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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푸른 물결 (67/135)


67화. 푸른 물결
2022.11.18.



 
카나리아는 렉서스에게 반발하는 것보다 살랑거릴 때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황후가 되었다는 이유로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렸는지도.

그것도 렉서스를 상대로 말이다.

다리를 뻗더라도 상대를 봐가면서 했어야 하는 것을.


‘쯧.’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가슴을 토닥였다.


“레니샤 님이 아직 렉서스의 마음을 몰라줘서 그래요. 렉서스가 레니샤 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을 이해할 거예요.”

렉서스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렇겠지.”

밤에는 악령들에게 시달리고 일과 중에는 약과 술을 손에서 놓지 않으니 점점 몸이 축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 지긋지긋한 두통은 언제 끝이 나는 걸까.

아니, 끝이 있기는 한 걸까? 렉서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끔은 입으로 피를 토하고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 렉서스를 옥죄곤 했다.

주치의는 마음을 편히 먹으면 모든 것이 나아질 거라고, 약을 줄이고 술을 줄이라는 건실한 조언을 했다.

물론, 렉서스는 쓸모없는 말만 늘어놓는 늙은이를 지하 감옥에 가두었다.

렉서스가 술과 약을 놓지 못하는 것은 그의 밤을 지배하는 악령들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뜸했던 것이 요새 들어서 심해졌다.

렉서스가 쓰디쓴 한숨을 내쉬고는 카나리아의 품에 고개를 기댔다.


“카나리아, 잠이 오질 않아. 노래를 불러줘.”

“네, 렉서스. 자장가를 불러드릴게요. 한숨 자고 나면 모든 게 괜찮을 거예요.”

카나리아의 목소리가 한껏 나긋나긋해졌다.


“그런데 렉서스, 우리 아기가 먹고 싶은 게 많은가 봐요. 내가 너무 많이 먹나. 렉서스가 준 돈을 먹을 걸 사다가 다 써버렸지 뭐예요?”

거짓말이었다.

카나리아는 그 돈을 모두 장신구를 사는 데 쏟아부었다.

레니샤까지 오는 사교 모임 자리에서 그녀보다 못할 수는 없었다.


“……돈을 더 가져다주지. 그러니 노래나 해.”

“고마워요, 렉서스.”

렉서스의 뺨에 키스한 카나리아가 입술을 벌렸다.

듣기 좋은 노랫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시종들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카나리아의 노래를 듣고 나면 렉서스도 한동안은 얌전히 잠을 자곤 했으니.

그건 모두의 평안을 불러오는 노래였다.

***

레니샤는 종종 카시우스와 외출해서 데이트를 하는 것 빼고는 조용했다.

저택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레니샤의 동향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던 카나리아를 비롯한 뭇 귀족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렉서스와 레니샤, 혹은 카나리아와 레니샤 사이에 충돌이 있을 거라고 기대했는데 조용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고요함 가운데 카나리아가 개최하는 사교 모임의 날이 밝았다.

레니샤가 붉은 미소를 덧그렸다.


“좀 더 화려하게, 린데이.”

“예, 레니샤 님.”

린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가 제도로 돌아오기 무섭게 그녀가 내보냈었던 시녀 두 명이 돌아왔다.

레니샤가 제도에 있는 동안은 모시게 해달라면서.

레니샤는 그들을 기껍게 안으로 들였다.

그들이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여전히 레니샤를 믿고 따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정말 아름다우세요, 레니샤 님! 힐로샤인에 계시는 동안 더 예뻐지신 것도 같고…….”

“너무 마르셔서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살이 오르신 거 같아요.”

시녀들이 재잘재잘 떠들어대며 손을 재게 놀렸다.

레니샤의 머리를 땋고 틀어 올려 하얀 꽃과 진주로 장식했다.

마담 투리엘은 오늘 레니샤를 위해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

그녀가 주문했었던 대로 푸른 물빛의 드레스였다.

거울에 비친 레니샤는 이전 황후였을 적만큼이나 화려하고 위엄이 넘쳤다.

푸른색 펄로 눈가를 칠한 덕에 레니샤에게 무게가 더해졌고 머리를 장식한 생화와 진주들은 레니샤에게 우아함을 가져다주었다.

푸른색과 검은색, 금색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드레스였다.


“이 정도면 된 것 같군.”

레니샤가 손에 검은 레이스 부채를 쥐었다.

푸른 비단으로 된 장갑과 대비되는 부채였다.

부채 끝에도 옷차림과 어울리게끔 진주와 생화로 장식되어 있었다.

이 또한 마담 투리엘의 작품이었다.


“레니샤 님, 파이팅!”

“오늘도 카나리아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세요!”

시녀들이 발랄하게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레니샤가 응원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오늘의 에스코트는 당연하게도 카시우스의 몫이었다.

오랜만이었다.

그간 레니샤는 힐로샤인에서 지내며 간소한 치장을 즐겨왔다.

편히 활동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곳에서 굳이 사치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카시우스도 레니샤가 정식으로 꾸민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항상 레니샤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레니샤는…….

맞는 자리를 찾아간 것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카시우스는 다시금 깨달았다.

레니샤는 이런 자리가 어울린다는 것을.

레니샤는 힐로샤인 같은 오지에 갇혀 살 사람이 아니었다.

숨이 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등에 키스했다.


“카시우스? 뭐 해요?”

레니샤가 구슬이 굴러가는 것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부채를 입술 위에 두고 미소 짓는 모습은 우아함 그 자체였다.

