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누군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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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누군가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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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누군가의 시선
2022.08.19.
렉서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렉서스는 한 번도 레니샤의 저런 표정을 본 일이 없었다.
렉서스를 보는 레니샤의 표정은 항상 같았다.
무표정이거나 차갑거나, 혹은 분노가 서려 있거나.
눈동자에 서린 은은한 분노가 레니샤를 더욱 차가워 보이게 만들었었다.
레니샤의 평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별짓을 다 했지만, 레니샤는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무너진 적이 없었다.
레니샤의 자존심에 렉서스가 매번 패배한 것이다.
“하.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지 않느냐?”
카나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렉서스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그제야 눈에 보였다.
“어?”
아무리 얼굴을 가렸다고 한들 카나리아가 레니샤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레니샤는 카나리아의 열망이자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었다.
잠을 자다가도 떠올리는 것은 렉서스의 얼굴이 아니라 항상 레니샤의 얼굴이었다.
“저 여자가 왜 여길…….”
저도 모르게 레니샤를 낮춰 지칭한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렉서스는 카나리아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의 시선은 레니샤에게 붙박여 있었다.
우산 사이에 가려졌던 레니샤의 얼굴이 드러났다.
레니샤와 함께 있는 남자는 카시우스였다.
“유치찬란한 우산을 쓰고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게다가 저런 천박한 차림새라니. 황후였던 시절이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이리 모습을 보이다니 체통도 없나 봐요.”
렉서스는 여전히 대꾸가 없었다.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팔을 괜히 끌어안았다.
오늘 같이 외출을 해서 그들 사이의 돈독함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던가.
렉서스에게 애교를 살살 부리면서 그의 비위를 맞췄다.
항상 하던 일이었지만, 임신을 하고 나니 대우 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도 카나리아는 렉서스의 발밑을 기는 짐승만도 못한 처지였다.
이제 카나리아는 황후로 점 찍힌 사람인데도.
귀족들이 전부 인정한 황후 말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런 취급이라니.
렉서스가 아무리 레니샤를 막 다뤘어도 카나리아만큼은 아니었다.
그것이 문득 서러워졌다.
지금 카나리아가 뭐라고 떠들어대도 들리지 않는 듯 구는 것도 싫었다.
‘여전히 레니샤, 레니샤, 레니샤!’
카나리아가 화를 꾹 눌러 참았다.
그나마 나아진 것은 카나리아도 렉서스의 이름을 편히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거다.
“렉서스.”
카나리아가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건 신경 꺼요. 어차피 떠날 사람들이잖아요. 네? 카나리아가 이렇게 조르잖아요.”
카나리아가 귀엽게 팔을 흔들었다.
렉서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카시우스를 향한 분노가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대체 왜, 카시우스가 무엇이라고.
저 남자가 렉서스와 뭐가 달라 레니샤가 저렇게 대한단 말인가.
레니샤가 저렇게만 굴었어도 그들의 결혼은 이런 식으로 파토 나진 않았을 것이다.
렉서스 또한 마음을 너그럽게 먹고 로테라를 살려줬을지도 모르지.
‘그래, 이건 내 잘못만은 아니야.’
렉서스의 끈질긴 미련과 열등감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렉서스!”
카나리아가 째지는 목소리로 렉서스를 불렀다.
렉서스가 차갑게 뇌까렸다.
“닥쳐. 지금 내가…….”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레니샤를 보고 있잖아.
지금이 지나고 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를 사람이었다.
왜 이제 와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들처럼 웃고 있는 레니샤가 보이는 건지.
“렉서스……!”
렉서스가 몸을 거칠게 돌려 카나리아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거칠게 카나리아에게 입을 맞추며 렉서스가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눈을 번뜩이는 렉서스를 카나리아가 끌어안았다.
아무리 그래도 렉서스의 곁에는 카나리아가 있었다.
레니샤가 아니라……!
***
카시우스가 어제의 기억을 돌이켜보았다.
레니샤와의 추억이 하나 더 생겨난 것이다.
입을 맞추고 나서 레니샤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뺨을 맞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레니샤는 웃어주었다. 비에 젖은 채로 예쁘게.
카시우스는 그것만으로도 모든 게 충만해졌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이처럼 웃던 얼굴도 머릿속에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커흠.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샴디르의 왕자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카시우스가 목을 가다듬었다.
오늘 하루 종일 넋을 빼놓고 있다가 타박을 받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좋은 일이 있으셨던 모양인데.”
“아닙니다.”
메테오가 피식 웃었다.
카시우스는 얼굴로 모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속이 절대적으로 드러나는 사람.
그런데도 저렇게 시치미를 떼다니.
“왜. 좋은 일은 같이 나누면 더 좋지 않습니까?”
“……내가 가진 기억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카시우스가 금안을 노랗게 빛냈다.
“하하.”
카시우스가 위대한 영웅이며 뛰어난 기사인 것은 알겠다.
그리고 마주한 인상을 보았을 때 남을 속이는 교활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럼에도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글쎄.
메테오는 확신할 수 없었다.
레니샤는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책임질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능력도 출중했다.
그 누구도 레니샤가 황후인 것을 의심하지도,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메테오가 날카로운 눈으로 카시우스를 살폈다.
‘믿을 만한 사람인가?’
메테오의 판단에 모든 게 달려 있었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그녀를 대신해 보냄으로써 그를 믿고 있다는 것을 보였다.
