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레니샤를 쫓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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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레니샤를 쫓는 이들
2022.09.20.
투리엘을 찾아온 손님은 카나리아뿐만이 아니었다.
늦은 새벽을 틈타 샴디르의 왕자, 메테오가 찾아온 것이다.
사교계의 정보를 손에 전부 쥐고 있는 투리엘조차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방문이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합니다.”
메테오가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예의를 차리는 모습에 투리엘도 그를 받아들였다.
투리엘이 기거하는 저택의 집사장이 늦은 시간 찾아온 손님을 위해 직접 차를 내어주었다.
새벽의 쌀쌀함을 차 한 잔으로 녹인 메테오가 말했다.
“……레니샤 님을 뒤쫓다 보니 마담 투리엘이 나오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뵈었습니다.”
“전하실 말씀이 있는 겁니까?”
“제가 찾아온 것은 요청드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마담 투리엘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제 목숨을 레니샤 님께서 구하셨으니 그분께 해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저는 무엇이든 합니다.”
투리엘이 가지고 있던 레니샤의 패를 꺼내 보였다.
레니샤의 인장이 박힌 검은 광물로 만든 패는 레니샤가 직접 주문해서 만든 것이었다.
레니샤는 그것을 그녀를 위해서 일하는 자들에게 나눠주었다.
서로를 인식하기 위한 표식이었다.
메테오도 투리엘이 가지고 있는 패에 새겨진 레니샤의 인장을 알아보았다.
“……기사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검을 잘 쓰는 자라면 용병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황제가 아무래도 다른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 레니샤 님을 뵙기 위해 힐로샤인으로 가려고 합니다.”
“황제의 인가를 받은 일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메테오가 출발도 미루고 투리엘을 찾아온 것은 그런 이유였다.
황제의 낌새를 보건대 아무래도 메테오의 뒤에 사람을 붙이려는 것 같았다.
“제가 데리고 온 기사들이 히엔트리의 사람과 충돌하면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제국 사람이라면…….”
“꼭 힐로샤인으로 가셔야 하는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아무리 메테오와 샴디르가 레니샤에게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힐로샤인으로 가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제가 브릭스턴 님과 헤일린 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힐로샤인으로 가려는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딸그락.
투리엘이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그 서슬에 얌전히 놓여 있던 찻잔이 흔들렸다.
“지금……!”
메테오의 얼굴에는 거짓이 없었다.
투리엘의 심장이 큰 박동을 시작했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을 찾아 헤맸지만 여태 찾지 못하고 있었다.
카시우스도 따로 사람을 푼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어느 세력도 그들의 옷자락조차 발견하지 못했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이미 샴디르 측에서 그들을 은닉시키고 있었으니 말이다.
“두 분께서는 멀쩡하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투리엘이 응접실 안을 서성거렸다.
메테오가 반드시 그녀를 찾아와야 했던 이유를 완벽하게 깨달아 버렸다.
메테오는 브릭스턴과 헤일린을 무사히 힐로샤인으로, 레니샤의 곁으로 보내주려는 것이다.
자신을 걸고서.
황제는 의심이 많은 자이니 메테오가 힐로샤인으로 가려는 또 다른 이유가 없는지 알아내려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잡음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잘못하다가는 브릭스턴과 헤일린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일은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일을 꾸미겠습니다. 다만, 준비하는 데 시일이 조금 더 걸릴 듯합니다. 이틀 정도의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정도는 괜찮을 듯합니다.”
투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님께서 떠나실 거라는 것을 또 누가 알고 있습니까?”
“일행의 규모가 커질 듯하여 숨기지는 않았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투리엘이 자리에서 앉아 빠르게 속삭였다.
지금 안일하게 새벽잠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는 가봐야 할 곳이 있을 것 같군요. 왕자님께서는 돌아가셔서 떠날 준비를 마저 해주십시오. 요란하게 구셔야 합니다. 가져갈 것이 많아 아직 떠나지 못했다는 식으로, 물건을 매입하시고 새로운 마차를 하나 더 구하십시오. 황제의 눈을 조금이나마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막내 왕녀님께 드릴 선물을 준비한다고 하시면 되겠군요.”
“그리하겠습니다.”
메테오가 떠나고 투리엘도 잇따라 저택을 빠져나왔다.
검은색 후드를 쓴 투리엘이 그녀를 지키는 기사들과 함께 어둠 속에 녹아들었다.
투리엘을 태운 흑마가 최고 속력으로 달려나갔다.
새벽의 숲을 밟아 인기척을 최대한 지운 채로.
***
제도에서 전보가 도착했다.
그나마 마을의 전보국이 멀쩡했었던 덕에 이런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오랜만에 전보국의 벨이 울린 덕에 마을도 떠들썩했다.
전보국에 온 우체부에게 전보국 기사가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의 수신인을 확인한 우체부가 입을 열었다.
“이건 로테라로 가야겠군.”
“역시, 로테라가 돌아오니 마을도 기능을 하는 것 같지 않나?”
“그러니 솔레인께서도 레니샤 부인의 손을 잡은 게 아니겠나. 부인께서 바라시는 일에는 적극 협조하라는 말씀을 하셨다며?”
“힘 좀 쓴다 싶은 마을 장정들이 죄다 성으로 몰려갔대. 그리고 아낙들은 호미를 들고 광석을 캐러 갔다지 않나. 우리 마누라도 지금 호미하고 바구니 찾아들고 그 뒤꽁무니 쫓아갔네.”
“광석?”
