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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레니샤가 돌아간다 (64/135)


64화. 레니샤가 돌아간다
2022.11.08.



 
메테오를 남겨두고 캘리엇 백작이 떠났다.

메테오를 따르던 샴디르의 사람들은 그런 왕자의 결정이 당연한 것처럼 따랐다.

카시우스가 수복된 망루에 서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캘리엇 백작. 그간 나는 전쟁터에서 그저 기사 카시우스로서 지냈소. 나는 그대나, 메테오 왕자, 혹은 황제보다도 뒤처질 수밖에 없지. 나는 고작 레니샤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도구에 불과해. 하지만, 그것에 그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카시우스는 지난밤 캘리엇 백작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대로 눈조차 붙이지 못한 채로.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카시우스는 솔직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카시우스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캘리엇 백작은 제도에서 세상의 흐름을 온몸으로 겪어온 사람이었다.

경험이 다른 것이다.

솔직하게 배움을 청하는 카시우스를 캘리엇 백작은 수용했다.


‘제게는 가르칠 아들이 없습니다. 고물고물한 손주들만이 남았지요. 저는 그 애들에게 검을 잡게 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제가 공작 각하를 아들 삼아 가르쳐 드리지요. 제가 가진 모든 것들을 전수해드리겠습니다. 검을 잡는 자와 펜을 잡은 자는 해야 할 일이 다른 법이니까요. 그러고 나서.’

‘…….’

‘언젠가 제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캘리엇 백작이 말했다.

추상적인 무언가를 가정한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는 카시우스도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덫에 발을 들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카시우스는 캘리엇 백작이 내민 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간절히 바라던 것이기에.

그 누구보다 적합한 반려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제도로 오십시오, 공작 각하. 저는 그곳에 있겠습니다.’

샴디르 일행은 가장 가까운 항구에서 배를 타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가 캘리엇 백작이 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적절한 시기와 타이밍에 황성으로부터 초대장이 도착했다.

카나리아가 레니샤에게 보내는 초대장이었다.

***

렉서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자네는 패배자야.”

보랏빛 눈동자가 기이한 빛으로 번뜩였다.

푸른 기를 띠고 있는 투명한 유령이 아무 말도 없이 렉서스를 노려보고 서 있었다.


“나는 자네의 딸도 버렸지. 결국 자네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어! 나는 그리고……. 그 여자를, 레니샤를 다시 내 곁으로 데려올 생각이야. 내, 자네가 나를 레니샤 곁에 두는 걸 싫어했던 걸 간과했지 뭔가. 자네는 나를 못마땅해했었어. 레니샤를 내 옆에 세우면서도 싫어했지.”

렉서스가 낄낄대며 웃었다.


“나는 자네가 싫어하는 일은 전부 하기로 마음먹었으니, 이번에도 마땅히 그래야겠지? 레니샤는 기뻐하며 이곳으로 돌아올 거야. 귀하게 자란 여자니 그런 곳에서 얼마나 버티겠어? 분명 캘리엇 백작의 손을 잡고서 날아서 돌아올걸? 그 노예 새끼랑 뭘 하겠어.”

분노와 질투, 그리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뒤범벅된 렉서스의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유령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렉서스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유령의 얼굴을 타고 흐른 피가 바닥에 투둑, 투둑 고이고 있었다.

렉서스가 입술을 혀로 훑어냈다.


“자네가 보는 앞에서 자네 딸을 망쳐주지.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도록 말이야. 무슨 말이라도 해봐!!”

처음 레니샤를 내보냈을 때는 로테라 공작을 이겼다는 희열에 휩싸였었다.

그를 가르치는 것처럼 내려다보던 로테라 공작이 평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기에.

렉서스의 상상 속에서 로테라 공작은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가 그의 머리꼭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계 없는 정상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렉서스의 턱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렉서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평생의 두려움이었다.

그의 주변에 스며든 이들이 렉서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렉서스를 황제로 만들었으니 로테라는 언제든 그 판을 뒤집을 수도 있다고.

그가 두렵지 않느냐고!

렉서스는 로테라가 직접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마음에 스며든 의심과 두려움은 날이 갈수록 덩치를 키웠고…….


“빌어먹을 자식! 그런 눈으로 나를 봐서 뭐 할 건데! 그래봐야 죽어 나자빠진 주제에 뭘 할 수 있다고!”

렉서스가 허공에 대고 술잔을 집어 던졌다.

의심과 두려움은 렉서스의 병이 되었다.

렉서스가 하얗게 질려서는 헐떡였다. 숨이 목끝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차가운 물 속에 잠겨서 간신히 발버둥 치며 고개를 내밀고 숨을 쉬는 거다.

한 번, 두 번, 세 번.

렉서스가 머리를 움켜쥐었다.


“으아아아아악!!!”

발버둥을 치는 렉서스를 보던 시종들이 재빠르게 물러났다.

이럴 때 렉서스의 눈에 잘못 띄었다가는 큰일 나기 마련이다.

아무런 죄도 없이 목숨을 잃을 수가 있었다.


“후우……. 헨리 님이 계실 때가 그립군요.”

“아무래도 헨리 님께 연락을 취해보는 게 좋겠군. 황성이 이렇게 엉망이니……. 조언을 구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 황제 폐하께서 날이 갈수록…….”

시종들이 말을 아꼈다.

렉서스의 정신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은 시종들이 쉬쉬하고 있는 비밀이었다.

렉서스는 밖에서는 멀쩡한 척 정무를 보고 사람들을 만났다.