‘황후의 판단은 항상 옳은가?’
레니샤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이 정상적이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렇게 저를 찾아주신 이유를 알고 싶군요.”
“레니샤는 왕자께서 만남을 바라시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카시우스가 덤덤히 말했다.
이런 돌발적인 질문에 당황해선 안 된다.
세 번째 만남에서도 어수룩하게 그럴 수는 없었다.
“말씀할 것이 없으시다면 저는 이 자리에 오래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왕자님.”
“이런, 공작께서는 성격이 급하신 것 같군요.”
메테오가 싱긋 미소 지었다.
카시우스는 메테오가 렉서스와 닮은 면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뱀 같은 남자였다.
카시우스가 품고 있는 것이 뜨거운 불덩이 같은 뱀이라면.
메테오는 반대로 정말로 능구렁이 같은 남자였다.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소모하는 걸 즐기질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없지요. 제 용건은 다음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메테오가 말을 아꼈다.
“하지만, 레니샤 님께서 절대로 실망하시지 않을 거라고 장담 드립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메테오는 분명 레니샤를 위한 어떤 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무엇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섣부르게 속을 드러내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카시우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였다.
***
꽤 긴 여정이었다.
서북부의 힐로샤인 영지는 땅덩이는 정말 최고라 그 경계 안에 들어서고 나서도 성에 도착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하도 말을 탔더니 그 위에서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레니샤가 당도한 성을 보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장장 일주일간의 여정이었다.
레니샤는 제도에서 나고 자라 그 밖으로 거의 나가본 적이 없었다.
남부에 위치한 로테라의 또 다른 영지를 제외하고선 말이다.
힐로샤인을 레니샤가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돌보았지만, 직접 와본 적은 없었다.
‘이렇게 오게 될 줄은 몰랐네.’
평생 제도에서 살다 죽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레니샤의 인생은 황제를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뜻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지만.
성을 훑어보는 레니샤에게 거친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카시우스였다.
“잡으십시오.”
잡고 내리라는 것이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손을 내민 것은 처음인데 이 또한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내내 기사로 살면서 전쟁터를 전전해서 그런가, 요령이라는 게 없다.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카시우스의 그런 우직함이 레니샤는 마음에 들었다.
촉촉이 그녀의 마음을 적셨던 비와 키스가 뜨겁게 남아 그녀를 흔들곤 했다.
지난 일주일간의 여정은 레니샤를 몇 번이나 시험에 들게 만들었다.
말 냄새와 섞인 뜨거운 남자의 체향이 레니샤를 가둘 때마다 숨이 떨렸다.
레니샤답지 않은 일이었다.
카시우스는 종종 숨죽인 채로 그런 레니샤를 관찰하곤 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앗.”
뻣뻣하게 굳은 몸이 말 위에서 굴러떨어져 카시우스의 품에 안착했다.
말캉이는 몸이 카시우스의 단단한 몸에 닿았다.
카시우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아.”
다행히 카시우스가 붙든 덕에 다치는 일은 면한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가슴을 짚고 균형을 잡았다.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카시우스를 보았다.
이렇게 서서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확실히 크다. 그리고 너무 크다.
레니샤가 어릴 적 크게 앓아 많이 자라지는 못했다고 해도 이 남자가 유독 큰 것은 맞는 듯했다.
그는 다른 이들 사이에서도 우뚝 솟아 있었다.
“흠. 카시우스?”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인 채로 카시우스를 불렀다.
“왜 그래요?”
목석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카시우스를 레니샤가 다시 한번 채근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었다.
그러자 레니샤의 눈에 달아오른 목덜미가 포착되었다.
“뭐야.”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걸로 부끄러워한다고?”
하루에도 세 여자를 돌아가며 품었던 황제가 알면 놀라 까무러칠 일이다.
게다가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이미 밤을 보낸 사이 아니던가.
카시우스는 매번 이렇게 새색시처럼 볼을 붉혔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이며 달콤하게 속삭였다.
“카시우스 지금 몇 살?”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카시우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리니 카시우스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제 머리색처럼.
“이런 일에 익숙한 이들이 이상한 겁니다.”
카시우스가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레니샤로부터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카시우스의 뒤를 레니샤가 쫓았다.
하지만,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카시우스를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오기가 생겨 뛰기까지 했지만 신장 차이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우뚝 서서 카시우스를 불렀다.
“카시우스. 나는 누군가의 뒤에서 걷는 게 익숙하지 않아요.”
레니샤가 알게 된 카시우스라면 더 이상 가지 않고 몸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였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부끄러움은 그대로 간직한 채였다.
레니샤가 사뿐사뿐 걸어 멈춰 선 카시우스의 곁에 섰다.
“나는 나란히 걷는 게 좋아요. 그랬으면 좋겠어요.”
황제와 나란히 걸을 때는 그와 손가락이 스치는 것조차 소름 끼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카시우스가 보폭을 레니샤에게 맞췄다.
이제는 이게 익숙해지려 하고 있었다.
***
깨진 창과 바닥에 쌓인 낙엽, 그리고 낡아빠진 창틀과 문.
바람 하나 막지 못할 것처럼 생겼다.
레니샤 생전에 이런 곳에 발걸음을 하게 되리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저택을 살펴보러 갔었던 린데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달려왔다.
“레니샤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