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쫓고 쫓는 (58/135)


58화. 쫓고 쫓는
2022.10.18.



 
무슨 일인지 상기된 표정으로 레니샤가 얼굴을 가리고 서 있었다.

카시우스는 자리를 비우고 없는데 식탁 위는 왠지 헝클어져 있었다.

린데이가 방 안의 분위기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알아도 모르는 척, 몰라도 모르는 척.

그게 바로 훌륭한 시녀장의 덕목이었다.

린데이가 데리고 온 하녀들을 앞으로 떠밀었다.


“공작 부인, 데리고 왔습니다.”

“헬레나, 제인…….”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심호흡해도 달뜬 얼굴이 가라앉질 않는다.

카시우스는 짧은 시간 안에 효과적으로 레니샤를 흐트러뜨렸다.

지금은 안 된다니, 그럼 조금 있다가는 된다는 뜻인가?

물론, 물론…….

레니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카시우스로 인해서 이렇게까지 당황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요조숙녀 같던 착한 그녀의 강아지가 이상하게 진화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럴 때가 아니잖아.’

얼른 이 일을 해결해야 이사벨라와 소공작 부부의 일도…….

그리고 오늘 브릭스턴과 함께 부모님을 모실 자리도 보러 가기로 했다.

그 땅의 황폐함은 카시우스가 해결해주기로 했으니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레니샤가 애써 평소의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이 지난 새벽에 저택을 빠져나갔었다고 들었다.”

“맞습니다.”

헬레나가 덤덤하게 고했다.


“그리고 물으실 바를 감히 알고 있습니다. 고변하건대, 집사장의 일은 제가 한 짓이 맞습니다.”

“헬레나!”

제인이 새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헬레나의 팔을 흔드는 제인의 손길은 다급했다.

헬레나는 무언가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제인을 두고 홀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짓쳐 올랐다.

제인이 입술을 달싹였으나, 레니샤가 좀 더 빨랐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

“집사장을 지켜본 결과, 그 사람은 자신의 이익이 무엇보다 먼저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브릭스턴 님의 일을 황제에게 알릴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 귀에 헛된 말이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눈을 멀게 해서 한동안 시간을 벌고, 저택의 입단속을 할 생각이었니?”

“어차피 제가 집사장의 뒤를 쫓고 있으니 귀를 막는 것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저보다는 저를 믿어주신 레니샤 님을 믿었습니다.”

헬레나는 막힘없이 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변명도 없이 깔끔한 인정이었다.

레니샤는 그 맑은 눈동자에서 단단한 결기와 마음을 읽었다.

헬레나는 레니샤를 향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나를 믿었다. 그러면 너는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헬레나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레니샤 님을 위기에서 구해드려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레니샤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맑은 웃음소리에 헬레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솔직한 충성심이라니. 나는 그런 것을 아주 아끼는 편이지. 그렇지 않나, 린데이?”

린데이가 간신히 웃음을 되찾았다.

린데이 또한 헬레나와 제인에 대한 감정이 깊었다.

어렸던 아이들을 데려다가 지금까지 돌보고 하녀로 교육 시킨 것이 린데이였던 것이다.

린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덕분에 일이 쉬워진 것은 사실이란다, 헬레나.”

레니샤가 은근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 네가 내린 독단적인 결정이 나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어. 이번 일처럼 간단하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거다. 그래서 군법에 따르면 너는 사형을 당해 마땅하다는구나.”

헬레나보다 제인의 얼굴이 더 하얗게 질렸다.

엉덩이를 들썩거리는 제인을 헬레나가 붙들었다.

레니샤가 허리를 숙여 헬레나의 턱을 쥐었다.

레니샤의 가는 손가락이 헬레나의 턱에 자국을 남겼다.


“어떻게 생각하니?”

“저, 저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제 목적을 이루었고 레니샤님을 지켰어요. 그러니 저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제인,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제인이 눈물을 흘렸다.

헬레나를 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애와 충성심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헬레나의 손을 움켜쥔 채로 제인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레니샤가 어떤 결정을 하던 제인은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 상실감은…….


“린데이?”

“……뜻대로 하소서.”

린데이가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가 눈물바다가 된 선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레니샤가 헬레나를 놓아주고 허리를 폈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이런 갸륵한 충성심은 오히려 아껴줘야 옳았다.

그저 적당한 경고가 필요했을 뿐.


“그 마음, 방금 그 두려움. 꼭 기억하렴, 헬레나.”

헬레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을 가슴에 새겨. 내가 그리 자비롭지 못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니?”

헬레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살려주시는 거예요?”

“귀엽기는.”

레니샤가 제인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것을 감명받은 표정으로 받아든 제인이 비틀거리며 헬레나에게 몸을 기댔다.


“이 일은 내가 마무리 지을 거다. 그러니 너희는 뒤로 빠져 있어. 헬레나, 너는 지금처럼 헨리를 감시하면 된단다.”

“그러면…….”

“너는 지금부터 헨리와 일을 하게 될 거야, 헬레나.”

레니샤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자의 수족이 되렴. 입 안의 혀처럼 굴면서 헨리의 넋을 빼놔.”

“그게 무슨…….”

“헨리는 네가 말해주는 것만 듣는 거다, 헬레나. 헨리가 황제에게 네가 바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게 만들어. 할 수 있겠니?”

헬레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할 수 있어요.”

