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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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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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바바라
2022.11.22.
개중에서도 레니샤의 푸른 드레스가 가장 눈에 띄도록 화려했다.
“레니샤 님!”
“레니샤 님! 이대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그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제가 편지를 보냈는데 받으셨습니까?”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몸을 일으켰다.
레니샤에게 한마디라도 더 붙이기 위해서 말이다.
레니샤가 두 손을 맞잡았다.
고개를 치켜들고 눈을 아래로 내리뜬 레니샤 앞에 귀부인들이 고개를 숙였다.
레니샤가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레니샤의 자리는 가장 높은 상석, 그 바로 옆이었다.
카나리아의 옆.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카나리아는 레니샤가 제 옆에 앉으면 스스로가 더 돋보일 거라고 여겼을 것이다.
황후의 작위를 철석같이 믿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사람을 만드는 건 자리가 아니다.
사람이 그 자리를 만드는 거지.
지금 아무도 카나리아를 황후로 여기지 않는 것처럼.
수많은 질문에도 불구하고 레니샤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자리에 앉을 때까지.
레니샤가 어느 때보다 우아하고 고귀한 자태로 앉았다.
그제야 레니샤가 애달아하는 이들에게 답을 내어주었다.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아요.”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카나리아의 자리를 응시했다.
“내가 돌아오게 된다면 그건 다른 자리일 겁니다.”
레니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여기에 있는 자들은 알아차렸을까?
레니샤가 빙긋 웃었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황성으로 돌아올 거예요. 내가 원하는 형태로. 그것이 그대들이 바라는 형태일지는 모르겠지만.”
“레니샤 님. 그게 어떤 길이든 저는 따를 겁니다.”
“저도요! 그런 미천한 황후에게 복종하는…….”
“무슨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나? 내가 늦은 것 같군.”
그때, 소란을 뚫고 달콤한 꿈에 빠진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나리아였다. 아름다운 황제의 새.
부풀어 오른 배 위에 손을 얹고 카나리아가 눈을 깜빡였다.
카니리아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른 물결이 휘몰아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카나리아의 미소에 금이 갔다.
“다들 내 말을 전달받지 못한 건가. 나는 분명 이번 연회에 붉은색을 지니고 오라고 한 것 같은데.”
카나리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대들은 아무도 내 말을 지키지 않았군. 이건 분명 전달이 잘못된 거야. 그렇지, 바바라?”
“황후 폐하…….”
바바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카나리아를 불렀다.
그 순간 고개를 돌린 바바라와 레니샤의 눈이 마주쳤다.
바바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레니샤의 싸늘함을 정통으로 마주한 바바라의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카나리아가 부들부들 떠는 건 보이지도 않는다.
카나리아의 분노보다 레니샤의 분노가 훨씬 더 두려웠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고 그 누구도 카나리아를 상대해주지 않던 때에 레니샤가 입을 열었다.
“황후 폐하.”
레니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레니샤가 카나리아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던 게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있는 이들이 설마 의도하고 황후 폐하의 명을 어겼겠습니까?”
카나리아는 그 순간 알았다.
이 모든 일을 연출한 것이 레니샤라는 것을.
레니샤를 도운 건 누구지?
카나리아가 입술을 깨물고 바들바들 떨었다.
“누군가의 실수인 게지요.”
“실수? 황후의 명령을 허투루 전달한 이가 대체 누구란 말이지? 나는 분명 마담 투리엘에게 붉은색 드레스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예. 마담 투리엘은 제게 붉은색 드레스를 가지고 왔습니다.”
레니샤가 천연덕스럽게 거짓을 말했다.
그녀의 변동 없는 표정에서는 조금의 흔들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귀부인들이 그러더군요. 다 푸른 드레스를 입는데 저 혼자만 붉은색 드레스를 입는 게 맞느냐고. 그렇지 않습니까?”
레니샤가 그녀에게 관심을 구걸했었던 귀부인들에게 물었다.
귀부인들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의 연극에 스스로 동참한 것이다.
“저는 고민했지요. 아, 어떤 것이 옳은가. 저는 과거 홀로 돋보이기 위해서 붉은색 드레스를 입은 적이 있습니다. 오로지 저 혼자서요.”
레니샤가 과거를 떠올리듯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황후 폐하께서는 홀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싶으셨던 것인데 투리엘이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그래서 투리엘에게 푸른색 드레스를 다시 주문했고 이렇게 입고 왔습니다.”
“그럼…….”
“황후 폐하의 뜻을 전한 건 누구입니까? 누가 황후 폐하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까?”
레니샤가 느릿하게 바바라를 눈짓했다.
“저도 황실로부터 푸른색 드레스를 입어야 한다고 전달받았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폐하.”
“저 또한 그렇습니다!”
귀부인들이 앞다투어 레니샤를 지지했다.
카나리아의 떨리는 시선이 바바라를 향했다.
바바라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함정이다. 누군가 바바라의 발을 끌어 진창에 처박은 거다.
“저, 저, 저 아니에요. 폐하, 저 아시잖아요! 제가 그런 실수를 했을 리…….”
“실수가 아니면 고의인 건가?”
레니샤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의라뇨!!!”
바바라가 비명을 내질렀다.
카나리아의 눈동자에 악의가 서렸다.
명확한 판단이 서지 않을 정도로 머리에 열이 차올랐다.
카나리아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제가 황후 폐하께 진심인 것을 알고 계시잖아요! 황후 폐하!”
바바라의 간청이 다행히 카나리아의 귀에 닿았다.
카나리아가 이 자리에 오는데 바바라의 공이 컸던 게 사실이었다.
바바라는 그녀의 모든 것을 걸고 카나리아를 위해주었다.
바바라는 버려서는 안 된다.
