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나의 기사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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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나의 기사가 되어
2022.10.28.
오늘의 기적을 모두가 보았다.
허름했던 검은 땅 위를 뒤덮은 기적을 말이다.
카시우스가 도착하기 직전에 검은 뱀의 비늘로 만들어진 첫 검이 도착했다.
레니샤는 브릭스턴을 포함한 그녀의 사람들을 거느린 채로 검을 맞이했다.
희게 질린 남자가 검을 레니샤에게 바쳤다.
“힐로샤인의 첫 검, 아쉬카로드를 레니샤 님께 바칩니다.”
힐로샤인의 아낙들이 캔 검은 뱀의 비늘을 힐로샤인의 장정들이 벼려낸 묵직하고 날카로운 검신을 가진 검이었다.
검날이 검은빛으로 번뜩였다. 그건 마치 검은 뱀 그 자체로 보였다.
샤르륵!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가벼운 검이 부드럽게 뽑혔다.
“아쉬카로드. 무슨 뜻이지?”
“힐로샤인의 오른쪽 어금니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입니다. 제가 벼릴 수 있는 검 중에 가장 강한 검일 것이라 자신합니다.”
대장장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레니샤가 검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대장장이가 자신한 대로, 아쉬카로드의 이름을 붙이기에 적합한 검으로 보였다.
레니샤가 입술을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아주 좋은 검이로군. 공작께서 이 검의 주인이 되실 거네. 자네의 노고를 반드시 전해드리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레니샤 님!”
“앞으로도 우리를 위해 좋은 검을 만들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레니샤는 대장장이에게 검의 값을 후하게 치렀다.
좋은 물건에는 그만한 값을 쳐줘야 하는 법이다.
레니샤가 짙은 흑색의 검신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레니샤가 검을 검집에 꽂았을 때, 카시우스가 돌아왔다.
“레니샤? 나를 마중 나온 겁니까?”
카시우스가 달게 미소 지었다.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제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고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의 가능성을 확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것이 레니샤였으니 그의 기분이 더 좋아질 만도 했다.
카시우스가 약간 들뜬 어조로 말했다.
“레니샤. 나는 오늘 내 힘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했습니다. 내가 가진 힘이 파괴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는 내 힘이 저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신의 은총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지키고 생명을 일으키는 힘! 케로스의 힘의 비밀은 그것이더군요.”
레니샤가 작은 미소를 머금었다.
“카시우스. 나는 한 번도 당신의 힘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신의 힘은 우리 제국을 구해냈고 나를 황제로부터 구했어요. 그리고 내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유언을 전했죠. 당신은 내게 구원이었어요.”
카시우스가 부끄러운 얼굴로 턱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비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다.
카시우스는 쵸르파 평원에서 그를 보던 적군의 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
카시우스는 그들에게 있어서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 또한 더 이상 이 세상에 남지 못했지만.
“이사벨라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이제야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전하는군요. 카시우스 공.”
브릭스턴이 레니샤의 앞으로 나섰다.
“내 딸을 살려줘서 고맙습니다.”
브릭스턴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공이 이사벨라를 살려 이곳으로 데려왔다고 들었습니다. 그 애의 장점은 언제나 솔직하다는 거지요. 이사벨라가 말하길 당신은 천사 같았다고 하더군요.”
카시우스가 헛기침을 했다.
“처, 천사라고 하셨습니까?”
“네.”
브릭스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말을 하는 이사벨라는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러니, 공께서는 괜한 걱정을 하셨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카시우스가 볼을 문질렀다.
천사라니…….
카시우스가 헛기침을 하다가 레니샤 뒤쪽의 기사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무언가 즐거운 것을 본 듯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테리언이 턱이 빠진 것 같은 표정으로 카시우스를 보고 있었다.
잠깐만.
요조숙녀에 강아지에 천사.
저 인간들은 왜 이렇게 타이밍이 좋은 거지?
카시우스의 턱이 불거졌다.
하지만, 진실된 미소를 짓고 있는 브릭스턴 앞에서 어떤 불만도 표출할 수가 없었다.
“좀 더 멋있는 단어였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사벨라에겐 그게 가장 좋은 단어였을 겁니다.”
“이사벨라에게 전해주십시오. 천사는 이사벨라였다고. 저 또한 이사벨라 덕분에 위안을 얻었으니까요. 전쟁터에서 제가 구한 첫 목숨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브릭스턴과 카시우스가 보기 좋은 미소를 주고받았다.
브릭스턴이 레니샤의 뒤로 다시 물러섰다.
카시우스는 그제야 지금 이곳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레니샤의 뒤를 그녀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다.
기사들도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낀 듯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무슨 일이냐고 묻기 전이었다.
레니샤가 손에 들고 있었던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아쉬카로드.”
“네?”
“힐로샤인이 빚어낸 첫 검입니다. 나는 이걸 카시우스에게 주고 싶어요.”
카시우스의 미소가 사라졌다.
“카시우스. 나는 이 히엔트리의 황제가 될 겁니다.”
카시우스의 금안이 흔들렸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못 박아주는 것과는 한참 달랐다.
카시우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히엔트리의 황제.
레니샤가 나아가는 길.
“나는 당신이 나를 위해 검을 잡아주길 바라요. 내 가족이 되어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의 기사가 되어주길 원해요.”
레니샤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사람들을 이끌고 나온 것은 아쉬카로드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대장장이가 자신의 혼을 다 바쳐서 빚어냈다는 검의 위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리고 레니샤는 그 검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검을 카시우스에게 주려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 서약해줘요, 카시우스. 나를 저 높은 곳에 올려주겠다고 약속해요.”
