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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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광기
2023.02.14.
카시우스가 팔짱을 꼈다.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이들 중, 특히 흠모의 시선을 던지던 귀부인들이 빠르게 부채질을 했다.
이제는 시들어가는 남편에 비해서 카시우스는 너무나…….
“큼, 큼!!”
하지만, 카시우스는 지금 그런 게 보이질 않았다.
그가 느끼는 시선은 레니샤의 것과 렉서스의 것뿐이었다.
저 자리에서 레니샤를 어떻게 끌어낼지 골몰하고 있었다.
레니샤는 지금 이 상황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저 개자식 면상을 짓이겨줄 수만 있다면.’
그런 상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떻게 저렇게 대단하게 뻔뻔한 놈이 있을 수 있지?
남의 아내를 옆에 앉혀놓고 희희낙락하는 꼴이라니.
게다가 레니샤가 제 여자가 된 것처럼 눈을 부라리고 있지 않나.
저걸 그냥.
카시우스가 주먹을 쥐자 우드득 소리가 울렸다.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몸을 수련하는 카시우스다.
전쟁터에서 살벌하게 배운 카시우스의 기세를 일반 귀족들이 받아내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카시우스를 경멸하던 자들도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 난장판 같은 곳에서 즐거운 건 아무래도 레니샤뿐인 것 같다.
‘곧…….’
레니샤가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레니샤는 유독 화려한 쇼맨십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이왕 일을 칠 거면 모두가 볼 수 있게 치자는 주의이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최적의 무대였다.
그녀가 기다리고 있는 메인 디쉬는 따로 있었다.
고개를 부드럽게 돌리는 레니샤의 눈에 덴버스 후작이 띄었다.
방금 전까지도 자리를 비우고 있었는데 나타났다는 건.
‘준비가 됐군.’
요리가 끝났다는 거다.
레니샤의 생각이 맞아떨어졌는지,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페하아아!! 폐하!!!!”
시종이 울먹이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데 이런 자리에서 경거망동이냐.”
렉서스가 차갑게 물었다.
가뜩이나 심기가 복잡미묘한데 거슬리는 것이 생기니 당장이라도 검을 빼어들 기세였다.
시종이 바닥에 개구리처럼 엎드렸다.
“급히 고할 것이 있습니다!”
모두가 놀란 얼굴이었지만, 레니샤의 심장은 뛰었다.
“게일 캘리엇 백작이 급하게 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통에……! 으아악!”
뒤에서 나타난 괴한이 시종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본의 아니게 붕 떴다가 바닥에 떨어진 시종이 눈물을 터뜨렸다.
무식한 방법으로 밀고 들어온 건 게일이었다.
얼굴이 수척하기는 했지만 눈빛은 성성했다.
선대 캘리엇 백작 아래에서 오랫동안 기사로서 일해온 그다.
시종을 한 손으로 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거기까지 해낸 게일이 느리게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황제 폐하!!”
렉서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놈이 뭔가를 작정한 것 같은데.
“드릴 말씀이 있어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무슨 말을 하려고?”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폐하를 만나 뵐 길이 쉽지 않았습니다!”
레니샤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 메인 디쉬가 레니샤가 이 자리에 온 또 다른 이유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 파티였다.
순식간에 홀에 긴장감이 흘렀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식기가 달각이는 소리조차 멎어버렸다.
“고변할 것이 있나이다!”
“말하라니까!”
렉서스가 짜증스럽게 소리 질렀다.
이 자리에서 말해도 된다고 허락한 건 렉서스다.
게일이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다.
“벌을 청하옵니다, 폐하! 저는 저기 앉아 있는 카나리아 황후와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저는 카니라아 황후 폐하의 내연남으로서 황제 폐하께 진실을 고하나이다!”
아직 가장 중요한 대사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여러 귀족들이 거품을 물었다.
“헉!”
“그러게 하녀 출신 황후는 안 된다니까!!!”
지금은 외교 사신들이 모여 있는 자리였다.
이건 대단히 체면 상하는 일이었다.
몸을 담고 있는 히엔트리의 이미지는 대외적인 그들의 이미지와 같았다.
“무슨 소리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나리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안 그래도 미칠 것 같았다.
카나리아의 자리에는 레니샤가 앉아 있었고 오랜만에 마주친 덴버스 후작은 그녀에게 시선도 주질 않는다.
카나리아가 마른침을 삼켰다.
“폐, 폐하!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저는 폐하밖에 모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저를 욕보이는 저 남자를 벌하소서!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카나리아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저 남자가 들어올 때부터 불길했다.
“카나리아.”
렉서스의 눈동자가 카나리아를 향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도 답지 않은 혼란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혼란은 느린 속도로 분노로 변질되었다.
“아닙니다, 폐하!!”
카나리아가 바닥으로 미끄러지듯이 내려와 고개를 처박았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폐하.”
게일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분내에 빠져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자신이다.
시나리오상으로 게일은 카나리아를 임신시킨 대단한 배신자였으니 말이다.
“저를 믿어주소서!!”
카나리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폭포수 같은 눈물이 그녀를 적셨다.
클라우드 공작 뒤에 숨어서 문조차 내다보지 않았던 카나리아가 말이다.
렉서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렉서스의 귀에 게일이 못을 박아넣었다.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황자 전하께서는 저를 닮으셨습니다! 황제 폐하를 닮은 거라고는 은발뿐이지요!”
게일이 호흡을 골랐다.
“저는 은발은 아니지만 제 증조모가 은발이셨습니다!”
아이는 렉서스를 닮지도 않았지만, 카나리아도 그다지 닮지 않았다.
