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꿈틀거리는 힐로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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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꿈틀거리는 힐로샤인
2023.01.31.
이사벨라가 조금씩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힐로샤인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이었다.
그리고 이사벨라가 원하는 대로 검을 배우기 시작한 덕분이기도 했다.
‘다음에는 제가 어머니를 지켜드릴 거예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울리지 않는 날카로운 검을 움켜쥔 아이가 다짐처럼 되뇌던 말이었다.
“아가씨! 그렇게 의욕만 넘치다가는 다칠 수 있어.”
테리언을 포함한 몇몇 기사들이 이사벨라의 훈련을 도맡아서 진행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떠넘겼다가 거친 기사들에게 휘말려 다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테리언은 최대한 섬세한 자들로 골랐다.
“이렇게요?”
“네, 잘하셨어요.”
테리언의 눈짓에 관전하고 있던 기사들이 엉거주춤하게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이사벨라가 옅게 웃었다.
예전의 어린 모습은 전부 버려버린 것처럼 이사벨라는 변했다.
더 이상 환하게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게 더 걱정스럽다는 걸 알기는 할까?
어린아이가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여 안쓰러운 마음만 한가득이었다.
테리언이 안쓰러운 한숨을 삼켰다.
아이의 탓이 아니라고 말해도 눈앞에서 어미를 잃은 아이의 마음을 다독일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브릭스턴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술을 열었다.
“메테오 왕자. 황제가 움직였네. 또다시 힐로샤인을 공격해올 거야. 그게 어떤 형태로든 말일세.”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샴디르에서는 아직 사람이 오지 않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일주일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브릭스턴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족들이 유입되고 있네. 카시우스 공작을 따라서 말이지. 무언가 비범한 구석이 있다 싶었는데 그런 거였더군.”
“힐로샤인에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겠군요.”
메테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레니샤가 개척한 땅이 점점 발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있었다.
레니샤가 토대를 닦고 필요한 것들을 들였다.
도로가 생기고 사람들에게는 일자리가 생겼다.
아낙들이 캐온 검은 금속을 대장간으로 가져가면 장인들이 칠흑 같은 무기와 갑옷들로 재탄생시키고 있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검붉은 빛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메테오 왕자가 우리를 돕는다 하니 이만큼 든든한 일이 없네.”
“레니샤 님께서 뜻을 이룰 때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사실 메테오로서는 레니샤를 데리고 샴디르로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황제가 되기를 꿈꾸는 여자였다.
레니샤를 샴디르에 담기에는 그 그릇이 너무 작았다.
레니샤가 넘쳐흐를지도 모른다.
메테오의 작은 꿈은 허망하게 무너져 버렸지만 그래도 그녀가 제 꿈을 이루는 건 보아야겠다.
샴디르의 왕은 메테오의 뜻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다만, 왕이 바란 게 있다면 이 일에 대한 보상이었다.
샴디르는 이미 레니샤에게 진 빚을 충분히 갚았으니, 지금 주고 있는 도움에 대한 대가가 필요하다는 거다.
‘추후 황실과 샴디르 사이의 우호 관계에 대해서 공고히 할 필요가 있을 거다, 메테오 왕자. 레니샤 로테라가 황위에 오르고 그녀에게 후계자가 생긴다면 그 후계자의 옆자리에 샴디르의 자손을 앉힐 수 있겠느냐?’
메테오의 가슴이 스산해졌다.
탐나는 것은 레니샤의 옆자리였다.
카시우스에게 그 자리가 어울리는가에 대해서 수도 없이 생각했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그걸 결정하는 건 메테오가 아니라 레니샤라는 것을!
레니샤가 고른 사람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 것이다.
메테오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없었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때때로 가슴에 부는 바람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대신에 샴디르의 자손을 레니샤의 가족으로.
지금 힐로샤인과 레니샤는 확실히 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캘리엇 백작의 죽음으로 제도의 기사들은 대다수 렉서스에게 넘어갔고 국경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은 움직일 리 없었다.
그건 외세에게 길을 열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레니샤와 렉서스 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레니샤가 그들에게 얻어내야 할 것은 지지였다.
그렇다면 병력은 다른 곳에서 끌어올 수밖에 없었다.
과거 로테라의 기사였던 자들과 카시우스와 함께 온 기사들. 거기에 샴디르.
레니샤를 뒷받침할 병력으로는 충분해졌다.
‘만나서 반갑네, 메테오 왕자. 나는 응당 했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네.’
처음 레니샤를 만났던 날이 자꾸 가슴을 들뜨게 만든다.
참 예쁘게도 웃던 그 얼굴이 말이다.
미쳤다고 소문난 황제 옆에서도 레니샤는 독보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로테라 공작가의 비참한 말로도 그녀를 퇴색시키진 못했다.
황실의 음습한 기운 가운데에서 레니샤만이 눈에 들어왔다.
메테오가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사로잡는 여자였다.
그 화려한 빛을 탐하지 않을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레니샤에게 홀린 자들이 한둘이겠는가.
렉서스 황제도 그렇고, 카시우스도 그렇고, 메테오도 그렇고.
전부 레니샤에게 인생을 배팅했다.
브릭스턴이 메테오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리를 비웠다.
메테오는 왠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
“아무래도 이족들과 샴디르가 들어오면 그 사이에 첩자가 섞일 수 있네.”
브릭스턴의 말에 테리언이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언도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족들은 힐로샤인에 흡수되어야 하는 세력이었다.
그리고 샴디르는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는 세력이었고.
그들을 한데 융합시킬 수도 없었다.