“그 왜. 발에 채이는 검은 광석 말이야. 그걸 에테르라고 부르기로 했다던데. 아무튼, 그걸 캐가면 공작 부인께서 돈을 주신다고 하신 모양이야! 솔레인께서도 적극 권장하시니 저어할 이유가 뭔가.”
“역시 힐로샤인에는 로테라가 있어야 해.”
남자들이 웃으며 헤어졌다.
우체부의 손에 들린 편지는 정확하게 레니샤에게 도착했다.
***
린데이와 함께 저택이 보수되어 가는 과정을 직접 살피고 있었던 레니샤가 편지를 받았다.
투리엘이 보내온 편지였다.
투리엘은 레니샤가 가지고 있었던 사업체 전반을 넘겨받았다.
제도에서 레니샤의 일을 대신 보고 있을 텐데 이렇게 편지를 보내온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레니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도 아니면 제도에 기거 중인 귀족들의 동향을 보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편지는 레니샤의 예상과는 확연히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다.
<레니샤 님.
늦게나마 제 잘못을 깨닫고 그에 대한 죄를 청하고자 편지를 씁니다.>
투리엘의 이름으로 왔지만, 그녀의 편지가 아니라 카나리아로부터 온 편지였다.
“하하.”
레니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린데이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레니샤는 무언가 시원한 것 같기도 하고 씁쓸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제가 오만방자하였습니다. 하여, 레니샤 님께 심려를 끼쳐드리고 우환을 겪게 해드렸으니 이 죄를 어찌 청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간의 일을 전부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대체 카나리아가 마음을 바꿔 먹은 이유가 무엇일까.
카나리아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일을 단편적으로 보고 판단한다.
카나리아라면 아이를 가졌으니 귀족들이 그녀를 떠받들 거라고 생각해야 옳았다.
대체 어떤 심경의 변화로 이런 편지를 쓴 것인지 궁금했다.
<레니샤 님, 아직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아이를 봐서라도 저를 살려주세요. 저는 그간의 죄를 청하는 마음으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살겠습니다.>
“살려달라?”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가 살기를 머금었다.
카나리아는 렉서스의 귀에 악랄한 말을 속삭이고 로테라와의 사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로테라 공작 부부의 죽음에 카나리아의 공이 없다고 절대 말할 수 없으리라.
카나리아로 인해서 잃은 것이 많은 레니샤에게 목숨을 구명하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정말로 레니샤를 믿고 아이와 자신의 목숨을 위탁하겠다는 것인지 의구심도 들었다.
카나리아가 아무리 멍청하다고 한들 사리 판단은 할 줄 알 터인데.
그게 아니면 황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렉서스가 정신이 나가 제 아이를 가진 여자도 죽일 마음을 먹었나.
그 아이가 자신의 황위를 앗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작 부인,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아니네.”
레니샤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구구절절하게 늘여 쓴 편지는 결국 자신의 목숨을 구명해달라는 간청이었다.
‘투리엘을 찾아가다니.’
카나리아치고는 머리를 많이 썼다 싶었다.
‘대체 렉서스가 무슨 짓을 했길래.’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편지는 투리엘이 나를 위해서 보낸 재롱쯤 되겠군.’
투리엘 또한 카나리아를 진심으로 도울 생각은 없을 것이다.
적당히 단물을 빨고 뱉어내려는 속셈이겠지.
‘카나리아, 카나리아.’
그 여자를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정원수를 더욱 아름답게 자라게 하려면 가지치기를 잘해야 하는 법이다.
너무 풍성한 나무는 오히려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카나리아는 잘라내야 하는 가지 중의 하나였다.
히엔트리를 위해서라도.
레니샤가 편지를 접어 린데이에게 건넸다.
“이건 어떻게 할까요?”
“그리 중요치 않은 것이니 태우게. 카나리아의 일은 투리엘이 알아서 할 거야.”
“네, 황후 폐하.”
카나리아는 곧 정식으로 황후가 된다.
황후가 된 카나리아는 싫든 좋든 샬롱을 열고 귀부인들을 대접해야 했다.
레니샤가 입술을 느리게 끌어 올렸다.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먼 길이기는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간 레니샤가 없는 제도에서 불편을 겪었을 이들에게 그녀를 각인시키는 기회가 될 것이다.
“카시우스는 어디에 있지?”
“지금 수련장에 계십니다.”
레니샤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
“……요조숙녀께서 다루시는 검은 절대로 귀엽지 못하군요.”
기사가 헉헉거리며 카시우스에게 말했다.
퍽!
카시우스가 내지른 검이 바닥에 누운 기사의 옆얼굴을 스쳐 바닥에 박혔다.
기사가 몸을 옆으로 굴리며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입을 막아주지.”
“뭘 발끈하고 그러십니까? 요조숙녀, 잘만 어울리시는데.”
카시우스가 눈을 번뜩였다.
“자네도 요조숙녀로 만들어줄까? 아래가 허전해보고 싶나 보지?”
“어이쿠!”
바닥에 편히 누워 낄낄거리던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며 바닥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끝날이 상한 것을 만지작거리던 카시우스가 몸을 돌릴 때였다.
“카시우스.”
이 모든 일의 원흉, 레니샤가 나타났다.
봄처럼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시간 돼요?”
부드럽게 묻는 말에 카시우스가 홀린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들고 있던 검을 갈무리해서 레니샤에게로 가는 카시우스를 보며 기사들이 혀를 찼다.
카시우스가 벗어두었던 셔츠를 어깨에 걸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저게 강아지가 아니면 뭔데……? 부르기만 하면 가면서.’
전쟁터의 살인귀라고 불리던 카시우스가 지금은 순한 강아지로 보였다.
멍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