“정말 닮은 것 같은데. 황자 전하 얼굴 뵌 적 있어?”
“커흠. 황후가 거들먹거리면서 귀부인 몇몇 불러들였을 때?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중요한 건 폐하를 닮지 않았다는 거지.”
흥미에 굶주렸고, 카나리아를 싫어하는 군중은 금세 휩쓸렸다.
“아, 아니야! 당신 미쳤어??!”
카나리아가 비명을 질렀다.
카나리아의 심장이 벌벌 떨렸다.
역시, 도망쳤어야 했나.
바바라의 꼬임에 넘어가 클라우드 공작과 손을 잡을 게 아니라……. 아무도 못 찾는 곳으로.
이런 일에 휘말릴 거라고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 나는 당신하고 잔 적이 없어! 몸 한 번 섞어본 적이 없다고!”
일국의 황후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었다.
그것도 공식 석상에서.
모두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깊은 일부 노귀족들의 얼굴은 노여움으로 빨개졌다.
“처음 본단 말이야! 폐하, 저를 믿으세요. 아이는, 폐하의 아이는……!”
“……그러고 보니 아이가 날 닮지 않았다는 걸 들은 것도 같군.”
렉서스의 말에 카나리아의 피가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카나리아가 벌벌 떨었다. 카나리아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게일이 아닌 것은 맞다.
아무리 카나리아가 아무 남자나 주워 왔다고 해도 그녀와 몸을 섞은 남자를 모를까.
게일은 아니다.
그러면, 대체 왜!
안면도 없는 사이에 무슨 원한으로!
카나리아의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다가 카나리아와 레니샤의 눈이 마주쳤다.
레니샤가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예쁘게 휘어지는 입술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세상에 지켜지는 비밀이 어디 있나.’
카나리아가 희게 질렸다.
‘너구나!!’
기어이 카나리아의 인생을 시궁창에 처박는 것이다.
레니샤는 저런 인간이었다!
절대로 남이 잘되는 것은 보지 못하는 이기적인 족속!
카나리아가 이 자리에 앉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레니샤를 보호하는 족속들에게 물리고 뜯겨주지 않았나!
투리엘에게 떠밀려 레니샤에게 편지를 썼었던 일은 여전히 치욕스러웠다.
그런데 레니샤는 어떤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카나리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걸 어떡하나.
모두가 심판자의 눈으로 카나리아를 보고 있었다.
“저, 저는 아닙니다!”
“폐하, 제가 지금이나마 고하는 것은 양심에 가책을 느낀 까닭입니다! 히엔트리를 제 피로 더럽힐 수는 없었습니다!”
게일이 울부짖었다.
“그러니 저를 벌하십시오!”
게일이 숨을 헐떡였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모두 끝났다.
이제 이렇게 죽으면 그만이었다.
렉서스가 그의 여자를 건드린 게일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게일의 가족들은 살아남는다.
렉서스보다는 자비로운 레니샤의 품 안에서.
“정말 많은 걸 바라는군.”
렉서스가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덕분에 대륙 앞에서 대대로 창피를 당했다.
도나타 공주는 눈을 홉뜨고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대단한 구경거리가 나긴 했지.
렉서스가 고개를 꺾었다.
렉서스가 경비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아 든 렉서스가 비척거리며 걸었다.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와 광기에 물든 표정.
렉서스가 검을 들어 휘둘렀다.
“으아아아악!”
그런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귀부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닥쳐!!!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는 다 죽이겠다.”
렉서스가 목이 바닥에 떨어진 게일을 손가락질했다.
“가리지 않고 이 꼴로 만들 거야!!!”
레니샤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녀의 열매는 또 다른 열매를 맺었다.
레니샤의 시선이 도나타를 향했다.
도나타는 하얗게 질린 채로 부르르 떨고 있었다.
레니샤는 렉서스가 다른 아이를 낳게 될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타국의 공주가 히엔트리로 오는 일만큼은.
게일이 오늘을 골라야 했던 이유였다.
렉서스는 보기 좋게 날뛰며 게일을 손가락질해대고 있었다.
저 미친 짓을 정말로 사람들 앞에서 벌이는군.
레니샤가 기대했던 대로다.
길길이 날뛰던 렉서스와 레니샤의 시선이 부딪혔다.
“……황자의 출생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
렉서스가 이를 갈면서 말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찾아와!”
“폐, 폐하! 절대로 아닙니다! 저를 믿어주세요, 저를 믿어주셔야 합니다!”
“모든 게 밝혀질 때까지 저 여자는 방에 가둔다.”
“폐하!!”
대륙 앞에서 렉서스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못을 찍었다.
정신머리 있는 자들이면 딸을 황후로 보낼 리가 있나.
렉서스가 외세의 힘을 얻을 기회를 박탈한 것이다.
잔인한 장면을 목도한 귀부인들이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꺼져!”
렉서스가 검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분노가 가시질 않아 하는 그를 피해 모두가 달아났다.
그러지 못해서 유감이군.
이미 볼 거 다 보았으니 레니샤도 이만 일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렉서스가 레니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으니 피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한 년.”
악의가 들러붙었다.
“네가 꾸민 짓이지?”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다.”
레니샤가 미소 지었다.
“제가 어찌 이렇게 불경한 짓을.”
렉서스가 레니샤에게 단숨에 달려갔다.
카시우스가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그녀의 뺨을 감아쥔 렉서스가 고개를 숙였다.
뜨겁고 무도한 입술이 레니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밀어냄과 동시에 카시우스를 향해 눈을 돌렸다.
그가 렉서스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보면서 레니샤가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