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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갈고 닦은 검을 겨눌 시간 (90/135)


90화. 갈고 닦은 검을 겨눌 시간
2023.02.07.



 
렉서스가 실소를 흘렸다.

황성은 넓고 사람은 많은데 그 안에서 렉서스는 혼자였다.

지독한 고독함이 렉서스를 집어삼켰다.

레니샤는 렉서스가 고른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레니샤가 렉서스를 골랐고 그녀의 집안이 그를 만들어 냈었다.

그에 반해서 카나리아는 어땠나.

렉서스가 골랐고 그 자리에 끌어올렸다.

그런데 두 사람 모두 렉서스만 남겨두고 떠났다.

결국에 렉서스의 곁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차디찬 황좌뿐이었다.

화려한 황금빛의 의자에 걸터앉아 렉서스가 삐뚜름하게 입술을 끌어 올렸다.


“시종장.”

내가 이럴 필요가 있나.

렉서스는 누가 뭐래도 이 제국의 황제다.

그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렉서스가 입가를 쓸어내렸다.

회의감이 드는 것은 전에도, 지금도 반복되고 있는 이 상황이 환멸 나기 때문이리라.

선황 또한 자신의 아들들을 견제했었다.

그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라이벌로서 아들들을 인식했었다.

역사상 아버지의 자리를 노린 황자의 수가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황자들은 필연적으로 황제와 반목해왔다.

선황은 렉서스에게 벌어진 일 또한 묵인했었다.

렉서스가 사라진다는 건 그의 라이벌이 사라진다는 것이니.

렉서스가 삐뚤게 웃었다.

시종장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여자들을 불러라.”

“네?”

지금 이런 상황에 무슨 여자?

클라우드 공작이 대놓고 카나리아를 비호하고 나섰다.

카나리아에게서 받아낼 게 있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의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 안 되면 레니샤에게 무릎을 꿇고 빌거나.

황자가 태어나고, 카나리아와 척지게 된 이후로 예견된 상황이었다.


“폐하, 지금은…… 그러실 때가…….”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시종장이 괜한 오지랖을 부렸나 싶어 침을 삼켰다. 돈만 받으면 그만인데.


“클라우드 공작에게 가서 무릎이라도 꿇을까?”

렉서스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 누구도 반겨주질 않으니 나를 반겨줄 이들을 찾아야겠다.”

“폐하…….”

시종장이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자리가 위태로운 듯싶다.


“황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질 겁니다. 제발 자중하심이……. 내일부터는 사신단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세 뱀 신의 축제와 더불어 황자 전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서요!”

이 정신없는 와중에 렉서스의 뒤치다꺼리까지 해야 한다니.

시종장이 온 마음을 다해 고개를 숙였다.

렉서스가 미간을 꾹 눌렀다.

이제는 그의 종조차 마음대로 되질 않는다.


“시종장.”

렉서스가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제 팔뚝만 한 검을 질질 끌며 시종장에게 향했다.

시종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괜한 참견으로 목숨을 바닥에 내던지게 된 건가? 작은 후회가 들었다.

렉서스가 항상 정신이 나가 있다는 사실을 주의했어야 하는데.

개처럼 벌어서 정말 개처럼 버리게 생겼다.

시종장이 이를 악물며 눈을 꾹 감으려던 순간이었다.


“황제 폐하.”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시종장을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렸다.


“무슨 일이지?”

렉서스가 고개를 돌려 시종을 응시했다.


“레니샤 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눈길은 시종장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격앙된 목소리는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렉서스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시종의 앞에 검을 집어 던졌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렉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들어오게 해.”

간신히 목숨을 건진 시종장이 바닥을 기어 도망쳤다.


“황제 폐하, 레니샤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레니샤.”

렉서스가 도로 황좌에 주저앉았다.

그를 들끓게 했었던 모든 생각들이 가라앉았다.

렉서스가 고개를 나른히 기울이며 레니샤를 응시했다.


“이렇게 찾아오기도 하는군.”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렇게 무례를 범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일이오니 저를 외면하지 마십시오.”

렉서스가 관자놀이를 손에 기댔다.

삐딱한 자세로 앉아 렉서스가 레니샤를 응시했다.

그는 머릿속에서 레니샤를 수도 없이 안았다.

상상 속의 레니샤는 현실과는 완전히 달랐지만.

간드러지게 웃으며 안겨 오는 레니샤를 상상했다.

렉서스의 발아래를 기는 레니샤도.

렉서스가 자줏빛 입술을 휘어 올렸다.


“말해봐, 레니샤. 네가 바라는 게 무엇이지?”

레니샤가 음험한 눈빛 앞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렉서스는 클라우드 공작의 손을 함부로 놓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카나리아와 클라우드 공작을 내쫓는 대신에 이렇게 땅굴이나 파고 있는 것 아니던가.

그렇다면 그 사이를 끊어줘야지.

렉서스가 클라우드와 카나리아를 동시에 쳐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나.


“저는 한 가지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지?”

“외람되오나 황제 폐하의 사람으로 지냈던 시간 동안 저는 한 번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었습니다.”

렉서스가 느리게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빠르게 광기가 거둬졌다.

레니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대충 눈치챈 것이다.


“카나리아는 황제의 여자다. 감히 함부로 몸을 굴렸을 리 없어. 게다가 카나리아는 내내 덴버스 후작이 감시해왔어. 덴버스 후작이 카나리아를 방치했다는 건가? 내 말을 어기고?”

