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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카시우스의 혼란 (38/135)


38화. 카시우스의 혼란
2022.08.09.


카나리아의 임신 소식은 제도를 강타했다.

그간 후사를 보지 못했었던 황제에게 생긴 후사이니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렉서스를 미친놈이라고 욕했던 이들도 이번만큼은 그에게 관심을 주고 있었다.

광장에 모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에게 후사가 생기다니. 그렇게 되면 그 아이가 다음 황제가 되는 건가?”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그 모후의 신분이……. 쯧.”

“하녀 출신의 모후라. 아이를 얼마나 잘 키울지 기대가 되긴 하는군. 차라리 잘 배운 귀족 영애를 황후로 들이고 아이를 그 여자에게 키우게 하는 게 낫지 않나?”

“사실은 그렇지. 이럴 때 레니샤 황후께서 계시면 좀 좋아.”

“아. 그런 이야기도 있던데. 레니샤 황후가 아이를 낳지 못해서 쫓겨났다는.”

“에이! 그럴 리가 있겠는가. 황후가 아이를 낳는 게 가장 중한 자리는 아니지! 황후는 황제와 함께 정치를 논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야! 설마 황제가 그렇게 생각이 없을까.”

하지만, 렉서스와 카나리아를 보는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황제의 임신은 축하할 일이나 그 이후가 문제라는 반응이었다.

덴버스 후작이 상인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피식 웃었다.

레니샤의 수는 항상 맞아떨어진다.

레니샤는 카나리아가 황후가 된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환영받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었다.

미친 황제의 중심을 잡아주던 레니샤가 사라지고 나면 백성은 기댈 사람을 찾아 헤매게 된다고.

하지만, 그들이 기댈 만한 사람이 더 이상 황실에 없다는 것을 알면 어디로 마음이 쏠리게 되겠느냐고.

다름 아닌 떠난 황후다.

카나리아의 임신을 놓고 아이에게 대모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이제 덴버스 후작이 움직여야 할 때였다.

***

덴버스 후작을 비롯하여 권력을 쥐고 있는 귀족들이 떼 지어 황성에 들었다.

황제를 지지하는 황제파와 그렇지 않은 귀족파까지 한데 규합하여 몰려든 것이다.

그들이 한데 모인 것을 보고 황성의 사용인들은 놀란 얼굴을 했다.


“무슨 일이래?”

“모르지. 정말 난리가 나려는 모양이군.”

그들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서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헨리가 떠나고 새롭게 고용된 시종장이 허겁지겁 알현실의 문을 열었다.

렉서스가 하던 일을 멈추고 제 앞에 모인 귀족들을 느른한 얼굴로 응시했다.


“이렇게 한데 모여 있는 건 처음 보는군. 후사가 생긴 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건가? 곧 연회가 있을 텐데, 그날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을.”

“폐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폐하!”

“후사가 생기셨으니 당연히 연회를 열어 축하를 해야지요. 하지만, 폐하의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건 문제가 됩니다.”

“다른 나라 사신들이 분명히 문제 삼을 겁니다.”

렉서스가 모인 자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다들 제국에서 한 가닥 한다는 인사들만 모여 있었다.

아무리 렉서스가 미쳤다고 한들 이 자리에서 저들의 목을 베는 것은 무리다.

제국이 흔들리게 될 테니 말이다.

황제 노릇도 나라가 있어야 해먹는 법 아니겠나.

렉서스가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은 이미 작정을 하고 왔다. 품은 뜻을 이루겠다는 각오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렉서스가 차갑게 뇌까렸다.


“카나리아를 황후로 올리시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카나리아를 황후로 올리소서. 황제의 옆자리가 비게 되면 타국 사신들이 우습게 볼 겁니다. 게다가 후계가 될 아이를 사생아로 만들 작정이십니까?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장차 제국을 물려받을 분이십니다.”

귀족들이 똑같은 말을 도돌이표처럼 쏟아냈다.

후계가 없던 렉서스에게 후계가 생겼다.

그것은 제 딸을, 혹은 조카를 황후로 만든다고 해도 그다음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특히 렉서스가 그간 후사를 보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렇다면 황후 자리에 허수아비 같은 카나리아를 밀어 넣는 것이 모두에게 이득이라는 판단이 서는 것이다.

덴버스 후작은 매끄러운 혓바닥으로 이들을 한데 규합하는 데 성공했다.

귀족들이 한 목소리로 카나리아를 황후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렉서스의 표정이 깨어졌다.


“카나리아를 황후로?”

렉서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되면 레니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제가 내쫓은 황후를 언급하는 렉서스를 귀족들이 의아하게 응시했다.

레니샤는 이미 떠났고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레니샤 님께서는 지금은 로테라 부인이십니다.”

“맞습니다. 그 혼사는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 아닙니까?”

“왜 갑자기 그분을 언급하시는지…….”

모두가 혼란스러운 가운데 덴버스만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렉서스는 미쳤다.

제 감정도 제대로 읽지 못할 정도로 미쳐 있었다.

그의 혼란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그것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었다.

레니샤는 렉서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으니 말이다.


“그분께서는 돌아오시지 않습니다, 폐하.”

렉서스가 헛꿈을 꾸고 있다면 일깨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레니샤 님은 곧 힐로샤인으로 가실 겁니다. 제도에서 먼 곳으로 가시는 겁니다.”

