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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무너진 성의 희망 (42/135)


42화. 무너진 성의 희망
2022.08.23.



 
레니샤 부인. 새삼 그 호칭이 귀를 간지럽혔다.

낯선 땅에 도착해 있으니 자신이 일개 귀족 부인이 된 것이 와닿았다.

그런데 그게 또 듣기 좋다.

그간 황후였던 레니샤가 인간 레니샤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무슨 일이 있나?”

지금 이 성이 난장인 것 외에도 문제가 발생했단 말인가.

린데이가 고개를 마구 저었다.


“이 성은……. 이 성은 곧 무너질 것 같아요! 답이 없다구요!”

“그대가 그렇게 말할 만도 하지.”

그리고 린데이 다음으로 레니샤에게 달려온 것은 이사벨라였다.


“레니! 레니샤!”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여자아이가 레니샤의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숨을 헐떡였다.

하얀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이 성을 헤집고 뛰어다닌 결과였다.


“왜 그러니, 이사벨라?”

“여기! 너무 재밌어! 성 안에 쥐도 살고 새도 살아! 그리고 사슴도 살아!!”

이사벨라가 발을 동동 굴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달려 나갈 기세였다.

린데이와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레니샤가 미소 지은 채로 린데이를 보았다.


“그렇다는군. 이사벨라는 여기가 너무 즐겁다는데?”

“레니샤 부인…….”

레니샤가 까칠한 얼굴의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헬레나. 이사벨라를 데리고 성을 더 구경하도록. 아이가 즐겁다 하니 다행이군.”

“예, 공작 부인.”

헬레나가 이사벨라의 손을 잡고 총총총 사라졌다.

아이가 혹시나 다치는 일을 막아줄 것이다.

살펴보니 기사들 또한 이사벨라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온 사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이가 신이 나 재잘거리는 것을 보다가 레니샤가 입술을 열었다.


“린데이.”

“예, 레니샤 님.”

“그대는 고명한 가문의 귀부인이지. 이런 상황이 적응이 안 될 수도 있어. 많이 힘들 거야.”

레니샤가 린데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니샤 님! 저는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

“하지만, 나는 그대가 필요해. 린데이, 그대가 있었기에 내가 내궁을 훌륭히 꾸려나갈 수 있었지. 종종 밖의 일을 돌볼 때도 자네가 있었기에 헤쳐 나갈 수 있었어. 그러니, 이번에도 부탁해. 내 곁에 머물러줘.”

레니샤의 말에 가지 않겠다는 말을 입에 담으려던 린데이가 멈칫했다.

레니샤가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린데이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지금 레니샤는 진심으로 부탁하고 있는 거였다.


“린데이. 나를 도와줄 수 있겠어?”

린데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레니샤 부인께서 바라신다면 얼마든지요!”

레니샤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린데이가 남아준다고 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마워.”

 

***

성에 도착하기 무섭게 마을로 식료품과 당장 먹을 것을 사러 내려갔던 이들이 돌아온 것은 1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먹을 것이 있던가요?”

“거의 없었습니다. 이 퍽퍽한 호밀빵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육포와 저장성이 강한 식품들을 중심으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레니샤가 부드럽게 대꾸하고는 카시우스와 기사들이 사온 것들을 확인했다.


“흠. 좋아. 이 정도면 한동안은 버틸 수 있겠군요.”

레니샤가 보라는 듯이 딱딱하게 마른 육포를 꺼내 씹었다.

사실 레니샤가 먹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카시우스가 놀란 얼굴로 레니샤를 보았다.

퍽퍽하고 질긴 것을 물과 함께 삼켜 배를 대충 채운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말했다.


“할 일이 아주 많아요, 카시우스. 이런 곳에서 지낼 수는 없잖아요?”

“……그렇지요. 성이 아주 엉망이더군요.”

“고칠 여지가 있다는 게 어디에요. 그래도 우리가 지낼 침실은 어느 정도 정리를 해두었다는 군요.”

“내가 뭘 하면 됩니까?”

레니샤가 깨끗한 카시우스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를 믿어요?”

카시우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절벽 끝에 내몰려서 믿을 게 레니샤뿐입니다.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깔끔하고 단정적인 대답이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다음 레니샤의 손목을 붙들었다. 뜨거운 열기가 레니샤를 파고들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도 믿을 사람은 나뿐인 것 아닙니까?”

그러길 바란다는 바람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러게요.”

레니샤가 웃음을 흘리곤 카시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는 우리뿐이네요. 낭만적이게.”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서 몸을 떼어냈다.