“저는 알지 못합니다.”

레니샤가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내일이면 사신단들이 들어온다.

그리고 내일모레부터 축제는 시작된다.

덴버스 후작에게도 빠져나올 수 있는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렉서스 또한 타국의 사신들이 들어와 있는 앞에서 일을 벌일 리는 없었다.

제국의 위신을 땅에 처박고 그들의 내분을 보일 수 있었으니.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데 있지요. 저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여자들도 아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카나리아가 해냈습니다. 그토록 공교로운 타이밍에요. 의심할 여지가 있는 일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단가?”

렉서스가 차게 되물었다.

뇌에 얼음물이 퍼부어진 느낌이었다.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렉서스가 그간 모르고 싶었던 진실을 까발리라는 거였다.

카나리아마저도 렉서스를 배신했다고?

그가 고른 그 여자조차?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에 짙은 살기가 맺혔다.


“한마디만 더 드리겠습니다, 페하. 클라우드 공작이 이 상황을 몰랐을까요?”

레니샤는 칼자루를 내밀었다.


“클라우드 공작은 오랫동안 정치판에서 살아남았을 만큼 뼈가 굵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클라우드 공작은 카나리아를 골랐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레니샤는 새로운 의심의 씨앗을 심었다.

렉서스와 클라우드 공작에게 반목할 일이 생겼는데 더 깊이 파드려야지.

그 깊숙이에 의심이 씨앗을 내릴 수 있도록.

렉서스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 일의 배후에 클라우드 공작이 있을 수 있다?”

“덴버스 후작이 아무것도 몰랐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었겠지요. 클라우드 공작처럼 노회한 귀족이 눈을 가리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게일이 나서기 전에 레니샤는 기반을 만들었다.

렉서스는 게일을 토대로 날카로운 칼을 휘두를 것이다.

클라우드 공작과 카나리아를 향해서.


“황가의 피를 더럽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레니샤는 렉서스의 불안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선대 로테라 공작이 렉서스의 황좌를 다시 앗아갈까 두려워했었다.

저 자리에 대한 집착이 깊은 것이다.

그런데 황자가 태어났다? 그 열등감이 치솟는 것도 당연했다.


“신중하실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레니샤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

사신단을 맞이하는 에브리나 홀.

세 뱀 신 축제를 기리기 위해서 사신단이 올 때마다 히엔트리는 이 홀을 개방해왔다.

히엔트리의 귀족들을 전부 모아놓고 그들의 위용을 자랑했었다.

클라우드 공작은 항상 렉서스의 왼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뭣? 아직도 준비가 안 된 게냐? 무엇이 이렇게 굼떠! 곧 있으면 사신단이 알현을 마치고 연회장으로 올 터인데! 황제 폐하를 기다리게 할 셈이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시종이 발을 동동 구를 때 시기적절하게 레니샤가 나타났다.

레니샤가 부드럽게 웃었다.


“클라우드 공작.”

“공작 부인. 오랜만이오.”

클라우드 공작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와 레니샤는 완벽하게 대척점에 서 있었다.

로테로 공작가와 클라우드 공작가는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거기다 클라우드 공작은 로테라의 멸문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카나리아와 함께 렉서스를 부추기지 않았나.


‘로테라가 황제 폐하의 자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로테라를 더 믿지요. 민심은 로테라를 영웅이라고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황성을 향해 검을 겨누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이십시오. 그들을 버리고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 옆에서 그 귀에 대고 이따위의 말을 속삭여댔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공작.”

레니샤가 생긋 웃었다.

그러니 레니샤가 한 일은 죄를 돌려주는 것뿐이다.


“나도 들어갈 수 없느냐?”

시종이 고개를 붕붕 저었다.

이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것은 클라우드 공작과 카나리아, 그리고 그녀의 황자뿐이었다.

그들만 아니라면 길거리의 비렁뱅이도 들일 수 있다는 황명이 떨어졌다.

황제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아닙니다, 레니샤 님. 얼른 들어가시지요.”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다시금 웃었다.

클라우드 공작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사신단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레니샤가 좁게 열린 문틈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문은 닫혔고 다시는 클라우드 공작에게 열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나는 클라우드 공작이다! 이 제국의 공작! 감히 내 앞을 막아선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황제 폐하께 당장 이 일을 고해…….”

“폐하의 명이십니다. 클라우드 공작 각하를 안으로 모시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는 일개 시종일 뿐 황제 폐하의 의중은 알지 못합니다.”

“당장 문을 열라니까!!!”

클라우드 공작이 소리를 지르는 틈을 타서 연회장의 음악이 시작되었다.

마치 그를 조롱하는 것처럼.

클라우드 공작이 이를 빠득 갈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저 육중한 문은 열리지 않겠지.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나!

황제가 클라우드 공작을 버렸다면 그 또한 그에 대비해야겠지.

그 어린 것을 황제로 만들 준비를 해야겠다.

클라우드 공작이 날카롭게 몸을 돌렸다.

로테라 공작도 한 일을 그라고 못 할 게 무엇인가!

렉서스도 아무도 없을 때의 무력감을 알아야 한다.

황제가 그에게 무릎을 꿇고 비는 것도 좋겠지.

클라우드 공작이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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