렉서스가 팔걸이를 손으로 짚었다.


 
왜 그 순간 레니샤가 떠오른 것인지는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그저 다른 이가 황후의 자리에 앉는 것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렉서스의 재위 기간 내내 레니샤가 황후였고 그게 너무나도 당연했었다.

제가 세상을 뒤집어놓고 가장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지.”

렉서스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카나리아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 새장 속 새가 출세하는군.”

“후계를 위해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폐하!”

아무리 렉서스라도 이렇게 몰리게 되면 어찌하지 못하는 법이다.

렉서스가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빠르게 마무리하라. 카나리아를 황후로 봉하되 의식은 전부 생략할 것이다. 레니샤가 가졌었던 권리를 갖진 못할 것이며 카나리아가 정세에 끼어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렉서스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카나리아는 가진 힘이 없었다.

그런 카나리아를 이용하기 위해서 세력들이 몰려들 것이다.

렉서스는 그들의 손에 춤을 추는 허수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카나리아는 상징적인 황후가 되는 거다.

실속은 무엇도 갖지 못하는.


“예, 폐하!”

각자 다른 생각으로 카나리아를 황후로 만드는 데 동의했다.

***

무언가 이상하다.

평소 레니샤는 아무렇지도 않게 카시우스에게 손을 뻗었다.

카시우스의 턱을 쥐고 강아지 취급을 하는 일도 빈번했다.

그런데 요새 레니샤가 이상했다.

카시우스와 단둘이 있을 상황을 만들지 않는다.

카시우스가 닿을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피해버린다.


“뭐지?”

고작 이틀.

레니샤에게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카시우스라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저택에 기거하는 누구도.

카시우스를 제외하고는 그 이상함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사벨라.”

“고모부!”

아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카시우스의 허리에 달라붙었다.

이전보다 더 밝아지고 장난기도 늘어난 모습이었다.

여전히 이사벨라를 두고 시녀들과 기사들의 공방은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사벨라는 지금으로서는 누구보다 레니샤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사벨라. 요새 레니샤가 이상하지 않아?”

“우웅?”

이사벨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짧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고모는 안 이상해요. 하나도 이상한 게 없는데.”

이사벨라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고모가 어디 이상하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카시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사벨라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사벨라.”

카시우스가 이사벨라의 머리를 쓱쓱 쓸어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다음에 카시우스가 찾아간 것은 테리언과 기사들이었다.

사실 레니샤를 모시는 시녀들에게 묻는 게 빠를 것이나 도저히 그들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팔짱을 낀 카시우스의 두터운 몸이 들썩였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요조숙녀님?”

기사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누구에게 무엇을 묻겠다고 찾아온 건지.

그리고 연애하고는 거리가 먼 저들이 뭔가를 알 가능성도 없었다.

카시우스가 기사들을 쥐어박고는 몸을 돌렸다.

그렇다면 카시우스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



“어머. 공작께서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가요? 내일모레면 제도를 떠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한참 바쁘실 때 아닌가요?”

카시우스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담 투리엘. 물을 것이 있어서 찾아왔네.”

“제게 물으실 거라니.”

마담 투리엘이 손짓으로 사람들을 물렸다.

의상실을 방문했었던 손님들도 밖으로 쫓겨났다.

불만을 품었던 이들도 로테라의 틀을 쓴 카시우스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레니샤가 요새 이상해. 그런데 저택에 마땅히 물을 사람이 없더군.”

“흠? 어떤 면에서 이상하신가요?”

오늘도 편지를 주고받은 레니샤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투리엘이 제도에 남아서 해야 할 일을 꼼꼼히 일러주었다.

그런데 이상하다니?


“이전에 내가 덴버스 후작의 일을 처리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거든.”

“그런데요?”

“캘리엇 백작의 일은 그 전보다 훨씬 잘 처리했단 말이네. 레니샤가 이야기한 대로 캘리엇 백작을 만났고 그가 레니샤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확답을 받아왔지. 캘리엇 백작은 그의 수하를 두엇 내어주었어. 그자가 힐로샤인과 캘리엇 백작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거라고 했지.”

“잘하셨습니다.”

물론, 그 일에 대해서는 투리엘도 알고 있었다.

이미 레니샤로부터 전해 들은 거였다.

카시우스를 통해서 덴버스와 캘리엇의 의지를 확인했으니 판을 짤 때 유용하게 사용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전처럼 날 대해주지 않아.”

카시우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오히려 나를 피하는 느낌이더군.”

“피하신다니?”

“나만 피한다는 말이네. 나와 단둘이 남는 상황을 특히 기피하는 듯했어.”

투리엘이 빙긋 웃었다.


“호오. 예컨대 이건 연애 상담이로군요.”

“연애 상담? 그럴 리가. 우리는 이미 결혼한 부부야.”

“아하. 그렇다면 부부 간의 일을 상담하신다는 거군요. 혹, 두 분이 밤을 보내셨습니까?”

“큼!”

카시우스의 표정이 대답했다.

붉어져서는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러셨다면 이유는 하나겠지요. 밤이 만족스럽지 않았다거나.”

마담 투리엘이 간드러지게 웃었다.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온 어수룩한 남자가 나쁘지 않았다.

카시우스는 그만큼 레니샤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거니까.

검을 잡으면 잔혹한 지배자가 된다는 남자가 레니샤에게만큼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게 오히려 기꺼웠다.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카시우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카시우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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