대놓고 감시할 수도 없고.
하지만, 이미 힐로샤인으로 공격이 있었던 지금 그 세력들 사이에 어떤 불순분자가 섞여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이사벨라의 호위를…….”
거기까지 말한 브릭스턴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이사벨라는 물조차 샐 틈 없는 보호를 받고 있었다.
헤일린이 납치된 이후로 모두의 눈이 이사벨라를 향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테리언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켜낼 수 있겠지? 헤일린은 우리 아이를 훌륭하게 지켜냈어. 하지만, 나는 헤일린을 지켜내지 못했지. 그러니 이사벨라라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힐로샤인도 두 번 다시는 당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모든 게 맞아떨어졌을 뿐이었다.
순찰이 자리를 비우는 그 짧은 5분과 이사벨라와 헤일린이 밖에 노출되었었던 시간이 겹쳐졌다.
그 우연을 파고든 첩자들이 헤일린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다시는 그럴 일 없습니다.”
테리언이 단호하게 말했다.
로테라의 기사들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이족들과 샴디르뿐만이 아니었다.
로테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쳤었던 과거의 영광스러운 기사들이 돌아왔다.
선대 로테라 공작에게 했었던 맹세를 지키겠다면서 말이다.
그들은 브릭스턴과 이사벨라를 아는 자들이었다.
로테라의 기사들과 카시우스의 기사들이 함께 성을 방비하고 있었다.
그 벽은 점점 더 두꺼워지고 있었다.
늘어나는 사람들만큼이나.
“메테오 왕자가 속에 다른 생각을 품을 수도 있어. 아무리 샴디르라고는 하나 그렇게 무한정으로 퍼줄 리가 있나.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이를 드러내지 못할 겁니다. 메테오 왕자가 그렇게 그릇이 작은 자가 아닙니다. 게다가 샴디르는 신의를 아는 자들이니 어린 아가씨를 납치해 협박할 자들도 아니지요.”
“맞아, 자네 말이 맞아.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모르겠군. 뭔가를 놓친 게 분명한데 뭔지를 모르겠어.”
브릭스턴이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힐로샤인은 점점 번성해 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늘어나니 건물도 늘어나고 소란도 늘었다.
망루를 움켜쥔 브릭스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 불안감의 발로는 무엇일까.
대체 무엇이 힐로샤인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걸까.
레니샤에게 힐로샤인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는…… 반드시 이 성을 지켜내야 한다.
그런 브릭스턴에게 도움의 손길이 도착했다.
“이족의 수장이 브릭스턴 님을 뵙길 청합니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이었다.
얼굴을 베일로 가린 여자가 브릭스턴을 찾아왔다.
“이족들의 수장입니다. 예니카라고 불러주십시오.”
“나는 브릭스턴 로테라라고 한다. 자네를 히샴이라고 하는가?”
여자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히샴은 없습니다. 이족들은 멸망했고 그 핏줄은 전부 죽었지요.”
브릭스턴이 피식 웃었다.
“솔직하지 못한 자와는 나눌 이야기가 없는데. 로테라가 눈뜬장님으로 보이는가 보군. 그게 아니면 지킬 게 있어서 그런 건가?”
고개를 든 예니카와 브릭스턴의 눈이 마주쳤다.
예니카가 쓰게 웃었다.
“지킬 게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요.”
“카시우스에 대해서 알고 있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좋아. 아버지께서 직접 지키신 비밀이니 나 또한 그 비밀을 지킬 걸세. 약속하지.”
“……히샴의 핏줄은 끊겼습니다. 더 이상 이족들의 나라는 세워지지 않을 테니까요.”
예니카가 베일을 끌어 내렸다.
기묘한 빛을 발하는 그녀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저는 미래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
이사벨라가 검을 꾹 쥐었다.
“그렇게 힘을 주다가는 아가씨가 다칠 수 있어. 힘을 빼고.”
이사벨라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런 기력 없이 유령처럼 다니던 이사벨라에게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은 카시우스의 기사들이었다.
죽음의 사선을 함께 넘어온 자들.
“천천히. 아가씨만의 자세를 찾는 거야. 검을 너무 무겁게 휘두르려고 하지 말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그렇지.”
이사벨라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쉬지 않고 벌써 몇 시간째인지 모르겠다.
아이가 이를 악물고 덤벼드는 것이 안쓰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다음에는 제가 어머니를 지켜드릴 수 있겠죠? 어머니 말고 아버지도, 그리고 고모님도요.”
“당연하지, 아가씨. 이 정도면 아주 잘하고 있다고.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사벨라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른 컸으면 좋겠어요. 이 손이 2배쯤 커지고 키도 아버지만큼 자랐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전부 지켜줄 수 있을 텐데.”
기사가 이사벨라의 머리를 헤집었다.
꽤 자라난 아이의 머리가 흔들렸다.
이사벨라가 울먹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른들이 해야 할 고민을 이런 꼬맹이가 하고 있으니. 미안해, 아가씨. 지켜주기로 했는데.”
이사벨라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건 이사벨라도 알고 있었다.
잘못이 있다면 그런 일을 사주한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이사벨라가 고집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괜찮아요. 기사님은 저를 지켜주세요. 저는 다른 사람을 지킬 테니까.”
기사들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힐로샤인의 꼬맹이가 날이 갈수록 자라나고 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새싹처럼 쑥쑥.
점점 태풍은 크기를 키워가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이 아이를 순수하게 지켜낼 수는 없는 걸까.
“다시 해요.”
이사벨라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아가씨. 아까 했던 것처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