레니샤가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카시우스가 홀린 듯이 레니샤에게 다가섰다.
모든 걸음에 의미가 담겨 있었고 덕분에 어깨가 무겁게 처지는 기분이었다.
“당신을 파멸자가 아닌 구원자가 될 수 있도록 해줄게요.”
“레니샤.”
“내가 패배하면 당신은 파멸자가 되겠지만 내가 승리하면 당신은 히엔트리를 구원한 구원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 카시우스…….”
카시우스가 레니샤 앞에 한쪽 다리를 세우고 무릎을 꿇었다.
누구보다 경건한 표정으로 레니샤를 올려다보며 카시우스가 입을 열었다.
“나, 기사 카시우스는 레니샤 로테라에게 맹세합니다. 당신이 가는 길이 내가 가는 길이 될 것이며, 당신의 꿈이 내 꿈이 될 것임을. 내 검으로 당신의 적을 무너뜨릴 것이며 나의 방패로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카시우스 로테라의 생명을 다해 맹세합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등에 키스했다.
레니샤가 입술을 꾹 물었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무도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그녀의 부모님도, 하나 남은 형제도, 마지막으로 그녀의 남편도.
레니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캘리엇 백작이 카시우스의 뒤에 무릎을 꿇었다.
“기사 캘리엇도 맹세합니다.”
그를 비롯한 로테라의 기사들이 연달아 무릎을 꿇었다.
“기사 테리언이 맹세합니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던 이들의 얼굴에는 경건함만이 서려 있었다.
소란스러움에 나와본 메테오 또한 앞으로 나섰다.
“나, 샴디르의 왕자 메테오도 레니샤 로테라의 뜻을 지지할 것을 선언합니다. 나의 뜻은 샴디르와 같으니 샴디르 또한 당신과 함께할 겁니다.”
메테오가 기사처럼 무릎을 꿇었다.
종내에 자리에 서 있는 자는 레니샤뿐이었다.
전율이 일었다.
손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뜨거운 피가 한 바퀴 도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투명한 눈물이 레니샤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모든 것은 로테라 공작 부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들이 레니샤가 타고난 예언을 불길하다고 여기고 그녀를 내쳤다면 이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딸을 지키기 위해서 몸을 내던졌던 그들이 아니었다면 레니샤는 어떤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지켜준 레니샤의 목숨이었다.
여전히 부모를 희생시킨 죄책감에 악몽을 꿀지언정 꿈은 버리지 못했다.
어린 날, 레니샤의 손을 잡고 황성을 나온 로테라 공작은 말했다.
‘레니샤. 네가 바란다면 너는 그 자리를 가지게 될 거란다.’
‘아버지가 이루어주시는 건가요?’
‘아니. 하지만, 보탬이 되어줄 순 있겠지.’
쇠퇴해 가는 히엔트리의 천 년의 역사를 로테라 공작은 항상 안타깝게 여겼다.
히엔트리에도 새로운 개혁의 바람이 필요한 때였다.
로테라 공작은 레니샤에게서 그 가능성을 본 것일까?
‘사랑하는 내 딸, 레티샤. 너의 모든 순간이 빛나기를.’
로테라 공작의 바람대로 지금의 레니샤는 누구보다 빛나고 있었다.
아쉬카로드가 카시우스의 검이 되었다.
그리고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검이자 방패가 되었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
루나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호흡이 턱끝까지 차오르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려움에 입 안이 말라오는데도 더 이상 몸은 힘을 내질 못했다.
“후우…… 이야기를 하자니까 왜 이렇게…….”
“무슨 이야기! 내가 이족인 걸 알고 찾아왔잖아!!”
루나가 날카롭게 비명을 토해냈다.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남자를 피해서 루나가 뒤로 몸을 물렸다.
그녀를 쫓는 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신변을 정리하고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덜미를 붙들렸다.
노예 검투사의 삶에서 벗어난 이후로도 검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는데 눈앞의 남자에게는 소용없었다.
루나가 검을 고쳐 쥐었다.
죽더라도 명예롭게 죽으리라!
“이야아압!”
“잠깐! 나도 이족이라니까!! 사람 말 좀 들어!”
남자가 검을 받아치며 외쳤다.
삐끗하고 어긋난 루나의 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서는 루나를 남자가 붙들었다.
“무슨 이유로 이러는지는 알겠는데…… 나도 동족이야.”
남자가 제 검을 검집에 꽂고는 말했다.
“카시우스가 보내서 왔어. 카시우스를 기억해?”
루나의 눈이 커졌다.
카시우스.
노예 검투사로 일할 때 알고 지내던 녀석이었다.
악바리로 앞만 보고 달려 나가던 이족 소년.
그가 범상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카시우스가 보냈다고?”
“그래. 나는 카시우스와 일하는 동료 기사다. 이름은 키엔.”
루나가 경계심을 풀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는?”
“카시우스가 이족들을 찾고 있어.”
키엔이 품에 숨기고 있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는 동그란 옥색 패가 들어 있었다.
과거 이족들이 만들어 지니고 다니던 신분패였다.
“……히샴!”
“히샴 카시우스가 이족들을 찾고 있다. 나를 그들에게로 안내해.”
루나가 떨리는 눈으로 패를 만지작거렸다.
이것을 못 알아보는 이족은 없으리라.
“카시우스가…….”
“이족들을 평온한 땅으로 이끌려고 하심이니 따르도록.”
키엔이 당당히 어깨를 펴고 말했다.
드디어 이족들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