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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도망자 (78/135)


78화. 도망자
2022.12.27.



 
이사벨라가 헨리의 팔을 부축했다.

고집스러운 노신사는 자신의 고집을 꺾고 하인들의 손에 몸을 맡기고 목욕하곤 했지만, 부축할 수 있는 건 이사벨라뿐이었다.

헬레나와 제인이 불만스럽게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음침한 노인네.”

헬레나가 사납게 욕설을 내뱉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진료를 봐야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도 못 믿겠다잖아. 쉿. 쳐다본다.”

제인이 헬레나를 잡아당겼다.


“쳐다보면 어때?”

더 이상 남은 죄책감도 없었다.

헬레나는 확신했다.

만약 헬레나가 극단적인 수를 쓰지 않았다면 헨리는 제가 필요할 때 언제든 힐로샤인을 배신했을 거라고.

레니샤를 배신하고 그녀의 가족들을 밀고했을 거라고 말이다.


“……의원에는 이사벨라 아가씨와 저만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헨리가 싸늘하게 말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요새는 대놓고 악의를 표출하는 하녀들이 못마땅한 건 헨리도 마찬가지였다.

장담하건대 저 하녀들은 수가 틀리면 헨리를 죽이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깊은 골은 메워질 기미가 없었다.

이사벨라가 어색하게 웃고는 헨리와 함께 의원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을 위해서 새 옷을 입고 새 구두도 신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이사벨라도 어린애처럼 들떠버린 것이다.

헨리가 아파서 온 건데,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아는데도 설렜다.

헨리가 진료를 보는 동안 이사벨라가 의원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시력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

헨리가 이를 아득 물었다.

핑계로 온 것이기는 해도 작은 기대는 있었다.

혹여나 시력이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할 수 있는 게 극히 적었다.


“……고맙소.”

확인을 마친 헨리가 일어서자마자 이사벨라가 그를 부축했다.

헨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밖에는 하녀들과 기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힐로샤인은 빈틈없이 이사벨라를 호위하고 있었다.


“……아가씨. 식사도 하고 음료도 마시고 돌아가는 건 어떻습니까?”

“어, 그래도 되나? 음.”

이사벨라가 눈을 굴렸다.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사벨라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픈 사람이 바라는 건데 그 정도야, 뭐. 그런 선한 마음으로.

그에 대비되는 헨리의 악의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

한편, 제도.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옆에 달라붙어 앉아 아양을 떨었다.

렉서스의 기분을 맞춰주고 원하는 걸 얻기 위함이었다.

카나리아는 바바라 사건으로 스스로의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게 되었다.

카나리아는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카나리아는 그녀의 발밑에 많은 것을 쌓아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돈이 필요하다고?”

렉서스가 음식을 휘적거리다가 물었다.

요새 들어 식욕이 감퇴하고 있었다.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살은 계속 내린다.

렉서스의 눈앞에 레니샤만 맴돌았다.

렉서스가 입가를 매만졌다.

모든 게 불만족스럽다.

레니샤를 품에 안고 나면 나아질까?


‘빌어먹을.’

스스로가 망령이 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나리아가 하는 말도 한 귀로 흘러나가고 있었다.

레니샤를 만난 이후로 계속되고 있는 증상이었다.

렉서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폐하? 더 드시지 않고요. 카나리아가 이 부푼 배를 안고 직접 만든 것입니다.”

카나리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아직 원하는 걸 얻어내지 못했는데 이대로 렉서스를 놓칠 수는 없었다.


“……원하는 게 뭐지?”

“아이참. 폐하, 제 가장 큰 소원은 폐하께서 건강하신 것이고 두 번째는 아이가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지요.”

“…….”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렉서스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노래나 불러 봐. 그러면 원하는 대로 돈을 안겨주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도 노래는 불러드릴게요. 폐하께서 바라시는 건 카나리아는 뭐든 해요.”

카나리아가 렉서스의 품에 안긴 채로 노래를 시작했다.

그러나 머릿속은 그 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덴버스 후작은 유능한 이였다.

카나리아의 아이를 보고 투자하겠다던 덴버스 후작은 고아원을 지으면서 돈을 빼돌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좀 더 저렴하게 자재를 구입하고 장부를 조작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차익을 남길 수 있었는데 카나리아는 그 돈으로 외국에 저택을 사둘 생각이었다.

바바라의 조언에 따른 선택이었다.

목숨이라도 구명하려면 차라리 해외로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카나리아는 아쉽지만 그 말에 동의했다.

이미 레니샤가 아이가 렉서스의 아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니샤는 어떻게든 그 사실을 이용할 사람이었다.

약점을 내어주었으니 꼬리를 말고 도망쳐야지.

카나리아가 바라는 돈의 액수만큼이나 예쁜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렉서스가 만족할 수 있도록.

***

카나리아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커피를 마시던 덴버스 후작이 피식 웃었다.


“힘겨워 보이시는군요.”

“렉서스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날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어요.”

카나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바바라는 덴버스 후작에게 그들의 계획을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된다고도 말했다.

바바라는 여러 가지로 유능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비상하기도 하고.

덴버스가 카나리아를 후원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낳을 아이 때문이었다.

그 아이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서.

만에 하나 덴버스가 카나리아의 아이가 황제의 아이가 아니며,

그녀가 도망갈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덴버스의 후원 또한 끊기는 거였다.


