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갑작스러운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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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갑작스러운 손님
2022.10.04.
성은 빠른 속도로 수복되어 가고 있었다.
솔레인의 지지로 마을의 장정들은 모두 몰려와 일을 돕고 있었고 힐로샤인의 영지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어서 점점 더 속도가 붙고 있었다.
레니샤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지의 여자들은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나가 검은 뱀의 비늘을 캐고 있다고 하더군요. 채굴량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어서 이 정도 채굴량이면 기사들의 무기와 갑옷을 만드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고 합니다.”
린데이의 보고에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광물에도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겠지. 언제까지고 검은 뱀의 비늘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데다가 밖에까지 검은 뱀의 존재를 알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미스릴. 미스릴이라고 부르는 건 어떻겠나?”
“적당한 이름인 것 같아요, 부인. 부르기도 쉽고 뱀과도 연관이 없어 보이는걸요.”
“좋아. 그러면 이 이야기는 적당히 퍼뜨려 주게. 그리고 헨리는 잘 지켜보고 있는 거지?”
“네, 부인.”
“별다른 움직임은 없고?”
“네.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습니다. 외부와 접촉하는 일도 없었고요.”
“흐음.”
렉서스가 헨리를 보내왔을 때는 감시의 목적이었을 것이다.
레니샤에게 있어서 헨리는 필요악이었다.
성의 집사장 역할을 해줄 이도 필요했고 그를 받아들여 렉서스의 의심도 피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한 요소이기는 했다.
헨리가 레니샤와 비밀 협정을 맺었다고는 한들 그의 주인은 렉서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헨리는 필요에 의해서라면 렉서스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가능성이 있었다.
“렉서스도 잠잠하고. 대체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단 말이야.”
레니샤가 중얼거렸다.
투리엘도 카나리아의 편지를 보내온 이후에는 잠잠했다.
투리엘은 카나리아를 자신의 패로 이용할 생각인 듯했는데 그건 투리엘에게 맡겨둘 일이었다.
“헨리에게 더 사람을 붙여둘까요?”
“좋아. 이런 시기일수록 더 조심해야지.”
힐로샤인 사람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확인한 레니샤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대장간을 활성화시키고 그곳에서 무기와 갑옷을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카시우스가 데리고 온 기사들 외에도 힐로샤인의 지원자들을 기사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장정들은 오전과 오후에는 성을 보수하고 개중의 지원자들은 밤에 수련을 받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일반인이 기사의 기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힐로샤인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다.
검은 뱀의 정기를 듬뿍 먹은.
덕분에 성취가 빠른 편이라고 카시우스가 말했었다.
‘……늦어도 내년 봄에는.’
그때는 레니샤가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상념에 잠긴 레니샤를 일깨운 것은 제도에서 온 소식이었다.
레니샤는 그간 렉서스가 헨리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직접 사람을 보내왔으니 말이다.
***
마을 아이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황성에서 온 새로운 손님들을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이사벨라도 그 사이에 끼어서 까치발을 들었다.
속에 든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눈 이후로 이사벨라 또래의 아이들은 그녀와 함께 어울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마을 곳곳을 쏘다니며 다 자란 체를 하며 일손을 돕겠다고 기웃거리다가 황성에서 손님이 온다는 말에 달려온 거였다.
이사벨라가 모자를 꾹꾹 눌러썼다.
하녀들이 이사벨라의 얼굴이 타지 말라고 씌워준 모자였는데 이렇게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아이들과 돌아다니기 편하게 입혀준 멜빵 바지도 정체를 숨기는 데 도움이 되었다.
고상한 이들은 귀족 영애가 이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
이사벨라가 그녀를 지켜보는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저들이 이사벨라를 이곳에서 탈출시켜줄 것이다.
황성에서 온 이들이라는 말에 작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거대한 말이 모여든 아이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긴 행렬이었다.
“뭐야. 황성에서 누굴 보낸 거지? 이사벨라, 너는 알겠어?”
이사벨라가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제대로 못 봤어.”
“나는 얼굴은 봤는데. 가장 맨 앞에 서 있었던 남자 말하는 거지? 정말 잘생겼던데! 우리 공작 각하만큼이나 잘생겼어!”
“그건 아니지. 공작 각하는 정말, 정말 잘생겼다고?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어디서도 찾기 쉽지 않아. 우리 엄마도 그랬어.”
아이들의 순수한 칭찬에 이사벨라의 어깨가 한 뼘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레니샤 부인도 마찬가지지. 나는 처음에 부인을 봤을 때 천사가 온 줄 알았다니까?”
“맞아, 맞아.”
이사벨라가 그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담으며 으쓱하고 있을 때였다.
이사벨라를 보호하고 있던 기사들이 나타나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네?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이사벨라가 놀란 얼굴로 기사에게 되물었다.
이제는 기사들이 장난처럼 아가씨 타령을 하는 것에도 익숙해졌다.