렉서스가 애초에 미친 놈이라는 사실이야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 그것은 제외하고…….

어쨌든 과거와 달라진 게 조금도 없는 것처럼 군다는 뜻이다.

그러나, 황성이 위태하다는 것은 모두가 동의하는 바였다.

이대로는 황실이, 그들의 자리가 위험했다.

***

투리엘이 활짝 미소를 지으며 직원들을 닦달했다.


“얼른 서둘러! 곧 있으면 레니샤 님이 돌아오신다지 않니?”

한 톤 높아진 투리엘의 목소리에 직원들의 기분도 한껏 상승했다.

레니샤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투리엘의 기분 또한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주최하는 연회에 참석하고 새롭게 올라가는 오페라를 보기 위해서 레니샤가 제도로 돌아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레니샤가 어디에 머무느냐를 놓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반절은 렉서스가 준비한 사택에 머무는 쪽에 걸었고, 또 다른 반절은 카시우스의 저택에 머물 것이라고들 말했다.

투리엘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골랐다.

레니샤는 제도를 떠나며 카시우스의 저택을 그녀에게 부탁했었다.

투리엘은 레니샤 일행이 제도에 도착하기 전에 저택을 완벽하게 손봐둘 생각이었다.

의상실 직원들과 함께 직접 카펫과 커튼, 이불을 새로 고르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레니샤가 제도로 돌아온다!

그녀는 예고했었던 대로 그대로 저물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투리엘의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다시 제도로 떠나는 여정에 올랐다.

이사벨라를 비롯한 브릭스턴, 헤일린은 힐로샤인에 남았다.

그리고 이사벨라에게는 레니샤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


“헨리를 감시해야 해.”

이사벨라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헬레나와 제인이 그런 이사벨라를 귀엽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같이 제도에 가겠다는 이사벨라를 달래며 레니샤가 아이에게 새로운 임무를 내려준 것이다.

그저 이사벨라를 이곳에 남겨두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는데 아이는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종일 보이지 않는 헨리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헬레나나 제인에게 있어서는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

헨리는 신경질이 늘었다.

귀로 들리는 것들에 예민했으며 사람들의 말에 꼬투리를 잡아댔다.

이사벨라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는 헨리의 뒤를 살금살금 쫓았다.

지팡이를 들고 더듬거리며 걷는 헨리는 수척해서는 조금만 부딪혀도 휘청이곤 했다.


“어어엇!”

이사벨라가 헨리에게 달려가서 그를 부축했다.

지팡이에 간신히 의지하고 있었던 헨리가 아이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괜찮아요?”

이사벨라가 걱정스러운 기색을 담아 물었다.

헬레나와 제인이 그런 이사벨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이사벨라는 비밀스러운 간첩이 되기는 그른 것 같다.


“뭐야! 놔!”

“아! 안 돼요! 그러다가 넘어진다구요!”

“이사벨라 아가씨!!”

이사벨라가 헨리의 팔을 단단하게 붙들었다.

헬레나와 제인이 헨리와 함께 휘청이는 이사벨라를 보며 대경실색했다.

날카롭게 불리는 이사벨라의 이름에 헨리가 멈칫했다.

그를 부축하고 서 있는 게 누구인가 했더니.


“……이사벨라 아가씨?”

“맞아요! 헨리, 괜찮아요? 방금 크게 넘어질 뻔했어요. 다쳤을 거라구요.”

“……놓으십시오. 괜찮습니다! 사방이 적인 곳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 않군요.”

헨리가 날 선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런 건 나중에 따져요, 헨리. 눈앞에 당장 계단이 있단 말이에요. 여기서 굴러떨어지면 헨리 손해일걸요?”

이사벨라가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은 내 도움을 받아요, 헨리.”

헨리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사벨라에게 몸을 맡겼다.

이사벨라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지팡이 끝에 느껴지는 감각에 의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지팡이를 쓰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몸이 온통 멍투성이였다.

여기에서 멀쩡히 살아나가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게 사실이었다.

헬레나나 제인, 혹은 이 저택의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아직 어리다.

이런 어린아이가 어른들이 부리는 술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헨리는 짧은 시간 안에 거기까지 계산을 마쳤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절뚝이는 헨리와 계단을 내려가는 이사벨라를 보며 헬레나와 제인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서로를 기만하는 관계였다.

헨리가 이사벨라를 이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헨리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은 헬레나였다.

헨리가 고양이 무는 쥐가 되어 다른 이를 물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

한편,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제도로 가는 길 위였다.

오랜만에 노숙하게 된 레니샤가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야영지를 둘러보았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잘 자리를 펴고 준비하는 이들은 경이로울 정도로 능숙했다.

그리고 카시우스도 그랬다.

카시우스는 레니샤와 그가 쓸 간이 천막을 빠른 시간 안에 쓸모 있게 펼쳤다.


“자, 이제 안에 들어가서 앉으면 됩니다. 두껍게 담요를 깔았으니 땅에서 냉기가 올라오진 않을 겁니다.”

“다시 봐도 신기하네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잡고 사뿐사뿐 걸었다.

힐로샤인으로 가는 길보다 제도로 돌아가는 길이 좀 더 가볍다.

그것은 레니샤가 되찾게 된 것들 덕분일 것이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이 돌아왔고 샴디르마저 그녀의 손을 들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우니 기분마저 좋았다.


“카시우스, 제도가 보이는 것 같지 않아요?”

손끝으로 가릴 수 있을 만큼 작게 보이는 황성의 깃발을 가리키며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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