‘그건 안 될 일이지.’

카나리아가 주먹을 꾹 쥐었다.


“렉서스가 먹고 있는 약이 차도는 있는 건가요?”

“정신을 맑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약이라면……. 계속해서 복용 중이시기는 하나 차도에 대해서는 제가 드릴 말씀이 없군요. 제가 의사는 아닌지라.”

덴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기님이 점점 자라시는 게 보입니다. 그 아이가 반드시 건강하게 태어나야 할 텐데요.”

덴버스가 카나리아의 배를 힐끗하고는 생긋 미소 지었다.

그의 의도는 그것이 전부라는 듯이 말이다.

카나리아가 배를 부드럽게 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임신을 선택한 건 잘한 일이다.

아이를 가지고 카나리아는 황후가 되었고 지금은 해외에 저택을 살 준비도 하고 있지 않나.

그리고 덴버스 후작 같은 대귀족에게 존댓말도 다 들어보고.

레니샤를 고개 숙이게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카나리아는 백번 생각해도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후작. 내가 우리 황자를 아주 잘 돌보고 있답니다.”

“황자라고 확신하십니까?”

“산파들을 불러서 물어봤거든요. 출산 경험이 많은 산파들은 배 모양을 보고도 아들인지, 딸인지 알 수 있다죠. 그들이 입을 모아 아들이라고 말하더군요. 황제 폐하를 닮은 아들을 낳을 거예요.”

덴버스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카나리아가 아이를 가졌을 때 가장 먼저 의심을 품은 자는 그일 것이다.

렉서스는 그간 아이를 갖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공교로운 타이밍에 카나리아가 임신을 한다고?

차라리 임신을 만들어냈다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덴버스였다.

그는 한번 의심한 건 놓지 않았고 결국 레니샤로부터 아이가 촌부의 씨일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천박하긴.’

제국의 황후가 되기에는 너무 모자라다.

그래 놓고 렉서스를 닮은 아이를 운운하다니.

물론, 렉서스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또한 파국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니지. 자기 씨도 아닌 아이를 싸고도는 렉서스 꼴을 보면 좀 더 기분이 풀리려나.’

제일스를 떠올리는 덴버스 후작의 입술이 비뚤어졌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덴버스가 차를 마셨다.


“아기가 태어나면 많은 걸 해줄 거예요. 제국의 황제가 될 아이니 당연히 공부도 많이 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승마도 배우고요. 또 검도 배워야 하나?”

카나리아가 하나, 하나 손꼽아 보았다.


‘으, 숨 막혀.’

그런 삶을 사느니 아이도 카나리아와 함께 떠나서 사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바라시는 대로 그 아이가 황제가 되려면 응당 그래야겠지요.”

덴버스가 대충 카나리아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나저나. 후작, 제가 그때 말씀드린 건 어떻게 되었나요?”

카나리아가 목을 가다듬었다.


“사신단을 맞이하는 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그거예요.”

카나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겔트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사신단을 맞이하기 위해서요. 사실 그런 일을 지금 황실에서 누가 하겠습니까. 저밖에 더 있나요? 황제께서 아직 저를 믿지 못하시지만……. 덴버스 후작이 도와준다고 하면 허락하실 거예요.”

카나리아가 꿈꾸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레니샤가 했었던 일 중에 가장 부러웠었던 것은 사신단을 접대하는 거였다.

레니샤는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은 레니샤와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서 애를 썼으며, 레니샤의 주변은 그들이 가져온 선물로 넘쳐났었다.

게다가 그 대단한 샴디르의 콧대 높은 메테오 왕자조차도 레니샤의 포로가 되지 않았던가.

그건 모두 뛰어난 사교술 덕분이 분명했다.

카나리아는 그녀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덴버스 후작이 말을 이었다.


“요새 황제 폐하의 기분이 좋질 않아서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참. 좀 있으면 축제가 있잖아요. 분명 사람들이 많이 올 텐데…….”

카나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한 달 후면 성대한 축제가 열리는 건 사실이었다.

대륙의 혼돈을 바로잡았다고 알려진 세 뱀 신을 기리기 위한 축제였다.

대륙적인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 많은 외국인이 방문할 것이다.


“저만 믿으세요, 황후 폐하. 제가 폐하를 돕겠습니다.”

“약속했어요?”

덴버스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황후의 일도 처리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런 비웃음은 꼭 감춘 채로.

***

헨리의 시선이 음험하게 빛났다.

지금이 기회다.

더 이상 이곳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이사벨라를 데리고 도망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아마도 힘들 것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동안 음식에 수면제를 탔다.

이사벨라를 이용해서 헬레나와 제인이 사용하는 손수건도 바꿔두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결국 졸음을 이기지 못한 이사벨라의 고개가 툭 하고 떨어졌다.

헨리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래, 이사벨라. 좋은 꿈을 꿔야지.”

헨리가 마지막 인사로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였다.


“……그래서 힐로샤인을 다스리는 게 누구라고? 지금 임시 가주가 있다며.”

“정말로 이주할 생각이야?”

“뭐. 가능하다면.”

“지금은 브릭이라고. 잠시 공작이 자리를 비운 동안 브릭이 임시 영주 자리를 맡았다던데. 누군지는 나도 모르겠군.”

브릭……?

헨리의 흐릿한 눈동자가 확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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