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사벨라 로테라
(28/135)
28화. 이사벨라 로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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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이사벨라 로테라
2022.07.05.
카시우스가 튀어나가 테리언의 멱살을 붙들어 복도 벽에 밀어붙였다.
“잊어.”
“제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야. 잊어!”
카시우스가 윽박을 질렀다. 정신을 되찾은 테리언이 씨익 웃음을 지었다.
“제가 뭘 잊어야 합니까, 요조숙녀님?”
카시우스가 금빛 눈을 번뜩였다.
고개를 숙인 카시우스가 테리언의 귓가에 형용할 수 없는 욕설을 주절주절 내뱉었다.
그 말들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다시 한번 그 단어를 입에 담으면 잘 다져진 고기로 만들어주겠다는 내용이었다.
테리언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협박 앞에서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엄청난 단어를 들었으니 말이다.
이 정도면 카시우스를 평생 놀려먹고도 남을 것이다.
이 소식을 기사들에게 전해줄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미친 새끼.”
카시우스가 욕을 먹고도 웃는 테리언의 멱살을 내팽개쳤다.
글렀다. 이건 사살하는 수밖에 없었다.
카시우스가 허리춤을 더듬어 검을 손에 쥘 때였다.
“카시우스, 테리언 경. 급한 용무가 끝났다면 들어오게.”
“네!”
테리언이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레니샤가 마음에 쏙 들어버렸다. 안주인으로서 완전 합격이었다.
카시우스가 허탈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망했다.
완벽한 동상이몽이었다.
***
사용인들과 기사들의 거처 문제로 돌아왔다는 테리언에게 레니샤는 명쾌한 답을 내려주었다.
아직 저택의 보수가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별채가 있기는 하지만 제대로 기능할 수 있도록 손보려면 한 달이 넘게 걸릴 터였다.
그러니, 한동안은 본채에서 다 같이 지내는 쪽으로 결정한 것이다.
보통 제대로 된 가문에는 기사들이 따로 사용하는 숙소가 있길 마련이나 이곳은 그럴 만한 여력이 없었다.
‘아무래도 힐로샤인이 정비되는 대로 타운하우스도 제대로…….’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힐끗 보았다.
잠을 못자서도 그렇겠지만 지금은 더욱 지친 얼굴이다.
테리언이 돌아간 이후로 그랬다. 아직 정리할 게 남아 있는데도.
“카시우스.”
“……말씀하십시오.”
“흠.”
레니샤가 잠시 고민했다.
레니샤는 이제 더 이상 황후가 아니다.
카시우스에게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레니샤가 어떤 태도로 카시우스를 대하던 간에 그는 한결같을 테지만.
남편으로서 존중한다면 렉서스보다는 카시우스가 더 나았다.
레니샤가 고민을 마치고는 생긋 웃었다.
“카시우스, 저택이 정리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래도 이 주 안에 떠날 준비도 마쳐야 해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에서는 동의합니다.”
황제가 또 어떤 미친 짓을 하기 전에 얼른 떠나는 게 나았다.
이 주도 빠듯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성을 총괄하는 일은 린데이에게 맡길까 해요. 그나마 귀족가의 생리나, 가문을 운영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레니샤의 뜻대로 하십시오. 기사단의 일만 테리언에게 맡겨주시면 됩니다.”
“하인들을 돌볼 집사장과 시녀장을 다시 뽑아야 하는데…….”
레니샤가 침음을 흘렸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한 번 더 정리해볼게요.”
“네. 사실 저는 그간 전쟁터에 있었던 탓에 그런 일에는…… 잠깐. 레니샤. 지금 제게 존댓말을 쓰고 있는 겁니까?”
카시우스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
레니샤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더 이상 황후가 아닌데 언제까지고 황후일 수는 없잖아요? 이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카시우스가 입을 벌렸다.
“싫어요?”
카시우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레니샤가 싫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레니샤가 더 좋았다.
제 어깨에 얹어져 있었던 무게를 내려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기에.
“……편하신 대로. 레니샤가 조금이라도 편한 대로 하면 됩니다.”
“고마워요.”
레니샤는 급하게 논의해야 할 일은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다.
카시우스가 모든 일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수월했다.
하지만, 레니샤에게는 확인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어제부터 이어진 모든 피로를 뒤로하고.
“카시우스. 그리고…… 그 애는 어디에 있나요?”
레니샤가 긴장감에 목을 문질렀다.
“이사벨라, 그 아이를 보고 싶어요.”
레니샤의 명료한 분홍색 눈동자 앞에서 카시우스는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사벨라.
이사벨라 로테라.
“카시우스가 이사벨라가 쓴 편지를 보냈잖아요. 그건 분명 그 아이의 필체였어요. 카시우스.”
레니샤가 답지 않은 조급함으로 카시우스를 재촉했다.
아마도 이런 일을 벌인 것은 테샤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테샤에게서 확인을 하지 못한 참이다.
어쩌다가 그 아이가 여기에 있게 된 것인지, 분홍색 눈동자가 변이한 이유와 소년이라고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던 경위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다.
카시우스가 머리를 짚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레니샤와 함께 풀어가도 될 문제였다.
오히려 이사벨라가 그간 카시우스의 보호 아래 있었다는 건 잘된 일이다.
아이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으니.
“……데리고 오겠습니다.”
이 저택에는 심부름을 해줄 하인이나 하녀도 없었다.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레니샤에게 찾아온 소식은…….
그 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
“테샤!”
