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옷을 선물하는 의미 (24/135)


24화. 옷을 선물하는 의미
2022.06.21.



 
카시우스가 기계적으로 움직여서 레니샤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키는 대로 앉기는 했는데 동상이라도 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레니샤는 제 방만한 자세를 고칠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고개만 돌려 카시우스를 보았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은밀한 무언가가 비치는 듯했다.

카시우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천장에는 히엔트리 제국의 신화가 그림으로 새겨져 있었다.

천장의 무늬가 몇 개인지 전부 셀 수 있을 듯했다.


“경. 옷을 선물하는 의미에 대해서 알고 있나?”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 저런 말이나 하는 레니샤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저 무방비함도. 아니, 카시우스가 남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는 건가?

괜히 울컥할 지경이었다.


“네 옷을 벗기고 싶다는 의미라고들 하지.”

“컥!”

레니샤가 한 말을 곱씹던 카시우스가 사레가 들렸다.

격렬한 기침을 하는 카시우스의 얼굴이 새빨갛게 무르익었다.

제가 들은 말이 무엇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쳐다보았다.


‘내 귀가 미친 모양이군. 역시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

레니샤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어 카시우스의 생각을 끊었다.


“물론 연인들 사이에 말이야. 우리는 연인이 아니라 다행이지.”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홉뜬 눈으로 응시했다.


“연인이었다면 지금 당장 경의 옷을 벗기려고 달려들었을지도 몰라.”

“큽!”

카시우스가 제 옷깃을 여미고 소파에 몸을 붙였다.

레니샤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카시우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잘 어울린다는 뜻이야, 카시우스.”

레니샤가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카시우스는 생각했다.


‘정말 위험한 여자야. 위험하다고!!!’

 

***

오늘 카나리아는 렉서스를 제 침실로 초대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의 침실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언질도 받았다.

공식석상에서 레니샤에게 다정한 척 입을 맞추는 모습으로 카나리아의 속을 뒤집더니.

그건 다 오늘 밤을 위한 큰 그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각국의 사신들이 모여 있는 시기였다.

황제는 공식석상에서 황후와 다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날 밤, 레니샤가 황제의 침실에서 그런 일을 벌인다면?

황제는 황후를 내린다느니 미친 소리를 할 수 있지만, 황후는 그럴 수 없었다.

모든 추문은 레니샤가 뒤집어쓸 것이 자명했다.

하필 황제의 침실이어야 했던 이유도 명확했다.

이 제국에서 밖에서 잠글 수 있는 침실은 황제의 침실이 유일했으니 말이다.

황제에게는 사생활이 허락되지 않는다.

황제의 모든 것은 진열되어 사람들에게 내보여야 했다.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해서 항상 밖에서 열 수 있어야 했다.

그나마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만든 것은 렉서스의 기행 중 하나였다.

황제는 그가 침실 안에 들면 밖에서 문을 잠그도록 했다.

덕분에 카나리아의 침실도 밖에서 잠글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지금 황제의 침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폐하께서 이렇게 곁에 있어주시니 그렇습니다. 그간 바쁘셔서 카나리아는 생각도 안 하신 거지요?”

카나리아가 재빨리 생각을 털어내고 말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사랑스럽게 속삭였다.

렉서스가 피식 웃으며 제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는 카나리아의 입술에 진득하게 키스했다.

얽히는 숨결이 다디달다.

레니샤에게 입을 맞출 땐 얼음덩이를 삼키는 기분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카나리아가 신음을 흘리며 렉서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폐하, 황제 폐하…….”

카나리아가 달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렉서스.”

렉서스의 품 안에서 지난밤들의 흔적을 전부 지워내고 싶었다.

그 미천한 놈과 몸을 섞은 흔적을 말이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렉서스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카나리아에겐 아이가 필요하다.

살짝 뜬 카나리아의 눈이 욕심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레니샤는 노예 기사와 함께 황성을 떠나게 될 것이다.


‘빈자리는 반드시 내 거야.’

그간 카나리아를 무시하고 박대하던 자들에게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것이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어깨를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오늘은 달빛도 강하고 카나리아의 몸도 준비를 마친 날이었다.

이런 날은 임신을 하기 쉽다나?

그러니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카나리아가 눈을 빛냈다.

황후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건 카나리아다.

카나리아가 속살거린 말들이 황제의 의심에 부채질을 했다.

로테라 공작 부부를 죽음으로 내몬 것도 카나리아였다.

아이가 없음에도 오랜 시간 황제의 비위를 맞춰주며 황실에서 살아남은 카나리아!

카나리아는 마땅한 대가를 바랄 뿐이었다.

카나리아와 렉서스가 덩굴처럼 엉켜들었다.

이왕이면 카나리아가 잉태할 아이가 렉서스의 아이였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카나리아가 렉서스를 품었다.

***



“자, 잘 어울린다고 하시니 다행입니다.”

“셔츠는 좀 더 큰 게 좋겠어.”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가슴을 응시하며 말했다.


“경이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셔츠가 버거워 보이는군.”

카시우스가 숨을 삼켰다. 셔츠가 비명을 지를 것처럼 팽창했다.

그야, 당연했다.

지금 레니샤는 당황스러운 말들을 일삼으며 카시우스를 흥분시키고 있었고.

카시우스는 몸집을 부풀려 포식자에게 겁을 주는 피식자처럼 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기가 막힌 상황 속에서 가장 보기 좋은 것은 역시 카시우스였다.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카시우스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부분이 있었다.

레니샤가 한숨 같은 미소를 흘렸다.

렉서스의 방식은 역시 끝까지 지저분하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던 미련이 다시 한번 소멸하는 느낌이었다.

