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이런 꼴이나 당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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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이런 꼴이나 당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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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이런 꼴이나 당하려고
2022.09.16.
카나리아가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로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내, 내가…….”
이런 꼴이나 당하려고…….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울음기에 섞여 삼켜졌다.
카나리아가 붕어처럼 부풀어 오른 눈으로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렸다.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는다.
눈물이 목 끝까지 차올라 그녀를 잠식시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과정조차 벅차게 느껴졌다.
바바라가 그런 카나리아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만 우세요, 황후 폐하. 그러게 어제 왜 다 내어주셨어요? 버티시지.”
“그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안 주니?”
카나리아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렉서스는 시녀들을 잔뜩 끌고 와서 카나리아의 방을 헤집었다.
그러고는 레니샤가 내놓았던 보석들을 전부 긁어모았다.
카나리아가 안간힘을 쓰고 끌어모았던 것들이었다.
‘그, 그걸 왜……? 폐하, 카나리아에게 잘 어울린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울리지. 어울려. 하지만, 카나리아. 너는 내게 아무것도 주지 못하는 황후가 아니니?’
‘그, 그런데요?’
‘고작 후계자를 낳아줬다는 이유만으로 가진 것도 없는 네가 황후가 되어 이런 걸 걸치고 다니면 다른 이들이 뭐라고 떠들어 댈까! 아, 렉서스가 미쳐서 발이나 닦는 하녀를 황후로 세우더니 분에 넘치는 것들을 쥐여 주는구나! 그렇게 떠들어 대지 않겠니?’
유독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하며 낄낄 웃던 렉서스의 얼굴이 낙인처럼 가슴에 남았다.
카나리아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는 느낌이었다.
‘그, 그러면 카나리아는 분에 넘치는 이런 사치품들은 하나도 가져선 안 된다는 건가요?’
‘무슨 돈으로 그 사치를 누리려 하느냐?’
렉서스의 분위기가 한 번에 반전되었다.
날카롭게 번뜩이며 카나리아를 노려보던 눈동자에는 번들거리는 광기가 고여 있었다.
‘내 돈으로? 내 정부일 때는 나는 너를 귀여워하기만 하면 됐었다. 그러니, 나는 네게 무한정 베풀 수 있었지! 네게서 받기를 기대한 것이 없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너는 황후가 되었단다, 카나리아. 그 자리가 감내해야 하는 의무의 무게에 대해서 너는 알고 있느냐? 나는 황후에게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바란다. 레니샤가 나를 위해서 그 많은 것들을 해주었듯이 말이야!’
카나리아는 이번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카나리아가 무엇도 주지 못하니 렉서스는 그녀에게 무엇도 베풀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카나리아가 조잡스럽게 남겨진 것들을 노려보았다.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자꾸만 떨어졌다.
레니샤를 돕던 이들은 전부 그녀가 데리고 나가버렸다.
그렇다고 카나리아를 무시하는 귀부인들이 그녀를 도와줄 것 같지도 않았다.
카나리아가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지금 수도에 남아 있는 것은 그나마 투리엘뿐이었다.
카나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투리엘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리엘도 생각이 있으면 후계를 가진 카나리아를 박대하진 않을 것이다.
똑똑한 여자이니 누구에게 줄을 서야 할지 스스로 더 잘 판단하겠지.
카나리아가 바바라를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외출할 준비를 해야겠어!”
“네, 황후 폐하.”
***
투리엘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얼굴이 퉁퉁 부어서 그녀를 찾아온 카나리아의 꼴을 보아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정말로 이곳을 찾아온 게 맞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나리아가 코를 훌쩍이곤 투리엘을 노려보았다.
행패를 부려 의상실에 있던 귀부인들을 전부 쫓아내고는 말도 없이 시위 중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겠다고 앉아 있던 투리엘이 질릴 정도로 긴 침묵이었다.
결국 투리엘이 의미 없는 줄다리기를 그만두고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오셔서 장사를 방해하시는 겁니까?”
존대를 사용하고 있으나 카나리아를 무시하는 시선만큼은 여전했다.
카나리아가 울컥하려는 것을 참고 고개를 저었다.
“장사를 방해하려는 의도는 없었네. 다만, 중요하게 할 말이 있어서.”
투리엘이 한숨을 삼켰다.
저 꼴을 보건대 렉서스에게 된통 당한 것이 분명했다.
레니샤의 단물까지 다 빨아먹었던 렉서스에게 카나리아가 눈에 차기나 하겠는가.
황후라는 자리를 너무 가볍게 여긴 카나리아의 잘못이었다.
그건 그냥 작위 하나가 아니었다.
한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어깨에 짊어져야 할 것들이 한둘이겠는가.
카나리아는 그런 것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아니었다.
“할 말을 하십시오.”
투리엘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그래도 이렇게 와서 매달리는 꼴을 보니 급하긴 급했나 보지.
“……자네도 생각을 해볼 때가 되었지. 지금 내가 임신을 하지 않았나. 레니샤 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어. 이다음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내 손을 잡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는 말이야. 히엔트리를 이을 수 있는 것은 히엔트리 황실의 자손뿐이니. 레니샤 황후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생각할 수 없을 텐데?”
카니라아가 몇 번이고 곱씹고 되짚었던 말을 했다.
다행히 틀리지 않고 제대로 말을 한 것 같았다.