“어디에 있는 거니, 테샤!”
“테샤아!”
기사들이 목청 터져라 외치며 저택 안을 샅샅이 뒤졌다.
조금씩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테샤는 어디에 숨은 건지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작은 몸으로 온 저택을 뽈뽈 돌아다니던 아이가 어딜 간 건지.
다행히 밖으로 나간 것 같지는 않았다.
전쟁터에서 지내다 온 이들이라 보초를 서는 일에는 특히 민감했으니 들어오고 나가는 이에 대해선 확실히 확인하고 있었다.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고 작다고는 해도 그 감시를 피해서 도망갈 길은 없었다.
“대체 어딜 가신 걸까요.”
린데이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저, 저 말입니까?”
테리언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린데이가 혀를 가볍게 차고는 말했다.
“그럼 누구에게 묻습니까, 제가.”
“……커흠.”
여자가 이렇게 대뜸 말 걸어준 건 또 처음이라.
사춘기를 전쟁터에서 삭막하게 보냈으니 지금 저택에서 나는 분 냄새도 적응이 되지 않는 참이었다.
그런데 린데이는 이렇게 서슴없이 그를 대하고 있으니.
“……저도 모르겠습니다. 테샤가 몸집이 작아서 마음먹고 숨으면…….”
“얼른 찾아야 할 텐데요. 저러다가 황후…… 아니, 부인께서 쓰러지실까 걱정됩니다.”
린데이가 눈짓한 쪽에는 레니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가뜩이나 흰 사람이 창백하게 질려 있으니 더 걱정스럽긴 했다.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테샤는 무슨 일로 찾으시는 겁니까? 갑자기 아이가 사라진 일도 그렇고…….”
테리언이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린데이가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쳤다.
그간 레니샤의 시녀장으로 지내면서 별의별 꼴을 다 보았다.
이런 눈빛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가 이사벨라 로테라, 로테라의 후손이십니다. 그러니 부인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것도 당연하지요.”
“아…… 예? 예에?? 테샤가요?”
이사벨라라면 그간 테리언이 카시우스의 명으로 찾고 있었던 아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택 안에 있었다고? 이게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건가 보다.
테리언이 혀를 내두르고는 수색을 재개했다.
린데이가 왠지 순후해 보이는 테리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양들을 똑똑하게 몰이해줄 양치기개가 필요했는데. 그 역할로 적합할 듯싶었다.
린데이가 조급한 와중에도 피식 웃었다.
***
피가 발끝으로 몰리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바닥에 떨어졌다가 건져지는 섬뜩한 느낌.
테샤가 사라지다니.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땐 절망했고 황망한 표정으로 사과를 하는 카시우스를 보면서 그 마음을 수습했고.
다행히 저택을 빠져나간 것 같진 않다는 말에는 안도했다.
“테샤!!”
목청껏 그 아이가 제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이름을 외쳤다.
기억을 잃은 것 같았다지. 아니, 기억을 잃은 척했다지.
분홍색 눈이 아니라 회색 눈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었다.
어떤 아픔을 겪었기에 그 어린아이가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사벨라를 보듬어줄 수 있는 것은 레니샤뿐이었다.
레니샤가 발을 굴렀다.
“테샤, 제발!”
발에서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저택을 헤집고 다니던 레니샤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시우스?”
“……신발은 신고 다녀야 합니다. 이미 다치신 것 같군요.”
카시우스가 작은 한숨을 내쉬고는 레니샤를 번쩍 안아 올렸다.
“테샤를 찾아야 해, 카시우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멱살을 틀어쥐고 형형한 눈빛으로 말했다.
지금 당장 자신을 내려놓으라는 거다.
카시우스가 저벅저벅 걸으며 말했다.
“찾았습니다. 찾긴 했는데 그 구석에서 나오려 하질 않으니 레니샤가 직접 가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찾았어요?”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 전에는 카시우스를 물어뜯을 이리 같았던 레니샤가 다시 가라앉았다.
카시우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주방에서 찾았어요. 감자 자루 사이에 숨어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듯합니다.”
“……왜 거기에.”
“그건 모르겠습니다. 레니샤가 오니 놀란 게 아닐까 싶긴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레니샤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발바닥에 박힌 무언가에서 알싸한 고통이 밀려 올라왔다.
레니샤가 눈을 가린 채로 입을 꾹 물었다.
놀란 마음이 가시고 그 자리를 안도감이 채웠다.
레니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카시우스의 어깨를 짚었다.
“내려줘요. 걸어갈 수 있어요. 이 모습을 보면 아이가 더 놀랄 거야.”
카시우스가 망설이다가 레니샤를 내려놓았다.
맨발로 바닥을 딛고 선 레니샤의 발을 조심스럽게 털어냈다.
발바닥에 박힌 나무 조각들을 손으로 떼어낸 카시우스가 손수건으로 발을 감쌌다.
그러고 나서야 신발을 신겨주었다.
전에는 차갑던 발이 지금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작은 발의 수난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작은 한숨을 흘렸다.
레니샤가 그런 카시우스를 고요히 응시했다.
그의 움직임 모두를. 근육이 요동치는 모양새까지 꼼꼼히.
이 덩치 큰 남자에게 숨어 있는 일련의 섬세함들이 레니샤에게 이상한 기분이 들게 했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고마워요.”
카시우스가 멈칫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카시우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치지 마십시오.”
레니샤가 보살핌을 받는 어린애가 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에게 서로가 새로운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카시우스도, 레니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