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감스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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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유감스러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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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유감스러운 일
2022.07.29.
카시우스가 부르는 레니샤의 이름은 유독 부드럽게 느껴진다.
레니샤를 그렇게 불러주던 이들은 지금 곁에 남지 않았는데 말이다.
아주 소중하고 귀한 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무도 레니샤에게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레니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죄책감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레니샤가 문을 열었고 배은망덕한 짐승을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그 짐승은 기어이 로테라를 집어삼켜버렸다.
스스로가 싫었다. 그날의 자신을 원망한다.
하지만, 카시우스가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 모든 것들이 흩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로테라의 사랑스러운 막내딸로, 사랑받는 귀족 영애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습니까?”
레니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카시우스를 유혹하고 그녀의 침대에 들였다.
이 모든 건 레니샤가 자초한 일이었다.
열정으로 덤벼오는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끌어안았다.
그녀를 몰아붙이는 강대한 힘과 열기에 혼몽하긴 했지만…….
무엇을 하는지, 레니샤를 안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레니샤가 보스스 웃으며 카시우스의 뺨에 키스했다.
“괜찮아요.”
이런 순간에도 레니샤를 걱정해주는 카시우스가 고맙고 애틋하다.
레니샤가 처음으로 받아보는 배려였다.
레니샤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착한 내 강아지.”
카시우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도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레니샤가 얄밉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카시우스가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환장하겠네.”
모순적인 감정에, 그리고 레니샤의 파멸적인 언사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 다른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어째서?”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부끄러운 건가요? 괜찮아요. 사람들은 우리 이야기를 엿듣지 못해.”
“……이미 테리언으로 인해서 곤욕을 겪고 있습니다.”
그다음 날 기사들 사이에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다.
카시우스만 보면 ‘요조숙녀’라고 놀려대는 통에 욕설을 짓씹어야 했다.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요조숙녀처럼 부끄러워하고 있군요.”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리고 몸을 움직였다.
어떻게 해서든 레니샤의 입을 다물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레니샤가 탄성을 흘리며 카시우스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제발, 그 입 좀…….”
카시우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카시우스도 알고 있잖아요?”
레니샤가 미소 지었다.
……정말 요망하기 짝이 없는 여자였다.
카시우스가 순순히 얼굴을 내렸다.
***
충동의 결과는 옳았다.
적어도 레니샤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시우스는 내내 다정했고 신사적이었으며 레니샤를 아껴주었다.
여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두 사람을 불태우던 뜨거운 열기가 여전히 잔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레니샤는 어젯밤, 오랜만에 황후가 아닌 여자 레니샤가 되었다.
레니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인정한다.
어젯밤만큼은 복잡한 정세도, 복수도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카시우스의 뜨거운 불길이 레니샤를 집어삼켰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만을 보았다.
“이런 건 처음인데.”
조금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카시우스를 시험해본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녀 자신이 변수가 되었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건 정말로, 처음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카시우스의 숨결이 흩어졌던 곳이다.
레니샤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당혹스러운 건 이 모든 것들이 싫지 않다는 거다.
“……린데이. 내 얼굴이 조금 변한 것 같지 않나?”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저는 지금의 부인이 훨씬 더 좋습니다. 웃는 일도 늘어나셨구요.”
“그래……?”
안 그래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훨씬 부드러워졌다는 것을 느꼈다.
스스로도 변화를 느낄 지경이니 지켜보는 다른 이들은 어떻겠는가.
레니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쁘지 않은 변화.’
카시우스가 품고 있는 불길이 레니샤를 녹였을지도.
그 온기는 너무나 따뜻해서 겨울의 차가운 칼바람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선라이즈 클럽.
카시우스는 이번엔 실수하지 않았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후작.”
“아닙니다, 각하. 충분히 오해하실 수 있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보좌관에게 타박을 들은 참입니다.”
덴버스 후작은 나이가 어렸다.
하지만, 그에게서 묻어나는 연륜은 그 나이조차 가리고 있었다.
레니샤가 왜 덴버스 후작을 두고 ‘그 애’라고 칭했는지 알 것 같았다.
“레니샤는 카나리아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덴버스 후작이 자연스럽게 카시우스를 끌고 구석으로 들어갔다.
선라이즈 클럽에 참석한 귀족들 중 누구도 그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다들 자신들의 볼일을 보느라 바빠 보였다.
“우리와 반대편에 서 있는 귀족들은 새로운 구심점으로 삼을 황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지요.”
덴버스 후작이 빠르게 말을 잇다가 잠시 멈칫했다.
“나와 공작을 우리라는 단어로 묶어도 되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해서 카시우스에게 레니샤의 편에 선 것이 맞냐고 묻는 거였다.
덴버스 후작은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직설적인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카시우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한 몸입니다.”
“제국의 영웅께서 함께해주신다고 하니 참 든든하군요.”
덴버스 후작이 느리게 미소 지었다.
“별말씀을. 그런데 그 여자를 황후로 만들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덴버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잠시 둘러본 덴버스 후작이 좀 더 구석진 곳으로 카시우스를 밀어붙였다.
