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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황후의 침실에는 뱀이 산다 (83/135)


83화. 황후의 침실에는 뱀이 산다
20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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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뚝.

아무 이유 없이 저택의 홀을 서성거리던 카시우스가 린데이의 말에 멈춰 섰다.

린데이가 어색한 얼굴로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그제야 자신이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카시우스가 얼굴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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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괜찮아 보이는군.”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뒤에 남겨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인 것들만 상상하고 있었다.

렉서스는 미쳐 있었다.

무엇이든 저지를 수 있는 정신 나간 새끼.

독충과 독사를 한곳에 모아놓고 그들이 싸워 이길 때까지 지켜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기는 건 레니샤일까. 렉서스일까.

린데이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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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밖에 없을 땐 믿어야지요. 곧 레니샤 님께서 연락을 주실 겁니다. 이대로 저버리실 분도 아니시고, 포기하실 분도 아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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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가 위험할 일이 있을 수도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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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께서 걱정하시는 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린데이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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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레니샤 님께서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계셨던 것은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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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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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준비해두셨습니다. 부지런히 사람을 사 모으셨지요. 황성에는 돈으로 움직이는 자들이 참 많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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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돈의 힘을 믿는 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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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님께서는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누군가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으세요. 그게 무슨 뜻이냐면……. 다른 이의 손을 잡아야 할 만큼 모자란 금액을 제시하시지 않는 분이시라는 뜻이랍니다. 그래서 한번 레니샤 님의 손을 잡은 이들은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않지요.”

린데이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지난 세월 동안 린데이가 지켜본 레니샤는 그런 사람이었다.

레니샤와 한번 손을 잡은 자들은 정보를 레니샤에게 팔길 바랐지, 다른 이와 손을 잡길 바란 이는 없었다.

이번처럼 헨리나, 게일 같은 변수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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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는 돈으로 사람을 움직이고 황제는 목숨으로 사람을 움직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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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차이지요. 결국 사람은 눈앞의 이익을 쫓길 마련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아무리 가족들의 목숨을 쥐고 있다고 한들 스스로의 이익을 좇는 자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캘리엇 백작처럼 충직한 자들은 드물지요.”

카시우스가 몸을 완전히 돌려 저택을 응시했다.

렉서스가 레니샤를 위해서 마련해준 작은 요새였다.

거대한 고택은 레니샤를 꼭 닮아 있었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다른 자들과 똑같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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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당신을 사랑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 달콤한 고백을 받지 않았던가.

카시우스는 레니샤의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과는 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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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해볼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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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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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

레니샤가 황성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고작 일이 벌어지고 몇 시간 만에 알려진 소식은 사교계 인사들을 뒤흔들었고 그 소문은 게일에게도 전해졌다.

얼굴이 수척하게 마른 게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가 도로 앉았다.

게일이 고목나무 같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레니샤는 망설이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에도 게일은 그것을 확인했다.

레니샤는 제 발로 황성으로 걸어 들어가 황제의 곁에 섰다.

레니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가 무엇을 향해 가는지 여전히 게일은 모른다.

게일은 이미 도태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해도 캘리엇 백작은 살아돌아오지 못한다.

게일에게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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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아이를 자네의 아이라고 주장하게. 그렇다면 내가 자네를 위한 면죄부를 내어줄지도 모르지.’

싸늘하게 일갈하던 목소리를 내내 잊을 수가 없었다.

카나리아 황후의 배 속에 있는 아이를 게일의 아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게일이 입술을 빠득 깨물었다.

비릿한 향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게일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삭막해진 저택 안을 화사하게 물들이는 여자였다.

마치 봄 같기도 하고, 붉게 타오르는 여름 같기도 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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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투리엘.”

레니샤가 보낸 죽음의 사신이 게일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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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또 만나니 반갑군요, 게일 캘리엇.”

발음에 강세를 주는 모양새가 게일의 처지를 일깨우기 위함인 듯했다.

차가운 조소가 걸린 작은 얼굴이 게일을 비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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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로 온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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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을 무는 개에게 필요한 건 목줄이겠지요? 레니샤 님의 전언입니다.”

마담 투리엘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눈빛이 게일을 그대로 꿰뚫는 듯했다.

게일이 파르르 떨었다. 마치 설원에 내던져진 것 같은 추위가 그를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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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줄이 넘어왔으니 선택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마담 투리엘이 붉게 웃었다.

화려하게 휘어지는 입술 사이로 드러난 가지런한 흰 이가 유독 눈에 띄었다.

그 이로 게일을 물어뜯을 것만 같았다.

게일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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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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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합니다. 아주 안전한 곳에서 레니샤 님의 비호를 받고 있지요. 앞으로 그분들은 힐로샤인에서 살아가시게 될 겁니다.”

레니샤는 투리엘에게 카시우스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카시우스의 기사들은 레니샤를 위해서 움직였다.

