황제가 한 일은 제도에 있는 로테라 공작가를 기습하여 척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보낸 이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소공작 부부와 아이가 사라진 이후였다.

브릭스턴 로테라.

헤일린 노바 로테라.

마지막으로 이사벨라 로테라까지.

아이의 나이는 13살 정도로 추정되며 여자아이로 알려져 있었다.

아이는 아비에게서 물려받은 백금발에 분홍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눈에 띄는 외양을 가진 여자아이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소공작 부부는 공작저에서부터 행적이 끊겼다.

16548753402657.png

“하늘로 솟은 건지. 그게 아니면 땅으로 꺼진 건지. 처음부터 밖으로 빠져나온 흔적이 없습니다.”

16548753402662.png

“아이는?”

16548753402657.png

“눈치를 챈 것인지 밖으로 빼돌리긴 하였으나……. 아이의 행적 또한 남부 지방의 브뢰르 영지를 넘는 순간 사라졌습니다.”

카시우스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레니샤는 옷에 대한 값으로 그녀의 가족을 찾아오라고 말했다.

이것이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시험하는 것임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레니샤는…….

그 말을 할 때의 레니샤는…….

카시우스가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어떤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여자가 찰나에 보였던 무너진 표정을 카시우스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레니샤는 웃고 있었지만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간절함이었다.

가족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들을 찾아 헤매는 자의 간절함.

16548753402662.png

“꼭 찾아야 해.”

16548753402657.png

“알겠습니다. 좀 더 수소문해보겠습니다.”

16548753402662.png

“우리의 동료들이 전국에 퍼져 있지 않나. 그들을 연결해서 거미줄처럼 진을 치고 기다리다 보면 분명 걸리는 것이 있겠지.”

테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48753402657.png

“그런데요, 경.”

16548753402662.png

“왜?”

16548753402657.png

“이상한 초대장이 도착해서요. 이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제가 직접 가져왔습니다.”

테리언이 손에 들고 있던 옅은 핑크색의 화려한 초대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눈이 찌푸려질 정도의 과한 화려함이었다.

테리언이 몸서리를 치면서 초대장을 직접 뒤집어주었다.

16548753402657.png

“이 여자가 왜 경을 초대하는 겁니까? 그것도 황후 페하의 티파티에 동행 자격으로 말입니다. 설마 그곳에서 이 여자와 엮일 일이 있었던 겁니까?”

16548753402662.png

“…….”

카시우스가 초대장을 노려보았다.

엮일 일? 있었긴 했지.

자꾸 헛소리를 하길래 쏘아붙여줬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그 이후로는 그를 무시하지 않았던가.

카시우스도 아는 역사를 황제의 정부라는 여자가 모르는 게 한심해 보였었는데.

16548753402657.png

“경을 독살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표독스러워 보였으니 가능성 있는 일이다.

16548753402657.png

“그게 아니면……. 아! 혹시 경에게 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로 아니었다. 황제에게 교태를 부리던 모습을 보면…….

16548753402657.png

“혹시 여지를 주셨습니까? 설마 이 여자한테요? 그러시면 안 되는 겁니다, 경. 로테라 공작의 은혜를 잊으신 건…….”

16548753402662.png

“시끄러워!”

카시우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 테리언 덕분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16548753402657.png

“제가 뭘 했다고 소리를 지르시고…….”

테리언이 투덜거렸다.

16548753402657.png

“어차피 가야 하는 자리일 겁니다. 황제의 정부가 하는 초대라니.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황제가 개입되어 있을 확률이 천 중의 천일 겁니다.”

카시우스도 동의했다.

대체 렉서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보기 싫으면 줄 거 주고 치워버리면 그뿐일 텐데.

공식적인 작위 수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나저나.

16548753402662.png

‘티파티?’

레니샤가 주최하는 것이니 그곳에 레니샤도 참석할 것이다.

레니샤는 매번 만날 때마다 카시우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각인되곤 했다.

얼마 전에 레니샤가 짚었던 가슴 위에 화인이 새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작디작은 손바닥 모양으로.

그 여운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또 레니샤를 만날 생각을 하니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대체 로테라 공작은 무엇을 키워낸 건지.

황성에서 가장 위험한 것을 꼽으라면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뽑을 자신이 있었다.

16548753402662.png

“하아…….”

이번에도 주어진 시간은 고작 3일이다.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의 시선이 초대장에 머물렀다.

천천히 초대장 내용을 확인하던 카시우스가 멈칫했다.

16548753402662.png

“파란색 드레스 코드? 파란 정장이라도 입으라는 건가? 내가 그런 게 어딨어! 게다가 빨간 머리카락에 푸른색 정장이라니.”

카시우스의 말에 잠시 상상을 해본 테리언이 광소를 터뜨렸다.

16548753402657.png

“이야……. 정말 제도의 패션 세계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카시우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기랄, 파란 정장은 또 어디서 찾지? 다들 정말 그런 걸 입는단 말인가?

정신 나간 작자들인 게 틀림없었다.

***

테샤가 숨을 죽이고 복도를 살금살금 걸었다.

카시우스의 집무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오고 나서야 테샤가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푹 숙인 채로 테샤가 방금 들은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16548753463082.jpg

16548753463086.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