“레니샤 부인께서 찾고 계셔.”
“……무슨 일이 생긴 건…….”
이사벨라가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을 재차 했다.
기사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 이사벨라.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기사가 이사벨라의 모자 위를 꾹 눌렀다.
예전에 비해서 지금은 여자애 티가 확 난다.
기사가 이사벨라와 눈높이를 맞춰 허리를 숙였다.
“내가 지켜줄 테니까 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알겠지, 아가씨?”
이사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이사벨라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는 린데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성에서 황제가 보낸 사람들이 당도했다.
그 속에 간자가 숨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샴디르의 왕자가 돌아가는 길에 인사하기 위해서 힐로샤인을 방문하겠다고 했고 황제는 캘리엇 백작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모두 레니샤에게 우호적인 자들이었지만 어떤 문제가 생기기 전에 막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아가씨. 지금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네.”
이사벨라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의 결정은 항상 이사벨라를 위한 것이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린데이는 직접 이사벨라를 유모의 품에 안겨주고 나서야 안심했다.
이사벨라의 방문도 직접 닫아주었다.
린데이가 레니샤에게 돌아갔을 땐, 그녀는 카시우스와 함께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중이었다.
“샴디르로 이제야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레니샤 님.”
메테오가 정중한 몸짓으로 레니샤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 순간 카시우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레니샤의 어깨를 붙들어 뒤로 물러서게 한 카시우스가 목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들러줘서 고맙소. 힐로샤인에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손님이라 부족한 부분이 있을 것이오. 언제 떠날 예정이라고?”
“이곳까지 오는 길도 만만치 않더군요. 한동안 여독을 푼 이후에 돌아갈 생각입니다.”
메테오와 카시우스의 눈이 마주쳤다.
메테오는 전날 카시우스와 독대했을 때 어딘가 의미심장한 기색을 풍겼었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분명 메테오가 품고 있는 비밀을 풀어 놓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힐끗 보았다.
레니샤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다.
메테오가 레니샤의 가까이에 있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메테오는 젊은 왕자였고 수완가로 유명했다.
게다가 레니샤를 향해서 공공연한 호의를 보여왔었고.
그리고 카시우스는 메테오가 레니샤를 보는 눈빛이 싫었다.
“그러면 먼저 여독을 푸세요. 오늘 저녁 만찬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성이 이 모양이라 공작의 말처럼 부족할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급하게 오느라고 연락도 드리지 못한 것을요. 잘 자리만 내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데이가 멀쩡한 방을 골라 손님들에게 배정해주는 사이 레니샤는 캘리엇 백작을 만났다.
카시우스도 함께였다.
밀폐된 응접실을 한 번 둘러본 캘리엇 백작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경계심이 강한 남자는 주변에 염탐하는 이가 있는지 살펴본 것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메테오 왕자가 힐로샤인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황제가 저를 지목해 왕자를 호위하도록 했습니다.”
레니샤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
캘리엇 백작이 데리고 온 자들은 백작이 손수 키워낸 이들이었다.
게다가 많은 인원을 호위하는 것치고는 기사들의 수도 적은 편이었다.
“메테오 왕자가 여길 찾아온 이유를 아는가?”
캘리엇의 반응으로 보건대 메테오의 방문 목적이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직접 듣고 보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그렇군.”
“황제로부터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들으시겠습니까?”
레니샤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이지?”
“……바라신다면 제도로 와서 지내도 된다고 하더군요.”
“뭐?”
레니샤가 헛웃음을 지었다.
렉서스가 미친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결혼식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이미 카나리아는 황후로 등극했는데 결혼식도 못 올리고 있으니 치욕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황제는 그런 것에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카시우스가 차갑게 말을 잘라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카시우스에게로 쏠렸다.
팔짱을 끼고 레니샤의 곁에 정물처럼 앉아 있던 카시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레니샤는 어디도 가지 않아.”
“카시우스.”
레니샤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서렸다.
“내가 없이는, 어디도.”
레니샤가 단단한 카시우스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희미한 분노가 서린 얼굴이 레니샤를 향했다.
“그렇죠, 레니샤?”
“물론이에요, 카시우스. 당신이 함께하지 않으면 어디도 가지 않을게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팔을 토닥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캘리엇 백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불현듯 한 것이다.
게다가 두 사람은 정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얽혔다고만 생각했는데…….
“……황제는 분명 속셈이 있을 겁니다. 레니샤에게 괜히 호의를 베푸는 게 아닐 거예요. 나는 그걸 걱정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카시우스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질투하는 거잖아. 나도 다 알아,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돌처럼 굳었다.
질투?
렉서스를 질투해? 내가?
“제, 제가요?”
더듬거리는 카시우스에게 레니샤가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러면요? 내가 보기엔 질투 같은데.”
나른한 미소를 보며 카시우스가 입을 벌렸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는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