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야
(16/135)
16화.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야
(16/135)
16화. 그대를 만나서 다행이야
2022.05.24.
“절대로 폐하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전해달라셨습니다. 이 또한 폐하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평소에 다정하게라도 굴어볼 걸 그랬다고. 폐하께서 웃는 얼굴이 얼마나 예쁜지 말씀하셨고, 그 미소를 그리워하셨습니다.”
수십 번을 되뇐 말들이었다.
레니샤를 만나게 된다면 반드시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홀로 품고 있었던 로테라 공작의 마지막을, 레니샤에게.
카시우스의 묵직한 말이 끝났을 때, 그는 상상도 못했던 것을 목격했다.
투둑.
조용히, 레니샤는 정물처럼 울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무표정했으나 붉은 입술은 가늘어진 채로 떨리고 있었다.
항상 여유를 머금고 있던 분홍색 눈은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아래로 휘었다.
희디흰 뺨을 지난 눈물이 턱을 타고 톡 하고 떨어졌다.
몇 번이나 반복되는 그 광경을 카시우스가 숨을 멈춘 채로 응시했다.
레니샤는 황후였다.
카시우스보다 훨씬 위에 서 있는 자였고, 멀고 먼 사람이었다.
황제만큼이나 속 모를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로테라 공작의 죽음 앞에서도 태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 레니샤답게 ‘그러셨군. 고맙네, 카시우스 경.’ 그런 빤한 대답이나 할 줄 알았다.
이건 정말로 상상도 못한 장면이었다.
멍하니 카시우스에게 시선을 둔 채로 우는 레니샤라니.
“더, 더 말해보게.”
레니샤가 어린아이처럼 졸랐다.
“아버지께서, 어머니께서……. 또 어떤 말을 하셨지? 그분들의 마지막을 알고 싶어.”
레니샤가 보채듯이 말하며 카시우스에게 몸을 붙였다.
카시우스가 입술을 욱여 물었다.
이런 순간에도, 쓰레기 같게, 다른 생각을 하고 만 것이다.
레니샤의 드러난 어깨가 카시우스를 혼란스럽게 했다.
카시우스의 가슴이 부풀었다. 숨을 잔뜩 들이마신 탓이었다.
카시우스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초연하게 가셨습니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셨습니다. 폐하를 위해서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폐하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레니샤가 떨리는 입술을 벌려 긴 숨을 내쉬었다.
8년을 보지 못한 부모님이다.
그런 부모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고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
황제의 압박에 몰려 그분들이 허망하게 가는 것을 먼 곳에서나 지켜볼 수 있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팔을 움켜쥐었다.
제가 무엇을 쥐고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니……! 아버지…….’
레니샤를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가셨다고. 아무것도 아깝지 않다고 하셨다고.
레니샤가 과거 쓸데없는 연민으로 렉서스라는 괴물을 저택에 들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 일을 초래한 것은 레니샤였다.
쫓기던 황자를 황제로 올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뒤쫓던 살수들이 황자가 어디로 들어갔는지 본 탓이다.
황자의 정적들은 로테라가 그를 택했다고 생각했다.
레니샤의 실수가 로테라를 렉서스에게로 내몬 것이다.
그날을, 죽도록 후회한다.
“흐…….”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레니샤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몸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이며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 안으로 쏟아졌다.
카시우스가 눈을 홉뜬 채로 제 품의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레니샤의 어깨는 생각보다 작았다. 카시우스의 품 안에 쏙 들어올 정도로.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가슴께에 고개를 기대고 있었다.
생명줄처럼 붙든 손의 악력이 가엾다.
카시우스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죄송해요, 아버지…….”
너무 작아 가깝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했을 목소리였다.
“제가 잘못했어요.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레니샤가 중얼거렸다.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와 함께 흐느낌이 뒤따랐다.
죽어야 하는 건 그분들이 아니라 레니샤였다.
공작이 레니샤를 황후로 만든 것은 렉서스의 광기를 알아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니샤라도 살리기 위해서.
그 시절 레니샤는 오만함에 젖어 있었다.
로테라 가문의 공녀로 태어나 무엇 하나 잃어본 적 없었던 삶이었다.
황자를 들이는 문제도 가볍게 생각했다.
오만하고 철없던 소녀는 누군가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에 도취되어 있었다.
스스로가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랬던 레니샤가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레니샤가 이곳에서 좋은 것을 먹고 부드러운 옷을 입고 지내는 동안 로테라 공작 부부는 삶의 경계를 오가는 전쟁터에서 8년을 보내야 했다.
“흐으……. 어머니, 아버지……. 제발, 제가……. 제가 잘못했으니……. 돌아오세요. 제발……!”
그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진심들이 두서없이 터져 나왔다.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따뜻한 그 품을 다시 느껴볼 수 있기를 매일 밤 기도했다.
미친 황제가 정신 차려 그녀의 부모님을 지옥에서 꺼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레니샤만을 남겨둔 채로.
어린 짐승처럼 눈물을 터뜨리는 레니샤를 카시우스는 말없이 내버려 두었다.
‘……잘도 버텼군.’
카시우스에게 전해질 정도로 깊은 감정이었다.
머뭇거리던 카시우스의 손이 레니샤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왠지 코끝이 시큰거렸다.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히엔트리의 침략 앞에서 무력했던 하샴은 카시우스를 방계 왕족으로 위장하여 밖으로 내보냈었다.
