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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지나치게 가까워 (21/135)


21화. 지나치게 가까워
202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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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는 레니샤를 무시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는 것도 잊을 뻔했으니 정신을 단단히 차릴 필요가 있었다.

아무래도 레니샤 황후는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카시우스가 목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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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어서 급하게 찾아뵈었습니다, 황후 폐하.”

최대한 공적이고 사무적이게 말했다.

레니샤와는 적정거리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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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해.’

저 위험한 여자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것이다.

카시우스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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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안 되는 이야기?”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긴 속눈썹이 팔랑거리며 움직였다.

카시우스가 다시 홀릴 뻔한 정신을 다잡았다.

전에는 달의 요정처럼 신비롭더니 지금은 햇빛에 녹아들기라도 한 것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상한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카시우스가 눈을 돌리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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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황제 폐하께서 무엄한 생각을 하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카시우스는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지난 이틀 동안 고민을 거듭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달려온 길이었다.

레니샤만큼 카시우스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교계가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라는 걸 카시우스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카시우스가 그나마 친분이랄 게 있는 이는 레니샤와 투리엘뿐이었으니 말이다.

레니샤와는 로테라 공작이라는 공통분모도 있으니 좀 더 답을 얻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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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말해도 돼. 딱딱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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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저와 페하를 결혼시키려 한다는데, 이게 진실입니까?”

카시우스가 얼른 레니샤의 말을 끊고는 빠르게 말했다.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행히 그 말은 레니샤에게 닿은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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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레니샤가 장난기를 거둬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금세 시골 촌부처럼 수수하고 청초했던 레니샤는 화려한 정점에 선 지배자가 되었다.

레니샤가 오만한 눈빛을 카시우스에게 던졌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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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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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많은 것이 변할 거야. 그건 경의 지위도 마찬가지지. 경은 그간 책임지지 않아도 됐었던 것들을 책임지게 될 것이고, 새로운 권리와 의무를 가지게 될 거야.”

레니샤가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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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지.”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레니샤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왠지 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렉서스라면 충분히 할 만한 짓거리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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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황후를 저렇게 대하지 않아.’

그가 몰래 품었던 생각을 들킨 것 같은 부끄러움이 짓쳐 들었다.

레니샤의 어깨는 작았다.

황후라고만 생각했을 때는 커 보였던 어깨였다.

하지만, 레니샤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인간이었고, 그와 같은 온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레니샤가 작아 보인다.

카시우스의 품도 다 채우지 못할 정도로 작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레니샤도 고독하고 외로워 보일 뿐이었다.

카시우스가 저도 모르게 뻗어져 나가려는 손을 억눌렀다.

괜히 뒷짐을 지고는 헛기침을 했다.

제 발칙함을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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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께서 어떤 생각을 하시고 어떤 결정을 내리실지는 그분의 마음이지.”

레니샤의 음성에는 비웃음이 스며들어 있었다.

별안간 레니샤가 걸음을 멈췄다.

그녀에게 부딪힐 뻔한 카시우스가 중심을 잡고 한 걸음 물러서려는 사이 레니샤에게 붙들렸다.

몸을 돌리고 가까이에 선 레니샤가 그의 옷을 붙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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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경의 말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 텐가?”

레니샤가 너무 가깝다. 호흡이 다시 달떴다.

카시우스가 침을 삼켰다.

카시우스의 동요와는 달리 레니샤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재차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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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이곳에서 데리고 도망쳐주겠는가?”

카시우스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레니샤의 속 안에서 두려움에 움츠리고 있는 작은 아이를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레니샤가 황후가 된 것은 8년 전의 일이다.

그때 레니샤는 아직 부모의 품이 더 가까웠어야 할 어린 소녀였다.

그 소녀가 레니샤 안에 있었다.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분홍빛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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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데려가 주겠는가?”

카시우스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답을 얻었다.

황후는 카시우스와 결혼하여 그와 힐로샤인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타의에 의해서…….

카시우스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레니샤는 어떠냐고.

이 결정에 레니샤의 의지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카시우스는 안도하는 레니샤를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레니샤는 이 갑갑하고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였다.

카시우스가 그 무게를 더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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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가 드리겠습니다.”

카시우스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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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지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레니샤가 아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이거면 됐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렉서스가 발코니에 기대선 채로 술잔을 입가에 기울였다.

렉서스의 싸늘한 시선은 정원을 향해 있었다.

황성의 정원사가 공을 들여 가꿔놓은 아름다운 정원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렉서스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정원에 있는 이들이었다.

햇빛에 부서지는 백금발에 강렬하게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

레니샤와 카시우스다.

렉서스가 느리게 술잔을 비웠다.

처음에는 레니샤 혼자 있었다.

그러다가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레니샤가 웃었다.

렉서스는 레니샤를 알아온 세월 동안 그녀가 그렇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입안이 말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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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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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폐하.”

헨리가 노련하게 렉서스의 시중을 들었다.

