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도사리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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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도사리는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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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도사리는 어둠
2022.12.30.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헨리가 이사벨라가 있는 쪽을 힐끗 보고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브릭.
그 이름을 헨리가 모를 리가 있나.
평생을 황성에 바친 헨리 아니던가.
그는 황실과 가까운 모든 대귀족의 과거를 알고 있었다.
헨리가 숨을 죽였다.
“그래서 지금 힐로샤인에 가면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열린다던가?”
“모를 일이지. 그래도 지금 여기보다는 낫지 않겠나. 이제 막 발전하고 있기도 하고. 게다가 듣기로는 로테라가 돌아왔다고들 하더군.”
“……로테라가?”
“자네도 알다시피 로테라가 힐로샤인을 다스릴 때는 그만한 알짜배기 영지도 없었지. 황무지이기는 해도 돈을 엄청 끌어모으기도 했었고. 힐로샤인에서 나오는 특산품들이 이 근방에서는 없어서 못 팔지 않았나. 아무튼, 나는 가족들하고 힐로샤인으로 가볼까 해.”
“그 임시 영주가 자네를 받아줄까? 브릭이라는 자 말이야.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는 몰라도 아주 깐깐하다던데. 지금 힐로샤인은 통제 중이지 않나.”
“……안 되면 드러누워야지.”
헨리가 숨을 탁 내쉬었다.
브릭.
브릭스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있나!
로테라 장손의 이름이었다.
소공자 시절에는 헨리와도 인연이 있었다.
헨리가 입술을 비죽이 끌어 올렸다.
브릭이라는 애칭으로 이름을 감춰도 헨리는 모를 수가 없었다.
브릭과 로테라, 그리고 힐로샤인, 레니샤라니!
조금만 머리를 굴려보면 답이 나왔다.
브릭스턴과 헤일린이 돌아온 것이다.
어떤 루트로 그들이 힐로샤인에 있게 된 것인지는 모르나 헨리는 그가 변을 당해야 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헨리는 간첩이다.
언제든지 힐로샤인의 소식을 황성으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헨리가 브릭스턴과 헤일린에 대해서 아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자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렇다고 헨리를 죽일 수도 없었겠지!
헨리의 뒤에는 렉서스가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차선책으로 헨리의 두 눈을 멀게 했을 것이고…….
“하하하…….”
헨리가 웃음을 흘렸다.
뜨거운 열기가 이글이글 끓는 기분이었다.
모든 비밀을 알게 된 지금, 헨리의 가슴에는 독이 고였다.
이 빌어먹을 정치 싸움에 휘둘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헨리의 시선이 잠든 아이를 향했다.
이사벨라는 순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저 아이를 이 자리에서 해칠 수도 있다.
살의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는 힐로샤인의 격렬한 추격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
힐로샤인은, 브릭스턴은 절대로 자신의 목표를 놓치는 사내가 아니었다.
사냥 대회가 열릴 적이면 항상 1위를 거머쥐곤 하지 않았나.
헨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헨리는…….
헨리가 이사벨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 특유의 우유 냄새가 헨리의 코끝을 찔렀다.
“기다리렴, 이사벨라. 내가 네 가족을 반드시 구렁텅이에 처넣어줄 테니까. 그땐 울어도 소용없을 게다.”
헨리가 느리게 몸을 세웠다.
헨리가 손을 들었다. 급사가 헨리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아이가 먼저 잠들어버렸군. 나는 화장실을 들렀다가 가려고 하는데…….”
헨리가 어색하게 웃었다.
급사는 헨리의 눈에 초점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심부름꾼이 필요할 것 같군.”
“그렇게 하겠습니다.”
헨리가 고요히 기다렸다.
뿌연 시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급사가 가고 얼마 되지 않아 심부름꾼 아이가 왔다.
힘을 좀 쓸 것처럼 덩치가 커 보였다.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것이 저 정도이니 키가 퍽 큰 아이 같았다.
아이가 헨리를 부축해서 화장실을 향했다.
헨리가 화장실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를 불러 세웠다.
세면대에 기대앉은 헨리가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쪽지를 꺼냈다.
“이곳으로 가는 삯마차를 구해주렴.”
“네?”
헨리가 아이의 손바닥에 묵직한 돈주머니를 얹어주었다.
“멀리 갈 일이 있어 그런단다. 이 일을 비밀로 해준다면 나는 네게 이 주머니를 하나 더 주마.”
헨리가 돈이 가득 든 주머니를 하나 더 흔들어 보였다.
심부름꾼이 눈을 굴렸다.
밖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기사들이 즐비했다.
그런 상황에 이런 심부름이라니.
뭔가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지는 듯했지만 돈의 유혹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저 돈이면 한 달은 편히 먹고살 수 있으리라.
심부름꾼이 고개를 숙였다.
“여기서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돈만 주면 무엇이든 하는 게 이들 처지였다.
편하고 고급스러운 마차는 구하지 못해도 싸구려 삯마차라면 구할 수 있으리라.
***
“여기에 있던 노인은 어디로 갔소?”
메테오가 급사에게 물었다.
이사벨라가 고개를 파묻고 잠들어 있었고 그 건너편은 비어 있었다.
“화장실에 가셨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고맙네.”
메테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헨리의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이사벨라는 무사해 보였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가슴이 철렁했었는데.
메테오가 아이의 자세를 편하게 고쳐주고는 의자에 기댔다.
헨리와 이사벨라가 외출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자마자 따라붙었다.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무기를 확인하던 와중이었다.
메테오는 대륙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의 안목은 특출나게 좋을 수밖에 없었다.