전쟁터에서 훈련된 기사들이 게일의 가족들을 손에 넣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칼날 아래에 렉서스의 검은 힘 없이 꺾였다.

게일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책상 위에 올려진 게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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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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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결국 그리되었지요. 모든 건 돌아온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이번에는 당신이 그 대가를 치를 차례입니다.”

게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졌다.

사신은 낫을 휘둘렸다.

아무리 목을 움츠리고 도망쳐도 사신은 게일을 놓치지 않는다.

투리엘의 번뜩이는 눈빛 앞에서 게일은 그의 미래를 예감했다.

어둡고 붉은 미래를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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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게 없군.’

레니샤가 과거, 그녀가 머물렀었던 궁을 둘러보고 한 생각이었다.

조금도 변함이 없는 여전한 공간.

카나리아는 정말 바람처럼 스쳐만 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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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건지.’

레니샤는 여기에 홀로 들어왔다.

린데이조차도 카시우스의 곁에 남겨두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헤일린과 레니샤, 단둘이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레니샤의 자금은 황성 일부를 장악하고 있었지만, 그들을 완전히 믿을 수는 없었다.

투리엘은 충직하고 성실한 자이니 지금쯤이면 게일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게일이 어떤 표정으로 황성에 나타나 뭐라고 떠들어 댈지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 이 궁에서 쫓겨나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간 카나리아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 지도.

조금씩 저물어 가는 하늘을 레니샤가 멀거니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사람이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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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그는 지금 어떤 표정으로 레니샤를 생각하고 있을까.

레니샤가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달을 포근히 안은 어둠이 창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레니샤가 발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

헤일린은 정신적 소모가 심했는지 지쳐 잠들었고 아직 아무도 들이지 않은 궁은 텅 비어 있었다.

고요에 잠든 궁은 처음이었다.

오가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거대한 성.

렉서스가 어떤 이들로 이곳을 채워 넣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레니샤의 성이었다.

레니샤가 밖의 공기로 폐부를 가득 채울 때였다.

스르륵.

레니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아야 할 공간이었는데.

정원에도 토끼는 있었다.

그런 작은 동물들도 야생성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 밤에 활동하곤 하니 토끼나, 고양이 같은 짐승들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 익숙한 동물들이라기에는 차갑고…… 무언가 매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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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

레니샤의 발코니를 타고 올라온 것은 붉은 뱀이었다.

팔뚝 반절만 한 두께에 반질거리는 붉은 비늘을 가진.

황금색의 작은 두 눈과 머리에 박힌 황금색 반점 세 개가 귀여운 뱀이었다.

레니샤가 홀린 듯이 손을 내밀었다.

레니샤의 적막을 깨뜨린 주인공은 생각보다 더 작고 귀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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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디에서 왔니?”

닮은 뱀은 알고 있었다.

카시우스 로테라.

하지만, 카시우스라고 하기에 이 뱀은 너무 작았다.

카시우스의 손가락 두어 개를 합치면 이 뱀의 몸통 두께만 할지도 모른다.

캬악.

뱀이 입을 크게 벌리고 뭐라고 떠들었다.

연분홍빛의 혀를 드러내곤 뱀이 레니샤의 손에 고개를 맡겼다.

동그란 이마를 레니샤가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레니샤의 귓가로 믿기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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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부드럽게 깔리는 목소리였다. 레니샤가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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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다시 한번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목소리에 레니샤가 숨을 삼켰다.

이 목소리를 잊을 수가 있나.

레니샤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뱀을 보았다.

뱀이 귀여운 머리통을 갸웃했다.

이 뱀이 아니고서는 지금 겪고 있는 이상 현상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레니샤가 뱀을 낚아채듯이 손에 쥐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발코니 문까지 단단히 걸어 잠갔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레니샤가 손에 쥐고 있던 뱀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 앉은 레니샤가 침을 삼켰다.

뱀은 레니샤가 거칠게 다룬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연신 ‘캬! 캬!’ 소리를 내며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었다.

레니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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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뱀이 레니샤를 빤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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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우스 맞아요?”

레니샤가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 얼굴로 속삭이듯 다시 한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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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샤.]

뱀의 가느다란 혀가 파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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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레니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카시우스에 대해서 모든 걸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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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염둥이.”

레니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고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혼자 남겨졌다고 생각했는데, 카시우스는 다시 한번 레니샤의 곁으로 찾아왔다.

처음부터 그랬다.

로테라 공작 부부가 떠나고 이제는 레니샤만 남았다고 생각했던 때에도 카시우스는 혜성처럼 등장했었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때에.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혼자 두지 않는다.

레니샤가 왠지 눈가가 달아오르는 듯해 일부러 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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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은 또 어떻게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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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하고 똑같이 기다리기만 하는 건 싫었습니다.]

뱀에게도 표정이 있다면 지금은 아마도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불만이 있을 때면 짓던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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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 뒤가 아니라 곁에 설 사람이니까요.]

레니샤가 뱀의 머리에 키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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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너무 사랑스럽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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