이게 정확히 누구의 짓인지는 몰라도…….
카나리아가 느리게 이성을 되찾았다.
까끌한 침을 삼키곤 카나리아가 애써 미소 지었다.
“내가 그것도 모르고 애먼 이들에게 화를 낼 뻔했군. 바바라는 내 충직한 하녀네. 이 일은 바바라의 실수일 테지. 하지만, 나는 바바라를 용서할 생각이야.”
“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귀부인이 외쳤다.
“이런 중대한 실수로 저희와 황후 폐하 사이를 이간질할 뻔한 하녀를 어찌 그냥 넘긴단 말입니까?”
“맞습니다. 하녀는 벌을 받아야 합니다!”
레니샤가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되었다.
귀부인들이 먼저 나서 바바라를 벌할 것을 주청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레니샤가 그 사이에 섞여 자리에 앉았다.
승리자의 미소가 만면에 번졌다.
“바바라를, 벌하라고…….”
“그렇습니다!”
“조, 좋다. 바바라의 봉급을 삭감하고…….”
“그런 걸로 되겠습니까?”
마담 투리엘이 나타났다.
카나리아가 몸을 홱 하고 돌렸다.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투리엘도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황후 폐하. 지어드린 옷이 다행히 잘 맞으시는 모양이군요. 잘 어울리십니다.”
“고, 고맙네.”
“바바라를 제게 보내주십시오. 제가 모든 걸 해결하겠습니다. 바바라가 다시는 이런 실수하는 일 없도록 가르쳐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카나리아의 시선이 바바라를 향했다.
여기에 모인 모든 귀부인이 카나리아만을 보고 있었다.
카나리아는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저들이 원하는 결정을 말이다.
“……그렇게 하게.”
카나리아가 꼬리를 내렸다.
바바라는 억울하다 소리를 질러댔지만 더 이상 카나리아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투리엘의 손짓에 바바라가 하녀들의 손에 끌려 나갔다.
카나리아는 억지로 웃으며 연회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자리는 카나리아의 황후 등극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던가.
오늘은 카나리아를 위한 날이다. 명백히.
***
레니샤의 마차에 투리엘이 올라탔다.
연회가 끝난 이후였다.
레니샤는 오늘 연회에서 투리엘뿐만 아니라 중앙 귀부인들의 충성심을 확인했다.
모두가 하나같이 레니샤의 뜻을 따라 푸른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것이다.
“오늘 정말 잘해줬구나, 투리엘.”
흡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니샤는 한 번 더 카나리아에게 현실의 냉혹함을 보여준 것이다.
카나리아가 정말로 바바라의 실수라고 생각할까?
그렇게 멍청한 여자는 아니다.
레니샤가 입술을 비틀었다.
“풉.”
“레니샤 님……?”
“풉, 푸하하하하!”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투리엘이 아연한 얼굴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한 번도 그녀가 저렇게 웃는 걸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레니샤가 한참을 웃고 나서야 멈췄다.
눈가에 맺힌 눈물도 닦아내곤 레니샤가 투리엘을 응시했다.
“정말 웃기지 않느냐?”
“…….”
“자신이 뭘 잃는지도 모르고 하나씩 잃게 되겠지.”
투리엘이 고개를 숙였다.
“투리엘. 바바라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걸 전부 알아내게.”
의도치 않았지만 이런 소정의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시기적절하게 나타난 투리엘 덕분이었다.
“황제는 그간 수많은 여자들과 놀아났지만 한 번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네. 황궁의도 고개를 저었지. 황제의 심신이 미약하여 아이가 잘 생기지 않는다더군. 그게 무슨 뜻인지 아나?”
투리엘이 고개를 들었다.
“렉서스는 불임이었네.”
레니샤의 등 뒤로 마른 벼락이 내리쳤다.
푸른 미소를 머금은 채로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였다.
“이건 오로지 나만 아는 비밀이야, 투리엘.”
“그게 무슨…….”
“좀 더 먼 과거의 일이야. 내가 렉서스를 살렸을 때. 나는 렉서스에게 ‘로샤의 눈물’을 먹여 놈을 살려냈지. ‘로샤의 눈물’은 죽음 앞에 선 자의 목숨도 건져내거든. 그 ‘로샤의 눈물’이 어디서 온 것인 줄 아나?”
투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는 투리엘도 몰랐다.
“힐로샤인. 힐로샤인에 묻힌 검은 뱀의 독을 정제한 것이지. 일종의 독극물이란 말일세. 그걸 잘 가공하여 사용하면 극약이 되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레니샤 님. 그 말씀은…….”
“어린 내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나조차도 잊고 있었던 일이니.”
레니샤가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은 메테오를 만난 이후였다.
샴디르의 왕녀는 무사히 회복했다고 들었다.
어떤 후유증도 남지 않았다고.
후유증 하니 과거의 실수를 떠올렸고 임신한 카나리아가 떠올랐다.
“내 추측이 맞다면 렉서스는 불임이야.”
레니샤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런데 카나리아는 임신했지. 그 비밀을 누가 쥐고 있을 것 같나?”
“바바라…….”
“맞아, 투리엘. 자네는 오늘 정말 적절하게 잘해줬어. 뒤늦게 등장한 사람답지 않게.”
“바바라에게서 알아낼 수 있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카나리아는 반절은 저를 믿고 있으니 바바라를 내어줄 거라고 생각했고요.”
“그리고 그건 맞아떨어졌지. 바바라를 얻었으니 말이야. 투리엘, 내가 자네에게 뭘 부탁할지 알겠지?”
“예, 레니샤 님.”
투리엘이 레니샤의 마차에서 내렸다.
레니샤의 마차가 출발했다.
그녀의 마차 위로 찬란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레니샤를 지켜주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