그러곤 자유로운 레니샤의 손목마저 낚아챘다.

카시우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게 낭만적이라니. 레니샤의 취향은 종종 고약한 것 같습니다.”

파괴적인 말을 일삼는 것도 그렇고.


“그럼 이제 내가 뭘 할까요?”

카시우스가 재차 물었다.


‘역시 강아지 같은데.’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레니샤가 가볍게 카시우스를 털어냈다.

그나마 이제는 레니샤에게 닿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지난 일주일간 노숙을 하며 새벽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준 덕분일 것이다.


“린데이. 가서 금화 주머니를 2개만 가지고 와줘.”

“예, 레니샤 님.”

린데이가 내민 주머니를 카시우스에게 다시금 내밀었다.

카시우스가 주머니에 든 금화의 개수를 보고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걸로 뭘 하려는 겁니까?”

“일단, 카시우스.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성을 고칠 이들을 고용해야 해요. 그리고 개중 힘이 떨어지는 이들은 공사에 필요한 것들과 식료품을 옆 영지에서 사오는 게 좋겠어요. 여기엔 짐마차를 빌릴 금액도 포함되어 있어요.”

“그거면 됩니까?”

“일단은요. 지금 우리가 하려는 일은 성을 쌓는 것과 같아요. 하나서부터 천천히…… 하나씩 해나가는 거예요.”

카시우스가 턱짓해서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부인.”

“테리언 경.”

레니샤가 금화 주머니를 내밀었다.


“확실히 카시우스가 자리를 비우는 것보다는 그대가 대신 기사들을 데리고 다녀오는 게 좋겠군요. 짐마차를 빌려서 공사할 거리와…….”

“식료품, 거기에 더해서 의약품까지 사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될까요?”

“완벽하군요.”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다행히 테리언은 어느 정도 지금 레니샤가 하려는 일과 해야 할 일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곳에는 의약품도 부족한 게 당연했다.

게다가 그들 모두 처음으로 겪어보는 풍토와 환경이었다.

불시에 어떤 병이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테리언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기사들을 몇 데리고 출발했다.


“그다음은 뭘 해야 합니까?”

레니샤가 카시우스를 보았다.


“이 거대한 성을 겨울이 오기 전까지 보수를 끝내야 해요. 아마도 영지민이 얼마 남지 않았을 거예요. 새롭게 영지민들도 늘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레니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건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로테라의 핏줄이 돌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 본디 힐로샤인에 거주하던 자들이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힐로샤인에 숨겨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멍청하게 영지를 박대하고 방치하기만 했으니 다들 다른 곳으로 떠난 것뿐이었다.

그러나, 레니샤는 힐로샤인의 가치를 잘 아는 로테라의 사람이었다.

힐로샤인인들은 제 고향에 대한 애착이 강하니 레니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귀향할 이들이 태반일 것이다.


“영지민이 없는 영지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영지민들은……. 내가 데려올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고려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살아남은 이족들을 데리고 올 생각인거죠? 테리언 경이 돌아오면 부족민들을 데리고 오는 게 좋겠어요.”

레니샤가 씁쓸하게 웃었다.

레니샤에게는 없는 낭만이 카시우스에게는 살아 있었다.

그건 카시우스가 레니샤보다 강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내고 인간미를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 말이다.

카시우스가 영지를 바란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카시우스는 이족들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제국을 구한 영웅이었다.

그런 도드라지는 단어에 사교계가 얼마나 예민한데.

이미 카시우스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는 레니샤의 머릿속에 전부 들어 있었다.

카시우스의 그런 마음을 높이 산다.

그러니 그가 바라는 것을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말했다시피 영지민이 늘어난다면 오히려 이득이다.

하지만.


“그들은 힐로샤인에 대해서 잘 모르지요. 익히고 배우면 되겠지만 가르쳐줄 이는 필요한 법이에요.”

“……힐로샤인에 대체 뭐가 숨겨져 있는 겁니까?”

“그건 곧 밝혀질 거예요. 이제 그만 마을에 가서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게 어떨까요? 이 성을 보수하기 위해서는 마을 사람 전부를 데려와도 부족할 판이라.”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힐로샤인의 비밀이라.

힐로샤인이 거대한 황무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비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카시우스가 제 망토를 끌러 레니샤의 몸을 둘둘 말았다.

요령 없이 정말 말아놓기만 한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양손을 잡아 주물럭거렸다.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던 것이 있었다.


