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쫓겨난 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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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쫓겨난 시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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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쫓겨난 시종장
2022.07.19.
레니샤가 꼼짝도 하질 않는다.
렉서스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긁었다.
거스러미를 떼어내는 렉서스의 눈빛이 버석하게 메말라 있었다.
렉서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초조함이 묻어났다.
헨리가 숨을 죽인 채로 렉서스의 움직임을 좇았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누구도 입 여는 자가 없었다.
시종들은 그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작은 실수 하나로도 그들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것이 눈앞의 남자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니샤가 움직임이 없어.”
레니샤를 내보내고 나서 렉서스는 그간 저택을 주시해왔다.
분명히 레니샤가 무언가라도 하려고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간간히 외출을 했지만 레니샤는 저택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정말로 제 죄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처럼.
레니샤가 폐위되었다는 공문이 내일이면 전국에 나붙을 것이다.
황실의 문장가들은 폐위 교서를 내리기 위해서 문장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황실에 누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은 레니샤도 모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덕분에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렉서스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서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렉서스는 레니샤의 행동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안 하는 거지?”
렉서스가 손톱을 씹었다.
‘정말로 이대로 인정하고 떠날 생각인가, 레니샤?’
그럴 리가 없는데. 레니샤가 이런 비참한 꼴을 용납하고…….
“아.”
그 남자 때문인가.
노예 기사 말이다. 레니샤를 보는 눈빛이 불충했었던 남자.
렉서스가 머리를 천천히 쓸어 넘겼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보는 눈빛은 기사가 황후에게 보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에는 따뜻했고 묘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음험하게 빛났다.
그 속에 여러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술을 올릴까요?”
헨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렉서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렉서스가 날 선 시선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책들을 노려보았다.
그 밤, 저 책들을 건드릴 사람은 레니샤뿐이었다.
렉서스가 제가 보던 책을 침대 밑에 던져두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아는 건 레니샤뿐이었으니 말이다.
레니샤의 마지막 흔적을 렉서스는 한참을 노려보았다.
이럴 필요 없는 일이다.
레니샤가 무엇을 하든 렉서스는 그가 할 일을 하면 되고, 몰랐던 사이처럼 살아가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질척한 게 매달린 것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고 있었다.
카나리아를 품어도 이전만큼 흥이 나질 않았다.
‘설마…… 기대했었던 건가?’
렉서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레니샤가 발버둥 치며 그에게 돌아와 주기를,
가장 비천한 자에게 보내 렉서스가 얼마나 좋은 선택지였던 것인지를 깨닫길 바랐었던 건가?
렉서스가 스스로를 비웃었다.
‘멍청하긴!’
레니샤 자존심에 그럴 리가 있나!
렉서스가 침대 등받이를 짚고 멈춰 섰다.
그의 시선 끝에 헨리가 걸렸다. 은은하게 미소 짓고 있는 노시종장이.
“헨리…….”
“네, 폐하.”
“그대가 나를 모신 지 얼마나 되었지?”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모셨으니 햇수로 8년을 채웠나 봅니다.”
“8년.”
렉서스가 숫자를 곱씹었다.
8년이면 헨리를 알 만큼 안다 싶은 시간이었다.
헨리는 좋은 시종장이었다.
렉서스보다 그의 의중을 먼저 짚어냈으며 레니샤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곤 했었다.
헨리가 종종 레니샤에게 달려가 박쥐처럼 달라붙는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방관했다.
그로 인해 항상 좋은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레니샤와 친분이 있었지?”
헨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셨으니 그렇습니다.”
“헨리, 자네가 레니샤에게도 정이 두터운 걸 알고 있네. 레니샤는 나와 동시에 입궁하지 않았었나.”
“…….”
렉서스가 비죽이 웃곤 헨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렉서스가 헨리에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노시종장의 눈빛을 살피는 렉서스의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헨리는 조금의 침음도 흘리지 않았다.
“자네가 그간 고생이 많았어…… 내 곁에서 말이야.”
절대로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는 렉서스다.
아무도 그런 달콤한 말에 긴장을 풀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건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는 충신이지. 나를 위해서 일해 줄 충신.”
“당연한 일입니다. 저는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몸. 다른 주인을 섬길 일은 없지요.”
“좋아, 헨리. 그래서 자네가 해줄 일이 있네.”
렉서스가 붉은 웃음을 흘렸다.
또 무언가를 꾸며내는 얼굴이었다.
***
헨리가 짐을 싸들고 카시우스의 저택으로 온 것은 한밤중의 일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항상 단정했었던 그답지 않았다.
헨리를 맞이한 사용인들이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지금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은 전부 황후궁에서 일하던 자들이었다.
카시우스의 가솔이라고는 기사들과 테샤가 전부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전부 헨리를 알 수밖에 없었다.
린데이가 어정쩡한 얼굴로 앞으로 나섰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시종장님.”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나?”
헨리가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셔 놓고, 지금……!”
“폐하의 명이네.”
헨리가 항상 레니샤에게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전달했을 때 짓던 표정을 지었다.