기형적이었던 공방이 이제야 끝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는 다시 정의될 것이다.

레니샤는 가장 날카로운 검을 빼들어 렉서스를 겨눌 테니.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카시우스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바르고 순수한 청년에게.

레니샤가 테이블 위의 다 식어빠진 차를 힐끗 보았다.

그때 온실에서도 카시우스는 찻잔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었다.


“차를 좋아해?”

레니샤가 고압적인 태도를 배제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눈짓에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보았다.

차? 그간 카시우스가 마신 차라고는…….

테샤가 무언가를 흉내내서 만든 독극물이 전부였다.


“한번 마셔봐. 이 차는 특히 향이 괜찮거든. 렉서스가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지. 황제 궁에서도 가장 비싼 것으로 내놓았어.”

카시우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레니샤의 지금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카시우스가 아니더라도 레니샤의 지금은 엉망일 테니 말이다.

카시우스가 어색한 손짓으로 찻잔을 쥐었다.

레니샤가 권한 것이니 독극물이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카시우스가 찻잔에 입을 댔다. 눈을 질끈 감고 그것을 입 안에 쏟아 넣었다.

화아.

부드럽게 사르르 퍼져 나가는 향기에 카시우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음?”

“차라는 건 마실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카시우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지금 제 저택에는 제대로 된 사용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차를 내려주곤 하는데…… 이런 맛이 아니었습니다.”

“심부름을 하는 아이?”

“네. 테샤라고 밤톨 같은 머리를 가진 남자아이가 있습니다.”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지금 카시우스와 단둘이 남았다.

이사벨라에 대해서 묻는 게 좋을까?

아니, 아니다. 지금도 듣는 귀가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해야 할 때였다.

레니샤가 갑자기 찾아든 갈증에 차를 마시곤 말했다.


“이름이 사랑스럽군. 여아의 이름이야.”

“사실 테샤는 전쟁터에서 만난 아이인데 당시 독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부상도 심했고요. 간신히 의사가 살려내기는 했지만, 기억을 잃었습니다.”

“저런.”

“테샤를 살려낸 의사가 지어준 이름입니다. 죽은 손녀의 이름이라고 하더군요. 그곳에 아이를 둘 수가 없어서 데리고 왔습니다만. 테샤의 가족을 찾거나, 테샤가 하고 싶은 게 있다고 하면 보내줄 생각입니다.”

카시우스가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테샤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다행히 레니샤도 이 주제가 마음에 드는 듯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찾아냈다.


“그런데 차는 정말로 못 끓입니다.”

“……내게도 차를 못 끓이는 조카가 있었지. 그 애도 그랬어. 차를 직접 끓여보고 싶다고 졸라서 가르쳐줬더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들을 만들어내곤 했었지.”

레니샤가 입술을 가느다랗게 휘어 올렸다.


“그 애가 보고 싶군.”

그 순간 카시우스와 레니샤의 눈이 마주쳤다.

카시우스가 침을 삼켰다.

순간 레니샤에게 카시우스가 보냈다던 선물이 떠오른 건 무슨 이유일까.

저택에서 수상하게 굴었던 것은 테샤가 유일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카시우스는 테샤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었다.

아직 어린아이가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으니 함부로 무엇을 묻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 아이가 레니샤에게 접근할 이유라면…….

그 아이가 이사벨라와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이사벨라 본인이거나.

거기까지 유추해낸 카시우스의 머릿속에 굉음이 울렸다.


“……조카에 대해 더 듣고 싶습니다. 어떤 아이였습니까?”

“나와 같은 백금발을 가진 아이였지. 오빠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똑 닮았었어.”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카시우스는 어떤 동요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아이의 눈동자가 좀 더 사랑스러운 분홍빛이었다는 것만 빼면.”

분홍색. 테샤의 눈동자는 옅은 회색이었다.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마주한 카시우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섣부른 말로 레니샤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설탕가루를 뿌린 달콤한 과자처럼 생긴 여자였다.

레니샤가 우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레니샤가 눈물을 터뜨릴까 무섭다. 카시우스가 말을 돌렸다.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면 우린 어떻게 되는 겁니까?”

카시우스가 정말 몰라서 던진 질문은 아니었다.

레니샤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경에게 내려진 영지로 보내지겠지. 나는 단물 빠졌으니 뱉어내는 사탕과 다를 게 없고.”

“그게 뭡니까.”

카시우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밀빛의 얼굴이 분노와 치욕으로 얼룩져 있었다.

레니샤가 그것을 확인하고는 설핏 웃었다.

노예 출신의 기사인 카시우스도 아는 수치를 이 제국의 황제만큼은 모른다.

카시우스가 잇새로 내뱉었다.


“나 같은 새끼도 제 아내 귀한 줄은 압니다.”

레니샤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렉서스가 정말로 레니샤를 그렇게 여길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레니샤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보다도 못한 게 황제인 것을 어쩌겠어. 경이 이해하도록 해.”

너무나 덤덤하게 말하는 레니샤 덕분에 오히려 카시우스가 답답해졌다.

레니샤의 주의를 흩어버리기에 아주 적당한 주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고상하신 분들은 다 그런 겁니까?”

날 선 말에 레니샤가 물었다.


“그 말은 내가 황제와 같은 사람이라는 건가?”

카시우스가 입술을 질끈 물었다.

말을 하니 그렇게 되네.


“그건 아니지만…… 이렇게 되면 황후 폐하께서 제 아, 아내가 되는 겁니까?”

아내.

그런 다정한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경의 선택이지. 그러나, 이미 약속하지 않았었나.”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를 데리고 어디든 가주겠다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