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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세 번째 막 (94/135)


94화. 세 번째 막
2023.02.21.



 
렉서스를 먹이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를 말이었다. 네릴 왕자의 의도는 무엇인가? 세 뱀 신 축제를 축하하기 위해서 모였다고는 하지만,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얽혀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저렇게 애매한 발언을 한다고?


‘겁이 없네.’

저러다가 렉서스가 아까처럼 칼춤이라도 추면 어쩌려고? 게일을 향했던 칼날이 네릴 왕자를 향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일리안 왕국은 그리 대단한 국력이나 재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네릴 왕자.”

렉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의 불안을 뒤엎는 청량한 웃음이었다.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는군. 아쉽게도 틀렸네. 나는 지금 레니샤에게 열심히 구애하는 중이거든, 공작새처럼. 아까 보았지 않나.”

듣고 있던 자들의 표정이 더욱 불편해졌다. 아까의 난리를 다시금 떠올린 것이다. 먹는 게 어디로 넘어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게다가 카시우스는?

레니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카시우스를 향했다.

콱!

카시우스의 나이프가 거꾸로 테이블에 꽂혔다. 그를 보던 사람들이 못 볼 것 보았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레니샤는 카시우스의 귀여운 재롱에 웃음을 머금었다.


‘귀여운 내 강아지.’

무엇 하나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는 카시우스가 어찌나 기꺼운지. 비틀리고 사람 역하게 구는 렉서스하고는 천지 차이였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며 나이프를 뽑아내는 모습도 귀엽다. 레니샤가 입맛을 다셨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모든 걸 때려치우고 카시우스를 품에 안고 한 달이고 침대에서나 뒹구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레니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도 즐거울 것 같은데.’

레니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에도 모를 카시우스가 우악스럽게 음식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음식을 먹어치울 기세로.

한편.

네릴 왕자는 진심으로 목숨이 두 개쯤 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너무 뛰어난 여자는 옆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건 왜지?”

“외척이 발호하면 방해가 되니까요. 그러니 레니샤 님은 지금 자리가 맞습니다.”

“어떤 자리로 보이길래?”

네릴 왕자가 모두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고는 잔망스럽게 웃었다.


“듣고 흘려 주십시오. 황제 폐하의 정부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무엄하오!”

귀족들이 반발했다.


“레니샤 님은 로테라 공작 부인이시오! 게다가 고귀한 혈통을 타고 나셨지! 네릴 왕자의 것보다 더 귀한 혈통 말이오! 감히 어디서!”

노호를 내지른 노귀족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레니샤가 싫어하는 귀족들도 대부분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다. 레니샤를 욕할 수 있는 건 그들뿐이다. 어디서 외부인이!


“로테라 공작가는 대대로 유서가 깊은 가문이었소! 듣기 참 거북하군.”

다른 이들도 불쾌감을 드러냈다.

사실 로테라 공작가는 하나의 공국으로 존재했었다.

마지막 공왕으로 불리었던 조상이 자치권을 포기하고 황제의 밑에 편승되어 들어갔을 뿐이다. 그럼에도 로테라 공작가는 여전히 사병을 양성할 수 있었고 그 외에도 예외 조항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렉서스는 그 가문을 통째로 힐로샤인의 카시우스에게 넘겨 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영광은 여전히 기억되고 있었다.

감히 왕위계승권도 인정받지 못한 왕자가 능욕할 사람이던가.

히엔트리의 레니샤가!


“워워. 왜들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네릴 왕자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저 꼴을 보아하니 확실하게 렉서스의 줄을 잡으려는 게 보인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그녀를 깎아내려 어떻게 해서든 렉서스의 기분을 맞춰 주려는 모양인데.

한참 잘못 생각한 거지. 아까 도나타 공주가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서도.


“저는 그저 그런 것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저는 이곳에 신붓감을 찾으러 왔거든요. 이렇게 된 김에 폐하를 본받아 똑똑한 친구도 한 명 사귀어야겠습니다. 하하하!”

네릴 왕자가 자신의 농담이 마음에 드는지 소리 높여 웃었다.

홀이 싸늘하게 식는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렉서스가 속 모를 얼굴로 손을 들어 올렸다.


“여봐라.”

“네, 폐하.”

“저 정신 나간 놈을 당장 하옥하라. 그리고 네릴 왕자의 본국에는 왕자가 본국의 대귀족을 모욕하고 폄하하였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라 전해라. 레니샤의 격에 걸맞은 대가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예, 폐하!”

기사들이 달아오른 얼굴로 외쳤다.

싸늘하게 식은 건 렉서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네릴 왕자가 저항하다가 끌려나갔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두 가질 다 챙기려는 거겠지.’

레니샤를 보호하려는 마음도 1푼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네릴 왕자를 핑계로 무언가를 얻어내려는 것이겠지.

사실 저 속을 어떻게 알겠어.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네릴 왕자의 말이 기분 나쁘냐고? 아니. 그렇게 만든 건 렉서스다. 처음부터 이 황성에 들어올 때부터 각오했던 바가 아니던가.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이제는 초연해졌달까.

그도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은 분노가 모든 걸 흡수하고 있던가.

두 번째 희생양을 끝으로 두 번째 막이 내렸다.

***

불쾌해 보이는 카시우스에게 투리엘이 접근했다.

카시우스는 황금알을 낳는, 진흙 묻은 거위나 다름없었다. 카시우스의 명성이나 능력은 인정할 만했지만, 그의 출신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카시우스에게 관심은 있지만 그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귀족들이 태반이었다.

레니샤는 시녀들을 대동한 채로 렉서스 옆에 서 있었다.

