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은밀한 죽음
(69/135)
69화. 은밀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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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은밀한 죽음
2022.11.25.
레니샤가 황성에 온다는 말에 렉서스도 서둘렀다.
레니샤가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해야 했다.
렉서스처럼 하루하루가 지옥 같고 불행해야 한다고.
하지만, 렉서스가 본 레니샤는…….
파란 드레스를 입고 활짝 웃고 있던 레니샤는…….
활짝 핀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슬을 가득 머금은 생생한 장미처럼.
렉서스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길거리의 비렁뱅이처럼 피폐한 낯짝을 하고 렉서스에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곁에만 있게 해달라고 빌어야 하는 것 아닌가?
힐로샤인이다, 힐로샤인. 죽음의 땅!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비참해졌다.
오히려 비루먹은 망아지 꼴을 하고 있는 것은 렉서스였다.
렉서스의 입술이 파들파들 떨렸다.
속이 뒤집히는 분노와 서글픔이 밀려왔다.
렉서스와 로테라 사이의 알력 다툼은 그의 승리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레니샤의 얼굴을 보니 그가 유일한 패배자 같았다.
“빌어먹을. 캘리엇 백작이 언제 도착한다고 하던가.”
“오늘 저녁이면 제도에 도착할 겁니다, 폐하.”
분명 힐로샤인에 뭐가 있는 거다.
렉서스의 눈빛이 어둠 속에서 음습하게 윤이 났다.
“헨리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고?”
“그, 예. 평소와 같습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헨리의 연락이 끊긴 지 수일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렉서스가 그를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렉서스가 아니던가.
사소한 것도 조심하는 게 좋았다.
“평소와 같다라. 그런데 레니샤가 평소와 다르군.”
렉서스가 차갑게 웃었다.
오랜만에 이성이 돌아오는 것 같다.
“캘리엇 백작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들어보고 그 뒤를 캐보는 것도 좋겠지. 메테오 왕자는 국경을 넘었다고 하던가?”
“네, 폐하. 제가 심어놓은 간자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렉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캘리엇 백작은 이중으로 친 덫이었다.
캘리엇 백작 또한 시험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 속에 숨겨둔 렉서스의 간자가 들려줄 이야기도 사뭇 궁금해졌다.
만약에 캘리엇 백작이 렉서스를 배신한 정황이 확인된다면…….
‘켈리엇, 네놈의 목을 잘라버리겠어.’
과거 렉서스의 손에 명을 달리한 캘리엇 백작의 자식들처럼!
***
캘리엇이 노곤한 숨을 내쉬었다.
제도가 목전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늘이 잘 드리운 숲에서 쉬어가기로 한 일행이 멈췄다.
힐로샤인에서 잠깐 보냈던 며칠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힐로샤인에서 반대쪽에 위치한 샴디르와의 국경까지, 그리고 국경에서 제도까지.
쉼 없이 달려온 것이다.
“후우.”
캘리엇 백작이 투구를 벗어 무릎 위에 올렸다.
피로에 젖은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힘들어 보이십니다.”
“나이가 있지 않나. 이미 일선에서 물러났어야 하는 나이야.”
캘리엇 백작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렉서스만 아니었더라면 캘리엇 백작은 뒷선에서 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식과 며느리를 한 번에 잃었던 그날, 캘리엇 백작의 평안도 사라져버렸다.
캘리엇 백작이 고목처럼 주름진 손으로 투구를 문질렀다.
아내와 아들, 그리고 며느리.
그의 곁을 떠나간 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캘리엇 백작도 그들의 곁으로 가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남은 아이들이 있었다.
레니샤가 지켜준 아이들.
아들과 며느리를 반씩 닮은 귀여운 아이들 말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서 자리를 잡기 전엔 캘리엇 백작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목숨을 놓는 것조차도.
“황제가 의심할 거다, 게일.”
“이미 각오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긴 자상을 입은 남자가 캘리엇 앞에 고개를 수그렸다.
“어느 정도는 진실을 섞는 것도 좋아. 나와 네 말이 일치하면 황제는 너를 의심할 것이고, 나와 네 말이 다르면 나를 의심하겠지. 의심을 사는 쪽은 나여야 한다, 게일.”
“하지만, 백작님…….”
“너는 황제의 곁에서 가져와야 할 게 있어.”
캘리엇 백작의 눈동자에 새파란 분노가 서렸다.
캘리엇 백작이 한 글자, 한 글자 짓씹듯이 말했다.
“아직 내 아들의 유해가 그놈의 손아귀에 있다, 게일.”
황제가 쓰는 더럽고 편협한 수법이었다.
제 손으로 거둔 가족의 목숨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까지 쥐고 흔드는 것.
캘리엇 백작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뼈를 깎아내는 고통이 매 순간 캘리엇 백작을 파고들었다.
아들의 가는 길도 지켜주지 못했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손 한번 잡아주지 못했다.
그 죽음 이후도……. 편안히 쉴 자리에 눕혀주지도 못했다.
렉서스로 인해서.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게일이 고개를 수그렸다.
“레니샤가 황성에 분란을 일으킬 거다. 제가 쥔 운명을 포기 못 할 여자야. 그 순간을 노려야 한다. 황제는 절대로 내게 유해를 내어주지 않아.”
“네, 백작님. 물을 좀 더 드세요. 햇볕이 뜨겁습니다.”
캘리엇 백작이 씁쓸하게 웃었다.
아들은 죽어 쉬지도 못하고 떠돌고 있을 텐데 캘리엇 백작은 더운 것 하나 이겨내지 못하고 찬물을 찾아 마시고 있었다.
이어지고 있는 삶이 한탄스럽고 지독하다.
