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이사벨라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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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이사벨라의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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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이사벨라의 상처
2022.07.08.
카시우스가 발을 다친 레니샤를 부축해서 주방으로 향했다.
몸집이 작은 아이가 숨은 곳을 기사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머뭇거리며 서 있는 꼴을 보아하니 테샤에게 한 마디도 건네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레니샤가 나타나자 기사들이 알아서 길을 터주었다.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그 길을 지났다.
가까이 가니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애달프게 우는 소리였다.
커다란 감자 자루들 사이에 파묻힌 아이의 머리카락이 삐죽 보였다.
짧게 잘린 머리카락이었다.
그럼에도 레니샤는 아이의 단편으로부터 이사벨라를 보았다.
단풍이 내리는 계절이 오면 소풍을 가자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었던 아이 말이다.
이사벨라는 레니샤나 로테라가 처한 상황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항상 천진하게 웃곤 했다.
그 모습이 어른들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아이는 알았을 것이다. 조숙한 아이였으니.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놓고 몸을 낮춰 앉았다.
“이사벨라.”
레니샤가 작은 목소리로 아이를 불렀다.
흔들리던 아이가 멈칫했다.
이름에 반응하는 것을 보니 그 이름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사벨라.”
레니샤가 이번엔 힘을 줘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 나오렴.”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골라 아이를 달랬다.
“보고 싶었어, 이사벨라.”
레니샤가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을 때였다.
눈물로 가득 젖은 얼굴이 감자 자루 사이로 우스꽝스럽게 솟아올랐다.
아이가 입술을 크게 벌렸다.
울음이 섞인 두서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흐어, 흐어어엉, 나, 나도…… 흐엉…… 보, 보고…… 으아아아아앙!”
레니샤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팔을 벌렸다.
“이리 와, 아가.”
“고모님……!”
아이가 명확하게 레니샤를 불렀다.
레니샤의 마음에 빛이 스몄다.
이사벨라는 레니샤가 지금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동기 중 한 명이었다.
살아남았다고 알려진 나머지 두 사람만 더 찾으면 된다.
“얼른.”
레니샤가 아이를 재촉했다.
이사벨라를 품에 안고 이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곱씹고 싶었다.
레니샤가 살아 있는 것이 절대로 헛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삶에 대한 증명이었다.
제 몸만 한 자루들 사이에서 발버둥 치면서도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사벨라를 누군가 번쩍 안아 들었다.
사실상 펑펑 우느라 앞도 잘 보이지 않던 이사벨라가 눈을 깜빡였다.
굵은 눈물방울들이 톡톡 떨어졌다.
이사벨라를 레니샤 앞에 내려놓은 카시우스가 아이의 머리를 꾹 눌렀다가 손을 뗐다.
“가.”
등을 떠미는 손길에 이사벨라가 고개를 돌려 레니샤를 보았다.
여전히 이사벨라를 향해서 팔을 벌리고 있는 그녀를.
이사벨라가 흐엉엉, 눈물을 터뜨리며 레니샤의 품에 안겼다.
레니샤가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이전보다 훨씬 마른 아이의 등을 쓸어주고 이리저리 살폈다.
다행히 크게 상한 곳은 없어 보였다.
“이사벨라…….”
분명 길고 긴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이사벨라가 아니라 테샤가 되어야 했고, 분홍색 눈동자가 회색으로 변하고.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로 살게 된 이유.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레니샤가 아이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다시는…… 다시는 널 혼자 두지 않을게. 고모가 약속할게.”
“흐어어어어엉…… 고모님…….”
이사벨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레니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렉서스를 향한 분노가 깊어졌다.
렉서스가 아니었다면 이사벨라가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는 안온한 가정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온전하게 자랐을 것이다.
놈만 아니었다면!
레니샤가 이를 악물었다.
이 모든 불행에 대한 대가를 받아내는 날이 기다려진다.
레니샤의 가슴속 불티가 덩치를 키웠다.
***
카나리아가 희열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레니샤가 돌아오지 않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오늘 내내 마음을 졸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렉서스는 제 방에 틀어박혀 술이나 마시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복잡한 마음이겠지.
높으신 분들은 뭐가 그렇게 복잡한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고 싫은 게 싫은 거 아니던가?
렉서스는 레니샤를 완전히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럴 거면 아껴주던가. 비참하게 버려놓고 뭐 하는 청승이람.
“멍청이.”
카나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래도 레니샤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건 기정사실인 것 같았다.
그게 카나리아를 기쁘게 했다.
더 이상 그 재수 없는 얼굴을 황성에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가서 금사로 지은 드레스를 가져와, 바바라.”
“네!”
바바라가 늦은 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나리아에게 금사로 수를 놓은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아무도 몰래 제작한 황후의 티아라를 머리에 쓰고 카나리아가 방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아름다우세요, 폐하.”
바바라가 카나리아에게 장단을 맞췄다.
카나리아가 레니샤를 흉내 내서 고상하게 손짓으로 인사했다.
그간 레니샤를 집중적으로 관찰하며 연습해온 것들이었다.
오늘 같은 날이 왔을 때 써먹기 위해서!
“고마워, 바바라.”
턱을 치켜들고 도도하게 말한 카나리아가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내일 일정은 뭐가 있지?”
“내일은…… 폐하의 대관식 아닙니까!”
“아…… 정말로 그러면 좋겠다. 그래도 곧이겠지?”