헬레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레니샤가 미소 짓는 얼굴로 헬레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구나, 헬레나.”

그 말에 헬레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레니샤를 위해서 일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수십 번 되뇌었다.

***

레니샤가 헨리를 진료하고 있던 주치의를 잠시 불렀다.

불안감에 질려버린 헨리의 비명이 방 안에서 울려댔다.

레니샤가 입술을 느리게 끌어 올렸다.


“독약에 대한 이야기는 함구하게.”

“부인……!”

“헨리는 힐로샤인의 향토병으로 인해서 저렇게 된 것으로 해주게. 의서를 뒤져보면 그런 병이 한두 개쯤 나오겠지?”

레니샤의 말에 의사가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사장님께서 독이 아니냐고 물으시더군요.”

“잘 둘러대야겠지? 모든 건 말에서 시작돼서 말로 끝난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의사가 긴장한 표정을 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레니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곧 헨리를 보살펴줄 하녀가 올 거네. 그 하녀의 도움을 받도록 하게.”

“예, 부인.”

레니샤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헨리가 있는 방을 한동안 주시했다.

헨리는 자신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걸 숨기기 위해서라도 자신에게 생긴 변고를 황제에겐 알리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고 나면 남는 것이 없을 테니.

다만, 기를 쓰고 레니샤의 약점을 퍼 나르려고 하겠지.


‘그렇게 둘 리가 없지, 헨리. 안 그런가?’

어제의 아군이 오늘의 적군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헨리는 어제의 아군이었다.

오늘은 적군이 되어버린.

레니샤의 입술이 느른하게 휘어졌다.

적을 알면 승리도 거머쥘 수 있는 법.

레니샤는 헬레나가 잘 해낼 것을 믿고 있었다.

***

레니샤가 심호흡을 했다.

오늘 오전이 너무 길었다.

시킨 대로 방 안에 얌전히 있던 이사벨라가 레니샤를 발견하고는 뛰어왔다.


“고모.”

목이 막힌 것처럼 작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사벨라, 불안했니?”

이사벨라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아무 일도 아니라는데…… 그런데 나를 가둬둘 리가 없잖아. 고모를 보겠다고 해도 안 된다고 하고.”

“이사벨라, 나는 네가 생각보다 더 단단하다고 생각해.”

“고모……?”

이사벨라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작은 얼굴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회색 눈을 보며 레니샤가 눈살을 찌푸렸다.

레니샤가 애틋한 손길로 아이의 눈가를 매만졌다.

이 눈을 보면, 아이의 짧은 머리카락과 등의 상처를 보면 브릭스턴과 헤일린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

레니샤도 이렇게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


“이사벨라, 네 부모님을 찾았어.”

“어……?”

이사벨라가 창백하게 질렸다.

숨을 헐떡거리는 아이의 등을 레니샤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느리게 심호흡해. 놀라서 그래. 할 수 있지?”

이사벨라의 작은 손을 꼭 붙들고는 레니샤가 함께 호흡을 골라주었다.

이사벨라가 한참이 지나서야 안정을 되찾았다.

이사벨라의 작은 얼굴이 축축한 눈물로 젖어들었다.


“엄마랑 아빠……?”

“그래.”

“어, 어…….”

이사벨라가 입술을 더듬거렸다.


“안, 안 돌아가셨어?”

“그래.”

“나, 나는…… 나는…….”

이사벨라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돌, 돌아가신 줄…….”

“이사벨라…….”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눈높이를 맞춰 무릎을 굽혔다.

이사벨라의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레니샤가 속삭였다.


“안 돌아가셨어. 내내 이사벨라를 찾고 있었지. 그리고 지금은 이사벨라를 보기 위해서 이곳에 와 있어.”

이사벨라가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느린 속도였다.


“이사벨라가 준비되었다면 지금 보러 갈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이사벨라가 새된 음성으로 외쳤다.


“지금 당장 보러 갈래요.”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레니샤가 이사벨라의 눈물을 부드럽게 거둬냈다.


“그렇게 하자.”

이사벨라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브릭스턴과 헤일린은 아이가 살아있다면 어떤 모습이든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다리 하나가 없어도 되고, 팔 하나가 없어도 괜찮으니 제발 멀쩡히 살아만 있어 달라고.

그런데, 두려운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가지는 파급력에 대해서는 간과했던 것이 분명했다.


“이, 이사벨라……! 네 모습이……!”

“독약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레니샤가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답을 내어주었다.

헤일린의 눈이 레니샤를 향했다.


“도, 독이요? 이 작은 아이에게……?”

“엄마, 나 이제 괜찮아. 나 정말로 괜찮은데…… 아픈 데도 없고…….”

“어, 어억……!”

헤일린이 꺽꺽거리면 눈물을 토해냈다.

차마 아이를 만지지도 못하고 그 앞에서 무너지는 헤일린 옆에는 브릭스턴이 있었다.

브릭스턴 또한 이사벨라의 손을 붙든 채로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렸다.


“이사벨라, 이사, 우리 딸! 흐으……! 얼마나 아팠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어! 무섭진 않았어?”

브릭스턴이 내뱉었다.

간신히 말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이사벨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았는데…….”

“이사벨라, 솔직해야지. 그러기로 약속했잖아.”

레니샤의 말에 이사벨라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말했다.


“……많이, 정말 많이 무서웠어요. 흐, 흐아아아앙!”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