요새 힐로샤인에서 만들어지는 무기들은 특히 질이 좋은 편이었는데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밝히길 바라지 않는 이상 메테오는 영영 알 수 없으리라.
사람들은 레니샤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레니샤는 비밀스럽고 위험하고 동시에 멋있는 사람.
메테오가 턱을 괴곤 이사벨라를 지그시 응시했다.
“네 고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메테오가 피식 웃었다. 자는 애를 데리고 뭐 하는 건지.
***
헨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보이지 않는 눈에 무언가가 비치는 듯했다.
심부름꾼 아이에게 몸을 지탱한 채 서 있던 헨리가 물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누가 있니?”
“네.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어떤 남자가 앉아 있어요.”
헨리가 미련 없이 말했다.
“인사는 미뤄야겠구나. 뒷문으로 나가자.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고 했지?”
“네!”
심부름꾼이 헨리를 부축해서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왔다.
헨리는 아이에게 돈주머니를 두 개 더 챙겨주었다.
“이건 비밀에 대한 값이다. 비밀을 어기면 너는 그 대가를 받게 될 거야.”
음산한 목소리에 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대가요?”
“그래, 대가. 몹시 무서운 법이지. 내 눈 보이느냐? 이 눈이 바로 그 대가를 치른 거란다. 너도 나와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어.”
아이가 파르르 떨었다.
파랗게 질린 아이를 확인하고는 헨리가 문을 닫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었을 거다.
마차가 출발했다.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헨리가 마차에 고개를 기댔다.
거액을 제시한 헨리에게 마부는 충성을 맹세했다.
덜컹거리기는 하지만, 이 마차가 헨리를 무사히 황성으로 데려다주리라.
헨리가 저택에서 준비해온 것은 돈과 수면제, 마지막으로 황성의 주소가 적힌 쪽지였다.
고작 그것만으로 탈출했다. 방심의 대가일 것이다.
힐로샤인은 아이를 보호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다.
맹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멍청한 것들.”
헨리가 중얼거렸다.
아쉬운 건 이 마차에 이사벨라를 태우지 못했다는 거다.
태연하게 돌아가서 아이를 태울 생각이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헨리가 주먹으로 마차를 내리쳤다.
그래도 브릭스턴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렉서스는 헨리 말고도 여러 눈을 심어두었을 테니 분명 힐로샤인의 소식을 들었으리라.
렉서스가 브릭스턴에 대해서 알고 있을까?
헨리를 이 꼴로 만든 이들이 모두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
오랜만에 레니샤도 여유를 즐기는 날이었다.
제도에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은 모두 정리되었다.
이제 일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만 지켜보면 된다.
바바라는 카나리아에게로 돌아갔고.
카나리아는 덴버스 후작의 손에 매달려 대양을 건너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교계의 귀족들은 레니샤에게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렉서스는.
“풉.”
렉서스는 홀로 남아 고독한 황제가 되었다.
누구도 렉서스를 따르지 않고 그를 황제로 여기지 않게 될 것이다.
내일은 어제보다 더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저택을 옮기는 날이었다.
렉서스는 그 저택을 그의 힘으로, 그의 의지로 준비했다고 생각하겠지.
[제도에 새 저택을 준비하라.]
레니샤가 투리엘과 덴버스, 그리고 시종장에게 내린 명령 중의 하나였다.
처음에는 저택을 수리해서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규모가 작았고 너무 노출된 장소에 있어서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
거대하고 은밀한, 오래된 저택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밀을 숨기고 있는 저택.
레니샤는 고심해서 저택을 골랐다.
아무리 렉서스라고 한들 몇 달 만에 고택을 짓는 것은 무리가 있었으므로 하나를 골라 수리할 수밖에 없었다.
레니샤가 고른 저택을 투리엘이 덴버스에게 전달했고, 덴버스는 그것을 시종장에게, 시종장은 황제의 귀에 흘려 넣었다.
‘레니샤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폐하의 첫 아내를 저렇게 밖에 둘 것이냐. 그녀가 돌아와 지낼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그간 숨죽인 채로 가만히 힐로샤인에 있었던 게 아니었다.
레니샤는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하나씩 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게……. 순조로워요.”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물끄러미 보았다.
레니샤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힐로샤인에서 무기를 생산하는 속도가 점점 붙고 있다고 하더군요. 게일 캘리엇은 힐로샤인의 비밀을 황제에게 고했지만, 황제는 아무것도 쥐지 못할 거예요.”
“……기쁩니까?”
“네, 기뻐요.”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와 마시는 이 차 한 잔이 이토록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는 일들 덕분이었다.
레니샤의 발목을 붙드는 게 없어서.
“렉서스를 비호하는 자들은 얼마 남지 않게 될 거예요. 아니, 이미 새로운 황제를 찾기 시작했어요. 내 앞에서 웃고 있는 귀족들도 대부분 뒤로는 다른 생각을 하죠. 새로운 히엔트리의 핏줄을 찾아라.”
“…….”
“나는 그들도 이겨야 해요, 카시우스. 수없는 히엔트리의 핏줄들이 제도로 기어 올라올 겁니다. 힐로샤인의 군대는 그때를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해요.”
“레니샤.”
“네.”
“정말로 기쁜 게 맞습니까?”
레니샤의 눈이 커졌다.
의문을 품은 그녀에게 카시우스가 물었다.
“왜 나는 당신이 기뻐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카시우스가 한숨과 함께 레니샤의 손끝에 키스했다.
“나의 행운이 전부 당신의 편이 될 수 있기를.”
레니샤가 알 수 없는 저릿함에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