하샴이 온몸으로 막아선 뒤를 도망쳐 살아남은 것이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그날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카시우스가 가만, 가만히 레니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투르기 짝이 없는 위로였다.
이 말들을 레니샤에게 전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무거워져버렸다.
그건 아마도 가슴팍에 기댄 레니샤의 고개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레니샤의 온실을 찾은 것은 충동이었다.
카나리아가 전하길 레니샤는 카시우스와 퍽 잘 어울렸단다.
드레스코드에 대한 이야기와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는 이야기까지.
거기에 카시우스를 남겼다는 이야기까지 듣다가 일어나 오는 길이었다.
왜 그 순간 자리를 박차고 나왔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할 일이었다.
렉서스의 무거운 시선이 온실을 향했다.
가까워질수록 내부가 선명해졌다. 온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렉서스가 눈을 부릅떴다.
카시우스의 품에 안겨 있는 레니샤가 보였다.
“하!”
렉서스가 입을 벌려 날카로운 숨을 토해냈다.
“너도 별반 다를 것 없는 계집이었군!”
날 선 비난도 튀어나왔다.
렉서스를 경멸하던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러나, 카시우스에게 넘어간 것은 레니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게 고고한 척 고개를 치켜들고 다니더니, 레니샤 또한 똑같은 인간이었던 거다.
렉서스가 비릿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단전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 분노가 렉서스의 눈앞을 빨갛게 물들였다.
주먹을 움켜 쥔 렉서스의 심장이 거친 소리를 내며 뛰었다.
레니샤가 단 한 번이라도 저렇게 순순히 군 적이 있었던가.
렉서스를 밀어내던 손길만 기억났다.
“저 노예 새끼가 뭐가 좋다고! 하여튼 취향 한번 고상하시지!”
카시우스와 레니샤를 찢어놓고 싶었다.
멀끔한 모습을 하고 있는 카시우스를 진창에 박아주면 레니샤도 저 품에서 떨어져 나올 것 아닌가.
하지만…….
“그래선 안 되지.”
렉서스가 미친 것처럼 웃음을 흘렸다.
이것이야말로 렉서스가 바라던 바가 아닌가!
모든 감정을 눌러 참고 몸을 돌리는 렉서스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제가 소중하게 숨기고 있었던 것을 빼앗긴 어린아이처럼.
***
한참을 기대 있던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가가 발간 레니샤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
카시우스의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평소랑 다르게 달아오른 얼굴이, 그리고 달뜬 숨결이 카시우스를 자극하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눈을 피했다.
“……추태를 부렸군.”
볼을 붉힌 레니샤가 카시우스로부터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속에 들어 있던 것들이 터지듯이 쏟아져 나와서인지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레니샤가 제자리를 서성거렸다.
“……고맙네. 내 부모님의 마지막을 전해줘서. 그분들의 끝을 알게 해줘서 말이야.”
레니샤가 한참 후에 꺼낸 말은 그것이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보았다.
빛을 등진 레니샤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경이 아니었으면 나는 좀 더 오래도록 악몽에 시달렸겠지.”
“악몽?”
“……그래, 악몽. 그분들이 돌아가신 이후로 매일같이 꿈을 꿔. 꿈속에서 부모님은 나를 원망하며 죽어가지. 나는 죽지 말라고, 내가 잘못했다고 빌다가 눈을 떠.”
레니샤가 심호흡을 했다.
“정말로 고마워. 내 부모님이 그런 분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내 죄책감이 그분들을 악몽으로 몰아넣었어.”
“……오늘은 주무실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카시우스가 조용히 물었다.
레니샤가 유독 희고 말랐던 이유는 저것인가 보다.
악몽.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니 어쩔 수 없었던 거지.
카시우스가 제 몸의 반이나 될까 싶은 레니샤를 이해했다.
밤에 잠을 잘 잘 수 있게 되면 지금보다는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핏기도 되찾을지 모른다.
로테라 공작도 그것을 바라겠지.
“아마도. 아주 오랜만에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레니샤가 발간 눈으로 생긋 미소 지었다.
빛을 뒤에 두고 있어 희끗해진 그 미소를 카시우스는 꽤 오랫동안 응시했다.
레니샤는 빛으로 빚어진 사람 같았다. 손을 대면 흩어져 버릴 것 같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라고만 여겨졌었던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곁으로 내려섰다.
카시우스의 가슴을 짚었던, 그날의 위압감은 어디로 간 것인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저 작고 여린 여자를 렉서스는 무슨 이유로 그렇게 미워하고 막 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미친 새끼.’
카시우스가 렉서스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짐승보다 못한 그놈으로부터 레니샤를 빼내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이 거대한 황성에서 레니샤를 훔쳐 달아나는 거다.
로테라 공작 부부가 목숨을 바쳐 구한 레니샤였다.
카시우스라면 렉서스보다는 레니샤를 좀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카시우스가 화들짝 놀랐다.
‘너도 미쳤구나, 카시우스.’
아무래도 렉서스에게서 광견병이라도 옮은 모양이다.
카시우스가 작게 혀를 찼다.
스스로를 다잡는데 레니샤가 이어 말했다.
“경. 그대를 만나서 정말로 다행이야.”
빌어먹을. 이 개자식.
렉서스에게 광견병이 옮은 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레니샤가 저 말을 했다고 심장이 이렇게 뛰고 열이 치솟을 리 없었다.
이래서 미친놈 곁엔 얼씬도 하는 게 아닌데.
카시우스가 한참을 그렇게 레니샤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