캘리엇 백작이 고개를 나무에 기댔다.
“……백작님께서는 레니샤 부인이 황제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보십니까?”
“물론. 그 여자는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여자야. 황제가 그것을 눈치채고 레니샤를 내쫓은 것일지도 모르지. 제도는 이전부터 레니샤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었어. 귀족들은 황제의 광기를 두려워하고 눈치를 살피는 척하면서 레니샤에게 들러붙었지. 그 여자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며 스스로의 안위를 보존한 거야. 결국, 제도는 레니샤 손에 있다고 해도 틀릴 게 없어.”
“그것을 바라시는 겁니까?”
“레니샤가 황성을 쥐길 바라느냐고? 그건 내 오랜 친우의 바람이었지. 선대 로테라 공작은 딸이 그 길을 가지 못하면 죽을 것을 알고 있었어.”
캘리엇 백작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캘리엇 백작이 레니샤의 편을 든 것은 그녀가 아이들을 구해준 것에 대한 보은도 있지만, 친우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기도 했다.
선대 로테라 공작은 혹여 레니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 애를 지켜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죽어서도 제 딸이 눈에 밟혀 눈을 감지 못할 인사였지.
캘리엇 백작이 중얼거렸다.
캘리엇 백작이 나무에 몸을 기댔다.
이상하게 점점 더 피로해지는 것 같다. 잠이 몰려오고 있었다.
“백작님, 주무십니까?”
게일이 캘리엇 백작의 몸을 흔들었다.
“백작님.”
하지만, 캘리엇 백작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질 않는다.
게일이 침통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캘리엇 백작의 손등에 느리게 입을 맞춘 게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바라신 것은 반드시 들어드리겠습니다, 백작님.”
게일의 눈동자에 눈물이 반질거렸다.
흉측하게 그어진 자상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게일이 캘리엇 백작이 손에 쥐고 있던 수통을 회수했다.
심장이 칼로 그어진 것 같다.
충성심이 옅어져서, 혹은 두려워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게 아니었다.
게일에게도 돌려받아야 할 게 있을 뿐이었다.
게일이 숨을 죽여 흐느꼈다.
아내와 아이가 렉서스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렉서스에게 가족들의 안위를 빼앗긴 것은 힐로샤인으로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다.
이중 첩자 일을 시작하면서 가족들을 숨겨두었는데 어떻게 찾아낸 것인지.
렉서스는 어린 아들의 목숨줄을 쥐고 흔들었다.
간악한 자였다.
렉서스는 그에게 독약을 쥐여주며 캘리엇 백작이 렉서스를 배반한 것으로 보이면 지체하지 말고 죽이라고 했었다.
게일의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어차피 이번에 돌아가면 캘리엇 백작은 죽는다.
약점을 잡힌 게일은 힐로샤인과 레니샤의 비밀을 전부 털어놓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가 털어놓지 않아도 황제는 제가 바라는 답을 얻을 때까지 끊임없이 힐로샤인으로 사람을 보낼 것이 분명했다.
게일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렉서스의 손에 캘리엇 백작이 능욕당하느니 이렇게 죽는 게 낫다는 생각도 했다.
그 또한 게일을 위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했지만 그거라도 필요했다.
게일이 숨을 죽여 한참을 울었다.
지친 몸을 누이고 쉬고 있던 기사들이 이상을 감지하고 다가올 때까지.
“게일 경?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백작님께서…….”
“백작님께서……. 돌아가셨네.”
게일이 붉은 눈으로 말했다.
눈물로 젖은 얼굴이 햇빛 아래에서 서글픔으로 빛났다.
“이번 여정이 무리셨었던 모양이야. 깨워도 일어나질 않으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방금까지만 해도 피곤해 보이시긴 했어도 멀쩡하셨습니다!”
기사들이 반발했다.
고개를 저으며 다가온 이들이 캘리엇 백작에게 다가갔다.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백작님을 연신 부르는 이들에게 점차 절망이 서렸다.
“이, 이러실 리가 없는데…….”
게일이 울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서럽게 우는 게일을 의심하지 않았다.
캘리엇 백작, 오래도록 제도를 지켜온 노장이 떠나는 길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기사들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그 죽음의 비밀을 아는 자는 오로지 게일, 그뿐이었다.
***
카시우스의 팔을 베고 누운 레니샤는 유독 평화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 평화에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카시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황성에 다녀온 이후로 계속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입가에 키스했다.
올라간 입꼬리가 고양이처럼 사랑스럽다. 욕심이 날 만큼.
“기분 좋은 일, 있었죠.”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다음 포근한 품에 고개를 기댄 채로 웃음을 흘렸다.
“카나리아를 놀려주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 애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면이 없잖아 있거든요. 황후가 되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죠. 어찌나 순진한지.”
“…….”
카나리아라면, 그 정신 나간 여자?
“카나리아의 그 넋 나간 표정이라니. 그 애는 단순해서 나를 이겼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내가 지니던 것들을 지니고, 앉던 자리에 앉았으니.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도 모르고.”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이마에 키스했다. 레니샤는 마치 악동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리 똑똑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카시우스가 제대로 본 거예요. 그 애는 자기가 내 꼭두각시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몰라. 그 아이가 자신을 지켜줄 최고의 보호막이라고 생각하죠.”
“…….”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피부가 뜨겁다.
잠자리할 때면 카시우스에게 잡아먹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열기 때문인가.
레니샤가 나른한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그 아기가 자기를 잡아먹을 독약인 것도 모르고.”
레니샤의 분홍색 눈동자가 예쁘게 휘었다.
“지금은 실컷 즐기라죠. 그럴수록 파멸이 달콤한 거 아니겠어요?”
미래는 예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