대충 핑계는,

‘카나리아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가장 고귀한 여성이 대신 서 줘야겠다.’였다.

렉서스의 말에 누가 반박하겠는가. 눈앞에서 끌려 나간 사람들이 있는데.


“공작 각하.”

투리엘이 생긋 웃었다. 무감한 얼굴이 투리엘을 향했다. 레니샤 앞에서는 총천연색으로 반짝거리는 이 얼굴이 다른 곳에 서면 이렇게 무감해져 버린다. 레니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특별하게 여기는 것 같기는 했다.

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잔뜩 흐트러진 레니샤를 보았을 땐 헛웃음이 나왔다. 이 이야기를 린데이가 듣는다면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타락시켰다고 오열을 할 것이다. 하지만, 투리엘이 보기에는…….


‘반대가 맞지.’

순진한 기사를 농락하는 마성의 여자. 이런 타이틀이 레니샤에게 어울리지, 그 반대가 카시우스에게 어울리겠는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목을 문지르던 카시우스가 잊히질 않는다.


“무슨 일이지?”

카시우스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런 표정으로 서 계시면 모두 두려워할 겁니다. 춤이라도 추시지요.”

“관심 없네.”

카시우스가 차갑게 고개를 돌렸다.


“황제로부터 레니샤 님을 빼내 올 수 있는 기회인데요?”

“뭐?”

“그럴 명분이야 충분하지요. 가서 레니샤 님께 춤을 청하세요. 렉서스의 옆에서 레니샤 님을 끌어내는 겁니다. 그대로 보고 있는 것보다는 움직이는 남자가 더 매력적이지 않겠어요?”

사교 연회의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카시우스에게 투리엘이 돌을 던졌다. 지금 눈치를 보느라 플로어가 뜨문뜨문 비어 있었지만, 카시우스와 레니샤가 나서면 흥도 나지 않겠는가.

오히려 식으려나.

다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렉서스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음 희생양이 되느니 몸을 사리는 것을 택한 것이다.

레니샤를 저 플로어에 세워놓고 투리엘과 덴버스 후작은 할 일이 많았다. 캘리엇 백작이 떠났으니 그의 몫까지 그들이 맡아야 했다. 레니샤를 지지하는 외부 세력과의 결탁을 공고히 해야 했다.

레니샤가 준비한 은밀한 티파티나, 공작 가에서 열리게 될 가장무도회 초대장을 돌리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그들이 쓰고 와야 하는 ‘가면’을 지정한 편지였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커튼 뒤로 초대를 받을 것이고 아니면…….


“곧 있을 가장무도회에서 추실 춤도 연습하셔야죠.”

“가장무도회?”

“본디 세 뱀 신의 축제 기간에 황실에서 한 번, 공작 가에서 한 번 연회를 베풉니다. 이번에는 레니샤 님께서 가장무도회로 정하셨어요.”

“레니샤도 그 자리에 참석하는 건가?”

“물론입니다.”

연회 준비는 투리엘이 떠맡았다. 레니샤가 급작스럽게 황실로 들어가게 되면서 생긴 일이었다.

카시우스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인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레니샤가 전달을 못 한 듯했다. 하긴, 사람 숨 돌릴 틈도 없이 사건이 터져대니 잊을 만도 하지.

투리엘이 카시우스의 등을 떠밀었다.


“사전 연습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공작 각하.”

투리엘의 응원을 받은 카시우스가 성큼성큼, 홀을 가로질렀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던 귀족들의 시선이 카시우스를 향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 앞에 도달했을 때는 이유 없이 숨을 삼킨 이들도 있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손을 내밀었다.


“레니샤. 춤을……. 나와 춤을 추겠습니까?”

레니샤와 눈이 마주친 카시우스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처럼 달아올랐다. 레니샤를 마주하니 아까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 것이다.

내밀한 침실도 아니고……. 그런 곳에서.

카시우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좋아요.”

레니샤가 산뜻하게 말했다. 카시우스의 손을 잡은 레니샤가 단을 내려왔다. 그녀의 뒤를 따라 퉁명스러운 얼굴의 루나와 긴장한 헤일린도 따랐다.

렉서스를 떠나 그들이 플로어로, 그리고 다른 이들은 투리엘에게로 향했다.

레니샤와 카시우스가 한 쌍의 백조처럼 어우러져 플로어로 올랐다. 논란의 중심이 플로어에 자리 잡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네릴 왕자가 투옥되고 죽상이었던 보좌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히엔트리에는 볼거리가 많군.”

“그중에서도 황성이 제일이지요. 렉서스가 황제가 된 이후로 볼거리가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도나타 공주는 완전히 포기했다던가?”

“모를 일이지. 저렇게 코 빼고 있는데. 침실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남아 있을까?”

“내일도 기대가 되는군.”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그들에게 어두운 그림자가 졌다. 덴버스 후작이었다.


“다들 오랜만입니다. 꼬박 일 년 만이던가요?”

“커흠, 그간 황제 폐하께서 본국에 적대적이셨지.”

“한 번도 초대를 안 해 주시더구먼.”

“저분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이가 이 제국에 있어야지요.”

“레니샤 님이 좀 다루는 것 같던데.”

“야수를 길들이는 미녀 같았지.”

“하하. 낭만적인 소리를 하시는군요. 그런데, 저는 그리 낭만적인 사람이 아니라서요. 계속 그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실 거라면 저는 이 자리에 없는 게 맞겠지요.”

“아이, 참. 사람하고는. 그러지 말고 우리랑 술 한잔하면서 어울리는 게 어떠신가.”

일국의 왕자라는 것들이 말하는 본새하곤.

데니스가 속내를 감추고 자리에 앉았다.

이번 무대에서는 그에게도 할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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