카시우스가 왠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래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카시우스도 참. 이제 출발할까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과 오늘은 확연하게 다르다.

이전의 카시우스에게 레니샤는 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사람.

하지만, 지금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사람이 되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하게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 누구도 레니샤를 넘보지 못 하리라.

최소한 카시우스가 있는 한!

***

린데이가 시녀들의 행동거지를 주의 깊게 살폈다.

레니샤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 기질이 린데이에게도 옮아붙었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가족처럼 지내던 그들을 향한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자리를 비운 동안 다른 짓을 했을 수도.

하지만, 시녀들은 린데이의 생각은 조금도 모르고 신이 나서 떠들기에 바빴다.


“어휴. 정말 돌아오고 싶었다니까요? 린데이 님, 카나리아 하는 짓이 얼마나 눈꼴사나웠는지 아세요?”

“맞아요. 자격도 없는 주제에 콧대만 도도하게 세우고서는. 전에 마담 투리엘이 모임을 주최해서 어머니께서 가셨었는데 카나리아가 그렇게 볼품없어 보이더래요. 황제가 잘 안 해주는 건가?”

“……요지가 뭐지?”

“레니샤 님께서 카나리아를 꼭 혼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여자가 자기 분수를 알고 찌그러질 수 있도록.”

린데이는 그녀들로부터 짙은 혐오감을 읽어냈다.

그 감정을 알 것도 같았다.

본디 카나리아는 레니샤의 발을 닦아주던 하녀였다.

그런 카나리아가 그들의 위로 올라선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귀족들의 자부심이었다.

귀족들은 귀족으로 살기 위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고 익힌다.

아침부터 밤까지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많게는 4개의 수업을 종일 들어야 했다.

카나리아는 그런 것도 없이 황제의 총애로 끌어올려진 것이다.

자존감이 높은 귀족들이 그런 카나리아를 반길 리가 없었다.

린데이의 긴장감이 풀렸다.

레니샤가 이들을 다시 받아들이던 날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저들은 나를 배신하지 못해. 자신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저들이 레니샤를 반기고 레니샤를 신봉하는 것은 자신들을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긍지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린데이가 혀를 내둘렀다.

레니샤는 자리에 앉아서 아주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대체 그런 선견지명은 어디서 오는 건지.

린데이가 시녀들의 등을 두드렸다.


“레니샤 님을 믿어봐. 그분께서 언제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있었니?”

“아니요!”

“믿습니다!”

린데이의 마음에도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

길을 서둘러 루나와 키엔이 힐로샤인에 도착했다.

키엔은 그가 떠나기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힐로샤인의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황폐한 곳이었는데 그사이 푸르른 잔디와 작은 꽃들,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나무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이전보다 더 활기와 생동감이 넘치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여, 여기가 아닌데……?”

“무슨 소리야. 네가 말한 방향대로면 여기가 맞아.”

키엔의 말에 루나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자꾸 근방을 빙빙 돌고 있으니 속이 터질 수밖에.

한숨을 내쉰 루나가 키엔을 잡아끌었다.


“네가 없는 동안 씨라도 뿌린 모양이지!”

“그게 아니라니까…….”

키엔이 루나의 손에 끌려 힐로샤인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익숙한 건 남아 있었다.

보수 작업이 한창인 힐로샤인 성이 그들을 맞이한 것이다.

이제는 그래도 성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엇, 자네 돌아왔나?”

키엔을 알아본 이들이 그를 맞이했다. 그제야 키엔이 마음을 놓았다.


“옆은 누구? 아니, 임무지에서 여자를 데리고 온 거야?”

“그런 게 아니거든!”

키엔이 부정하며 소리를 질렀다.

잘못 걸렸다가는 웃음거리가 되는 수 있었다.

요조숙녀 카시우스를 떠올려볼 때 절대로 여지를 내어줄 수 없었다.

키엔이 인상을 쓰고는 루나를 소개했다.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시던 사람이야. 어디에 계시지?”

“……아 자네가 그동안 없어서 몰랐나 보군. 각하께서는 지금 제도에 가셨는데……? 돌아오시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뭐?”

키엔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 여기 책임자는 누군가요?”

루나의 질문에 대답해준 것은 테리언이었다.


“납니다. 공작 각하의 대리를 맡고 있는 테리언입니다.”

테리언과 루나의 눈이 마주쳤다. 루나와 테리언은 동시에 생각했다.


‘쉽지 않은 상대로군.’

 

***

레니샤가 사뿐사뿐 걸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황성 앞까지 에스코트해주고는 돌아갔다.

레니샤는 혼자서도 온갖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황성의 사용인들이 레니샤의 이름을 속삭여 댔다.

저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조금도 관심 없었다.

오랜만에 여러 향수 냄새가 뒤섞인, 지나치게 달콤한 냄새가 레니샤의 코를 적셨다.

귀부인들이 이미 도착했다는 의미다.

카나리아는 황성의 홀을 열었다.

황후가 된 스스로의 위상을 내보이고 싶은 것인지 내부는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레니샤가 그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경박해.’

우아함이나 세련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카나리아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이야.

그간 레니샤가 지켜온 위엄과 긍지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떠나온 자리지만 책임감이라도 남아 있었던 건지.

레니샤가 가볍게 혀를 찼다.

레니샤가 모임 장소에 도착했다.

레니샤는 투리엘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이곳을 레니샤가 선택한 색으로 채우라고.

푸른 물결이 눈앞을 수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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