카시우스보다는 한 뼘 정도 작았지만, 카시우스는 그에게 친절히 끌려가주었다.
“카나리아도 완전히 멍청한 여자는 아닙니다. 자신의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그리고 카나리아도 황후가 되려고 합니다. 만약 새로운 황후가 들어오게 되면 카나리아의 앞날은 알 수 없게 되니까요.”
“…….”
“가장 좋은 수를 뒀더군요. 카나리아는 곧 임신할 겁니다.”
덴버스가 목소리를 좀 더 낮추었다. 카시우스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나리아 스스로 방법을 찾았고 우리는 임신한 카나리아를 지지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덴버스 후작 말이 은밀해졌다.
그들은 한동안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카시우스는 이 세계의 음험함과 은밀함에 다시 한번 놀랐다.
생각보다 더 거대하고 복잡한 세계였다.
***
카나리아가 아랫배를 끌어안았다.
“정말로 임신이라고 했는가?”
“예, 카나리아 님.”
황궁의가 고개를 조아렸다. 카나리아와 바바라의 눈이 마주쳤다.
사실 태기가 있다는 사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황궁의의 진단을 받은 것은 황실에 자연스럽게 임신 소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지금 귀족들이 제 딸을 황후로 만들려고 안달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카나리아도 전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있나.
이 기회는 카나리아가 자신을 위해서 만들어낸 거였다.
카나리아가 거들지 않았다면 렉서스가 레니샤를 폐위시킬 생각을 했겠는가.
그 미련한 남자가 말이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카나리아가 근엄하게 말했다.
“이 사실을 황제 폐하께 전해주겠나? 내가 이제야 폐하께서 바라시던 것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야.”
“예!”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심지어 여아인지, 남아인지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간 아이가 없었던 렉서스에게 처음으로 자식이 생기는 거였다.
렉서스는 이것으로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렉서스의 기반이 단단해지는 것이다.
이번에 딸이 태어나더라도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다음을 기대하게 될 터.
카나리아는 렉서스에게 그런 기회를 만들어준 것이다.
카나리아가 배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황궁의가 서둘러 물러가고 바바라가 카나리아의 어깨를 마사지했다.
다리까지 꼼꼼히 마사지하던 바바라에게 카나리아가 말했다.
“그 남자는 처리했니?”
“네, 카나리아 님. 절대로 아무도 알지 못할 거예요.”
바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에게 직접 약을 먹였으니 반드시 죽었을 것이다.
“잘했어. 내가 반드시 너의 공은 잊지 않을 거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카나리아 님.”
이 순간을 위해서 얼마나 마음 졸이고 고생했던가.
아직은 아무 표시도 나지 않는 납작한 배를 카나리아가 쓰다듬었다.
“아가. 소중한 내 아가.”
카나리아의 녹색 눈동자가 웃음을 머금었다.
이 아이 덕분에 이 세상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다.
그토록 탐하던 자리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카나리아의 임신 소식은 렉서스에게 바로 전해졌다.
***
렉서스가 날카로운 눈을 들어 올렸다.
“카나리아가 임신을?”
“네, 폐하. 축하드립니다!”
황실에 아주 오랜만에 전해진 경사였다.
그간 렉서스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논란들이 사라지게 될 계기이기도 했다.
더 이상 사람들은 렉서스의 생식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렉서스는 이상하게 묘한 표정이었다.
“폐하……?”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렉서스가 자식을 낳게 된다면 그 아이는 레니샤와 그를 반반 닮았으면 좋겠다고.
당연하게 레니샤와의 미래를 꿈꾸던 날의 이야기였다.
렉서스는 열정에 가득 차 있었다.
로테라가 그를 선택한 것을 운명으로 여겼고 스스로의 자질을 믿었다.
‘레니샤를 황후로 주시게.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할 거야. 레니샤는 평생을 인정받는 황후로 살게 되겠지.’
로테라 공작을 구슬리기 위해서 꺼내놓았던 감언이설들을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레니샤는 렉서스를 구원했고 그는 황제가 될 자격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짝지어준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로테라 공작의 허수아비라며? 로테라 공작이 시키는 대로 다 한다던데.’
‘쯧. 모자란 걸 황제로 만들어놨으니 별수 있나.’
황성에서 렉서스를 모시는 시종들이 뒤에서 떠드는 소리를 들은 거였다.
하루, 이틀, 일주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수군거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 모두가 같은 시선으로 렉서스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미칠 것 같았다.
렉서스에게 못을 박아 넣은 것은 로테라 공작이었다.
‘……그건 옳지 않습니다, 폐하. 치기 어린 행동으로 후회할 결정은 하지 마소서.’
로테라 공작은 충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혈기 왕성한 어린 황제에게 조언을 주고 싶었겠지.
하지만, 로테라 공작의 그런 말들은 렉서스의 열등감을 부채질했다.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결국 내 아이는 카나리아가 낳게 되는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