잠시 뒤, 빈 술잔에는 호박빛의 액체가 다시 채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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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그리 보십니까.”

헨리가 괜스레 질문을 던졌다.

왠지 지금의 렉서스가 위태로워 보였던 탓이었다.

항상 기행을 일삼는 렉서스다.

지금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 두려움이 앞섰다.

헨리의 질문에도 렉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밖만 보고 있었다.

잔에 든 얼음으로 인해 술잔에 물기가 서렸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훑어낸 렉서스가 술잔을 움켜쥐었다.

렉서스에게서는 광포한 어떤 감정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곁에 서 있는 헨리를 두렵게 만들 정도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렉서스는 정작 아무 생각도 없는 것처럼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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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각.

술잔 속의 얼음이 움직이는 소리가 정적을 일깨웠다.

렉서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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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가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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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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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가깝다고.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야.”

렉서스가 묘한 보랏빛 눈동자를 돌려 헨리를 응시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빛이었다.

지난 밤, 렉서스가 레니샤의 침실에 들었을 때 그녀는 어땠던가.

목석도 그것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온몸으로 렉서스를 거부하는 얼굴을 보았을 때는 참지 못하고 레니샤를 찢어놓을 뻔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다.

렉서스의 의도대로 손만 뻗어져 나갔다면.

레니샤 앞에서는 왜 무엇도 그의 뜻대로 되지 않는지 모르겠다.

역시, 레니샤를 눈앞에서 치워야 한다.

지난 세월 동안 레니샤는 단 한 번도 렉서스를 고분고분히 받아준 적이 없었다.

둘 모두에게 치욕스러웠던 첫날밤에도.

카시우스와 레니샤의 사이가 지나치게 가까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체 무슨 대화를 하겠다고 저렇게 가까이 서 있는 건지.

렉서스와는 가까이 있는 것조차 싫어하던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는 달랐다.

온실에서도, 지금도.

달칵.

렉서스의 움직임에 따라 술잔 안의 얼음이 소리를 냈다.

헨리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움직이는 렉서스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헨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렉서스가 제 손으로 빈 술잔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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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사람 마음은 알 수가 없어. 가장 귀한 것을 쥐여 줘도 외면하던 계집이 가장 미천한 것에 눈을 돌리는 마음도 알 수가 없지.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헨리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헨리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렉서스가 발코니 문을 닫았다.

헨리는 그 행동에 은은한 분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황제가 보고 있던 자리에 황후와 카시우스가 있었다는 것을 헨리는 후에 알 수 있었다.

렉서스의 마음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헨리는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렉서스는 황후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

황후의 보석과 황후에게 진상되었어야 했을 샴디르의 원단.

그것들이 카나리아의 자부심이 되어 주었다.

오늘은 렉서스의 등극을 축하하는 기념일이었다.

아무런 작위도 없이 이 거대한 홀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카나리아뿐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이제 마지막이다.

레니샤가 떠나고 나면 카나리아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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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반드시 아이를 가져야 하네. 내 말 알아듣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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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얼굴도 가리고 급하게 치렀던 지난 밤들이 카나리아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바바라는 잘도 어리숙한 남자를 구해왔다.

남자는 카나리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돈만 받고 돌아갔다.

카나리아의 시중을 드는 이가 오로지 바바라 한 명뿐이라는 것도 도움이 되었다.

카나리아는 아무도 몰래 황성을 빠져나갔다가 아무도 몰래 돌아왔다.

황성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카나리아다.

그녀가 두, 세 시간쯤 황성을 비워도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황제는 제 내킬 때만 카나리아를 찾았다.

요새는 등극 기념일을 준비하느라 황제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각국의 사신단을 맞이하고 축제와 연회를 준비해야 했다.

귀한 손님들은 황성 내의 객실에서 머물게 되었다.

황후인 레니샤가 그들의 방을 준비했다.

곧 있으면 그 일도 카나리아의 차지가 될 것이다.

당당하게 황성의 안주인이 되는 거였다.

그날을 생각하면 카나리아의 몸을 더듬던 더러운 손길도 잊을 수 있었다.

카나리아가 아랫배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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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안에…….’

반드시 아이가 자라고 있어야 한다.

카나리아는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진 참이었다.

그런 놈에게 몸을 내어주지 않았나.

오늘은 반드시 렉서스를 침실로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카나리아가 드러난 가슴팍 위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바바라는 오늘만큼은 카나리아가 가장 아름다울 거라고 장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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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다 잘될 거야.’

아무렴. 카나리아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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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게.”

시종이 부루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상 황성에서 일하는 시종조차도 카나리아보다 신분이 높았다.

카나리아가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특히 지금은. 카나리아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연회에 참석해야 했다.

미적거리던 시종이 문을 열고 큰 소리로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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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나리아 부인 드십니다!”

환한 빛이 카나리아를 맞이했다.

그 빛은 카나리아를 높은 곳으로 인도해줄 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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