카나리아가 아랫배를 감쌌다.
“귀족 회의에서 헛소리가 나오기 전에 아이를 가져야 하는데.”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카나리아 님.”
바바라가 카나리아를 위로했다.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해요. 너무 조바심을 내면 될 일도 되지 않는다고 그랬어요.”
“맞아. 내가 강해져야지.”
카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카나리아를 보고 언젠간 버려질 정부 신세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리고 그 말에 반박할 말이 없다는 것이 카나리아의 자존심을 아프게 만들었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렉서스에게 고자질해봤자 돌아올 것은 웃음기 어린 눈빛뿐이었다.
‘각오하고 내 침대에 오른 것 아니었어, 카나리아?’
어리숙한 마음에 그들을 혼내달라고 졸라봤지만 렉서스는 뼛속까지 냉혈한이었다.
‘그런 걸 조르라고 널 그 자리에 앉힌 게 아니야, 카나리아.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해야지.’
렉서스가 뼈아프게 했었던 말들이 카나리아의 가슴에 송곳처럼 박혀 있었다.
카나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를 무시했었던 사람들에게 반드시 본때를 보여줄 참이었다.
“그 남자를 만나야겠어.”
카나리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도요?”
“그래. 내가 이렇게 안일하게 있을 때가 아니지. 안 그래, 바바라?”
“맞는 말씀이십니다. 나가실 채비를 돕겠습니다.”
카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렉서스는 제 감정에 빠져서 카나리아는 찾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황실에서 일하는 심부름꾼 아이들에게 돈을 쥐여 주고 황제의 동향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밖으로 나갈 생각으로 준비를 마쳤다.
거울을 확인하고 겉옷을 챙긴 카나리아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였다.
“어딜 가려는 거지?”
술에 나른하게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쿵. 카나리아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카나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것은 렉서스였다.
“어디를 가려는 거냐고 물었다.”
취기가 가득한 얼굴이었다.
렉서스가 흐느적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바라가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쩔 수 없이 침실을 나가는 것이 보였다.
카나리아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카나리아가 가길 어딜 가나요? 저는 폐하만의 카나리아잖아요.”
“그래, 나만의 카나리아.”
렉서스가 입술을 휘어 올렸다.
보랏빛 눈동자가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
카나리아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사실 정원을 돌아보려던 참이었어요. 날이 쌀쌀하다고 해서 가진 것 중에 가장 두꺼운 겉옷을 골랐지요.”
“정원? 이 시간에?”
렉서스가 카나리아를 훑어보았다.
평소 화려한 치장을 즐기는 카나리아답지 않게 단출한 치장을 하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카나리아도 기분이 싱숭생숭해요. 황후 폐하는 제가 모시던 분이었잖아요.”
“황후가 아니라 레니샤 부인.”
렉서스가 정정해주었다.
안 그래도 텅 빈 황후궁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었다.
텅 비어 주인을 잃어버린 건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렉서스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에도 렉서스는 그곳을 쉬이 떠날 수가 없었다.
카나리아가 미소를 머금고는 말했다.
“맞아요. 실수했네요. 레니샤 부인. 부인께서 나가시고 나니 기분이 이상해서 정원을 둘러보고 싶었어요.”
“아아.”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허리를 가볍게 잡아당겼다.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입술에 제 것을 묻으며 렉서스가 성마른 손길로 카나리아를 헤집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전부 잊게 해주지.”
렉서스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하고 카나리아의 옷을 찢었다.
카나리아가 웃음을 흘렸다.
이것 봐! 레니샤가 떠난 날도 렉서스는 카나리아의 품 안에 있었다.
레니샤에게 이 꼴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서글플 뿐이었다.
“폐하, 카나리아가 보고 싶으셨던 거지요?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카나리아가 귀엽게 소리를 흘리며 졸랐다.
“그래…….”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어깨에 키스를 하느라 뭉개진 발음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게, 보고 싶더군.”
렉서스가 중얼거렸다.
카나리아가 그런 렉서스를 끌어안았다.
누가 뭐래도 렉서스는 카나리아의 치마폭에 있었다.
기이할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침실을 가득 채웠다.
***
아이는 밤새 레니샤의 품속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레니샤는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느라 시간이 가는 것도 몰랐다.
뜬눈으로 지새운 밤이 조금도 아쉽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부끄러워하는 이사벨라를 하녀들에게 씻기도록 했다.
아이의 몸에 이상이 없는지 살피게 하기 위함이었다.
레니샤를 힐끗 보고는 손을 작게 흔든 이사벨라가 욕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녀 한 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레니샤 앞에 고개를 조아린 하녀가 말했다.
“아, 아가씨 등에 긴 검상이 있습니다. 등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검상이온데 상처의 크기를 보아서는 보통 상처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흉터도 그렇고요.”
딸깍.
레니샤가 찻잔을 소서에 내려놓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레니샤가 정물처럼 굳은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밖으로 나가 은밀하게 여의사를 데리고 들어오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투리엘의 의상실에 들러 아이가 입을 만한 가벼운 홈드레스를 가지고 오도록 하고.”
“예, 레니샤 공작 부인.”
“그리고 마담 투리엘을 데리고 오게.”
“네!”
하녀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레니샤의 침실을 나갔다.
레니샤가 고요한 시선을 찻잔에 두었다.
일렁이는 수면에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비쳤다.
“……빌어먹을.”
감정이 널을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