린데이가 이를 아득 물었다.
렉서스가 또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인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헨리가 들고 있는 짐 가방들이 불안했다.
“무슨 일인데 소란이지?”
레니샤가 층계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헨리가 눈을 빛냈다.
오랜만에 보는 레니샤였다.
레니샤는 조금도 과거의 위엄을 해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왔다.
오히려 엉망으로 망가져가는 것은 그녀를 버린 렉서스 쪽이었다.
레니샤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맞는지 꽤 편안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뜨고 1층으로 내려왔다.
“공작 부인.”
린데이가 고개를 숙였다.
“난데없는 손님이 오셔서…….”
“시종장. 여기는 어쩐 일인가? 폐하께서 보내셨나?”
“……폐하께서 저택을 돌보는 집사 자리가 비어 있을 것이라 하시며 보내셨습니다.”
레니샤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2층에 있던 이들이 전부 고개를 내밀었다.
그건 카시우스도 마찬가지였다.
카시우스가 난간에 두 손을 짚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번뜩이는 금안이 헨리를 직시했다.
헨리가 오싹한 기분에 애써 웃었다.
만약 헨리가 레니샤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눈빛이었다.
“그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이 저택의 살림을 꾸리는 것은 이제 내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이야. 폐하께서 신경 쓰실 일이 아니지.”
“맞습니다. 하지만, 부인.”
헨리가 덤덤히 웃고는 제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레니샤에게 빌어서라도 빌붙어. 그 여자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겠으니 그곳에 들어가도록 해, 헨리. 이게 내가 자네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 될 것 같군.’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면 죽거나 쫓겨나게 될 것이며, 만약 성공하게 된다면 헨리는 레니샤를 따라 힐로샤인으로 가게 된다.
황제가 하는 말을 알아들은 헨리는 짐을 싸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분노와 체념이 뒤섞였지만 세월이 헨리에게 인내심을 선물해주었다.
헨리는 렉서스의 짓거리를 한 번 더 참아 넘길 수 있었다.
“저는 여기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습니다.”
헨리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사용인들 입에서 침음이 흘렀다.
“받아주세요, 부인.”
“……헨리.”
레니샤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헨리는 간자였다.
그를 안에 들이면 헨리는 렉서스에게 레니샤의 동향을 고해바칠 것이다.
헨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가신 일이었다.
하지만, 반응을 보건대 이 집 귀신이 되라고 하기라도 한 모양인데.
렉서스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대체 내게 무슨 미련이 남아서. 그도 아니면 내가 뭔가를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건가?’
차라리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었다.
렉서스가 미련이라니. 레니샤가 차게 웃었다.
“나는 자네의 목숨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네. 이대로 나가 객사한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어. 우리의 거래는 내가 황성에 머물 때만 효용가치가 있었지. 내가 얻는 만큼 그대도 얻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내가 그대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지?”
당연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헨리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패를 내놓았다.
“짐작하시는 대로 저는 황성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도운 일을 기억해주소서.”
“자네가 도운 일?”
“선대 로테라 공작 부부의 사체를 수습한 것은 저였습니다.”
레니샤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레니샤는 황성을 나올 때가 되어서야 그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검은 벨벳 상자 안에 황금과 상아로 장식한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공작 부부가 있을 것이다.
레니샤는 그들을 힐로샤인으로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힐로샤인은 로테라의 근원지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데려가야만 공작 부부가 편한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한 건지 아나?”
“예, 부인. 하지만 저는 지금 진실만을 말씀드리고 있다고 맹세합니다. 그분들의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한 것은 저입니다, 부인.”
“하.”
“저는 평생 폐하를 위해서 일했지만, 절대로 로테라에 해가 될 일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로테라에 해가 되는 일을 하게 되겠지.”
헨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레니샤의 봄꽃 같은 눈동자가 미소를 머금고 있었으나 따뜻하지 않았다.
“……선대 로테라 공작께서 레니샤 부인을 부탁한다고 하셨었지요. 저는 그 유지를 여태껏 지켜왔습니다, 부인.”
“…….”
그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헨리는 황제를 위해서 일하고 있지만 위급한 순간엔 꼭 레니샤를 도왔었다.
“한 번만 더 살펴주십시오, 부인.”
헨리가 고개를 조아렸다.
린데이가 불안한 얼굴로 레니샤를 보고 있었다.
헨리는 대놓고 간자를 자청하는 자였다.
하지만, 헨리를 거절하면 다음엔 누가 오게 될까? 또, 그다음엔?
렉서스는 제가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는 작자이니 무슨 짓을 해서라도 그녀를 굴복시킬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개중 가장 온건한 헨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레니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헨리와는 여러 가지를 협상해야 할 것 같았다.
레니샤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오게.”
헨리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헨리와 카시우스의 눈이 마주쳤다.
두 난간을 짚고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인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헨리는 왠지 카시우스가 그에게 달려들 것 같다고 느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순순히 몸을 돌렸다.
헨리가 제 목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다행히 목은 아직 제자리에 잘 붙어 있었다. 걱정과는 다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