카나리아는 투리엘이 분명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투리엘은 평온한 표정으로 찻잔이나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만약 물러서야 한다면 물러서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더 이상 제가 할 일이 남아 있지 않다면 이대로 물러서도 괜찮다는 말을 한 겁니다. 더 이상 정치 놀음에는 끼지 않고 하던 대로 바느질이나 팔면서 살면 될 일이지요.”
“마담 투리엘! 내가 지금 기회를 주겠다지 않나. 내 손을 잡으라는 말일세. 내 아이가 자네의 새로운 미래가 되어줄 거야!”
지금 보니 카나리아가 완전히 머리가 없는 건 아닌 듯했다.
그녀를 가장 박대하고 괄시했었던 투리엘을 찾아와 머리를 숙일 정도이니 말이다.
카나리아는 살아남기 위해서 그녀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투리엘이 느리게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여전히 카나리아의 시야는 좁았다.
새장에 갇혀 살아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생각의 깊이가 짧았다.
카나리아는 대체 왜 그 미래를 렉서스를 통해서 찾으려는 걸까?
차라리 레니샤를 통해서 찾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애초에 카나리아에게는 그런 생각은 감당할 수 있는 범주 밖에 있어서 그럴 것이다.
카나리아는 히엔트리의 성이 바뀌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을 테니.
“카나리아 님은 새장 속에서 노래하는 새가 가장 어울리십니다.”
“지금, 자네!”
“사람은 자기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카나리아. 카나리아로 사세요. 노래나 하면서 황제를 만족시키는 겁니다.”
카나리아가 부들부들 떨었다.
분노로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카나리아가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자넨 지금 황후를 모욕한 거야!!”
“하지만, 황후께서는 아무것도 못하시지요. 배행해주는 시녀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면 대신해서 저를 처벌해줄 호위기사라든가.”
“바바라가, 바바라가……!”
“시녀도 아닌 일개 하녀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투리엘이 차갑게 뇌까렸다.
“바바라?”
투리엘이 손끝으로 바바라의 턱을 추켜올렸다.
바바라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투리엘을 노려보았다.
“제, 제가 정식 시녀가 되고 나면……!”
“주인과 같은 꿈을 꾸는구나. 시녀가 되면 무엇이 달라지지? 아, 작위 받을 것을 기대하는 거니? 정말 제대로 헛꿈을 꾸는구나, 바바라. 황제가 정말로 네게 작위를 줄 것 같으냐? 시녀는 될 수 있겠지. 구색을 맞춰야 하는 데다가…… 네 황후를 모실 시녀도 없을 테니.”
투리엘이 카나리아를 무례하게 눈짓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투리엘의 말이 그들의 심장을 쑤셔대고 있었다.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해야지, 바바라. 그렇다고 한들 네가 나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카나리아, 아니. 그래, 황후 폐하. 황후의 말을 듣고 저를 벌해줄 자가 나타날 것 같습니까? 히엔트리의 어떤 귀족이 그리 해줄까요? 아이를 보고 들러붙는 자들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 또한 뼛속까지 귀족이라는 족속들임을 잊지 마셔야지요. 그 아이가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모르시는 겁니까? 황후 폐하를 죽이고 그 아이를 앗아다가 제가 황후가 되려는 여자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건 생각해보셨습니까? 그들이 무슨 의도로 당신을 황후 자리에 앉힌 건지! 이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투리엘이 신랄하게 웃었다.
귀족들이 똘똘 뭉쳐 카나리아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카나리아가 이를 바득 갈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투리엘은 이렇게 카나리아에게 말이라도 걸어준다.
귀부인 중에는 카나리아를 상대도 안 해주는 이투성이였다.
“자네 말이 맞아.”
카나리아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니 자네가 도와주면 안 되겠나? 자네가 레니샤 황후를 도왔듯이 나를 도와주게. 이 아이가 자네의 미래가 될 수 있도록.”
카나리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금세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머릿속은 멍하고 그녀를 이런 꼴로 만든 렉서스가 원망스러웠다.
아이만 가지면 탄탄대로일 것 같았는데 허물어진 모래성만이 그녀에게 남았다.
카나리아가 간절하게 투리엘의 손을 붙들었다.
“미래가 될 수 있도록…….”
투리엘이 그 말을 곱씹었다.
그 아이가 미래가 될 수 있도록.
투리엘의 기세가 누그러든 것 같자 카나리아가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렇다고 해서 고압적인 자세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제가 아니라 이 일을 레니샤 님께서 도우실 수 있으실 듯합니다만.”
그 순간 카나리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투리엘이 마지막 동아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레니샤 님께서 나를 도우시겠는가?”
“그건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레니샤 님께서는 렉서스 황제 폐하를 원망하고 계십니다. 만약, 황제 폐하를 모독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지 않으시겠습니까?”
투리엘이 목소리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럴까? 사실 레니샤 님이 나를 돕는다면 무엇이 무섭겠는가. 그렇지, 바바라?”
바바라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떼만 쓰던 카나리아가 지난 며칠 동안 깨달은 게 있는 듯했다.
그토록 싫어하던 레니샤의 도움을 받을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예, 황후 폐하. 그렇게 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레니샤 님께서 도와만 주신다면요.”
“그 부분은 제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고맙네, 투리엘.”
카나리아가 침을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방패막이라고 생각했었던 렉서스는 양날의 검이었고 증오했었던 레니샤가 동아줄이 되었다.
비참함에 눈물마저 멎었다.
투리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편지를 써주세요, 황후 폐하. 레니샤님께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고 부탁을 하는 편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