 


“여기가 춥습니까? 레니샤는 왜 이렇게 차가운 겁니까?”

레니샤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간 함께 살았던 황제도 몰랐던 것을 카시우스는 쉽게도 알아낸다.


“……춥지 않게 하십시오. 얼음장 같습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다녀와요.”

흔들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며 레니샤가 미소 지었다.


“착하군요.”

카시우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카시우스가 그의 일을 도울 하인들과 하녀들, 그리고 기사들을 데리고 성을 떠났다.

잠시 한적해진 성을 보며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시우스는 모든 일을 올곧게 받아들인다.

꼬아서 보질 않는다는 거다.

그에 반해 황제는 레니샤보다 더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좌시하고 있었던 데다가 성격도 만만찮았다.

카시우스는 렉서스 황제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여 들어준다.

지금도 그랬고 이곳으로 오는 여정 내내 그랬다.

카시우스 생각에 잠시 미소 짓던 레니샤가 린데이를 불렀다.


“린데이.”

“예, 부인.”

“먼저 급한 곳부터 손대기 시작해야 할 것 같아. 그래도 뒤져보면 쓸 만한 이불 정도는 있을 거야.”

“예!”

린데이가 함께 온 황후궁의 식솔들에게 손짓했다.


“흩어져서 쓸 만한 것들을 찾아오게. 지금 급한 건 주방에서 쓸 것들과 침구류, 그리고 커튼 같은 것들이네.”

“네, 린데이 님!”

사람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내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들이 꺼지지 않을 불꽃처럼 느껴진다.

레니샤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더 이상 당신에게 지지 않아, 렉서스.’

렉서스 황제는 이곳에서 레니샤가 카시우스와 함께 절멸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 낡아빠진 성을 내린 것만 해도 그랬다.

이건 레니샤에 대한 조롱이었다.

황제는 레니샤로부터 황후라는 이름은 빼앗았을지 몰라도 로테라라는 이름은 앗아가지 못했다.

그건 레니샤가 평생을 살면서 지킬 가치이며 이름이었다.

레니샤 로테라.

로테라 가문은 서북부의 힐로샤인을 토대로 다시 일어서리라.

다음에 로테라 가문의 검이 향할 곳은 황성이었다.

렉서스에게 이 모든 것의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아, 황후. 오셨소? 이걸 보시오! 적군이 내게 보내준 선물이지. 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일인지.’

술잔을 든 채로 휘청거리던 렉서스와 소금상자.

그 안에 들어 있던 두 구의 머리.

그날의 분위기와 코끝을 찌르던 냄새, 바닥이 무너진 것 같았던 감각.

마지막으로 죽을 것 같이 밀려오는 슬픔과 고통을 절대로 지울 수가 없었다.

덜덜 떠는 레니샤 앞에서 렉서스는 미소 지었다.

마치 그런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 슬퍼 마오. 로테라 공작 부부는 이 나라를 위해서 희생을 한 것이니. 이 얼마나 숭고한 죽음인지!’

개소리.

그건 전부 개소리였다.

그 빌어먹을 자식만 아니었으면 로테라 공작 부부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죽이기 위해서 몰아넣은 전쟁터 아니던가.

승산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없었던 전투였다.

사람들은 전부 매복이 있을 거라고 이야기했고 다른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었다.

그건 로테라 공작 부부도 같은 의견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부러 그 길로 공작 부부를 몰아붙였다.

그들이 이끌고 있었던 기사들의 목숨도 한 번에 불구덩이로 던져 넣은 것이다.

레니샤의 분홍색 눈동자가 번뜩이는 막이 씌워진 것처럼 번들거렸다.

그렇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사체 위로 황제가 와인을 퍼부었다.


‘자, 공작 부인이 와인을 즐긴다고 했었나?’

렉서스 황제가 광소를 터뜨렸다.

와인의 시큼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로테라 가문은 개국공신이었다.

그들은 이 제국이 열리던 순간부터 공작으로 존재해왔고 이 제국과 황실을 수호했다.

그 대가가 그것이었다!

현실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마 울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레니샤를 보며 렉서스 황제는 본색을 드러냈다.


‘그다음은 네 오라비다. 네 오라비와 그 아내를 죽여 네 앞에 가져다주지.’

그 날카로운 눈빛과 속에 숨겨져 있었던 경멸을 레니샤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황제가 레니샤를 황후로 만든 속셈이 처음부터 이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황제의 증오와 분노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레니샤는 황제가 멈추지 못할 것임을 알았다.


‘그러면 내가 멈춰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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