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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기습 (96/135)


96화. 기습
2023.02.28.



 
카시우스가 레니샤에게 몸을 좀 더 붙였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로.

카시우스가 느리게 숨을 풀어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좀 더 제게로 잡아당겼다.

레니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이 다치면 나는 어떡하지.”

카시우스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레니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마음이 술렁이는 건지.

고작 질문 하나였는데 왜 이렇게…….


“키스해줘, 카시우스.”

레니샤가 애가 단 음성으로 내뱉었다.


“지금 당장.”

그 오만한 명령에 카시우스가 굴복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흰 목덜미를 쓸어내리곤 가느다란 목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이대로 레니샤를 한입에 집어삼키고 싶었다.

관중들이 지켜보는 지금 이 순간, 저들에게 레니샤가 누구의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호시탐탐 레니샤를 노리는 렉서스나, 메테오, 그 외에 이리떼 같은 이들 모두에게.


“흐.”

레니샤가 달뜬 호흡을 터뜨렸다.


“세상에…….”

누군가가 탄성을 터뜨렸다.

고요에 잠겨 있던 홀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렉서스의 눈치를 보았고, 또 누군가는 설레는 가슴을 붙들었다.

히엔트리에 새로운 로맨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레니샤와 카시우스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악당 렉서스로 인해서 원치 않는 이별을 한 연인.

게다가 레니샤와 카시우스의 신분 차이와 카시우스의 영웅 히스토리는 서사를 만드는 데 더 도움이 되었다.


“흐음.”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레니샤가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었다.

미소에 함의된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봐야겠지만.


“투리엘. 참 재미있지 않나?”

“네……?”

투리엘이 멈칫했다.

마시려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저 표정은 레니샤가 무언가를 꾸밀 때 짓던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싶은 걸 믿으려 하지. 제국민들에게 나는 그들을 지켜주는 울타리나 마찬가지야. 그리고 카시우스는 제국을 수호하는 영웅이지. 나와 카시우스는 그들의 입을 통해 사랑으로 포장되었지.”

“그게…… 뭐가 이상한 겁니까?”

“렉서스가 바란 건 그게 아니었거든. 나를 희대의 요부, 악녀로 만들려고 했었지. 굴욕적이고 더러운 이유를 가져다 붙여서 결국 나를 폐비시키지 않았나. 하지만, 결국 내가 이긴 꼴이야.”

레니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나를 훼손시키고 싶지 않은 거야. 그런 군중심리를 렉서스는 잘못 이용한 거고. 자, 그러면 이런 상황에 우리는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투리엘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레니샤의 뜻을 전부 읽어내는 건 항상 힘든 일이다.


“사실 어제 나와 카시우스가 벌인 일은 지탄받아 마땅했어. 보통은 그렇지. 체통을 지키지 못했으니. 하지만, 렉서스가 나와 카시우스를 찢어놓았고 그게 오히려 호재로 작용한 거야. 소문을 키우게, 투리엘. 나와 카시우스를 애틋한 사랑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연극을 만드는 것도 좋겠지.”

“무엇을…… 생각하시는 겁니까.”

레니샤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먼 곳까지 보고 있었다.


“나는 완전무결하게 황위에 올라야 하네. 그게 아니라면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이라도 되어야 해. 멀쩡히 살아 있는 전남편을 실각시키고 그 자리에 올라야 하니까. 렉서스는 비열한 악당으로, 카시우스는 만민의 영웅으로.”

레니샤가 여러 가지 수를 앞서 두었다.

체스판에서도 미래를 먼저 알고 앞서가는 자들이 이기기 마련이었다.

레니샤가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의 황위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말일세. 카시우스의 신성성을 부각시키게. 연극을 만들 때 있어 제대로 된 포인트를 짚어주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투리엘이 탄복했다.

레니샤는 이 소문을 이용해서 그들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포장하려는 것이다.

악당과 비련의 여주인공, 그리고 영웅이 등장하는 자극하는 러브스토리였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큼 대중적이고 동시에 이해하기 쉬웠다.


“……각하의 신성성을 부각시키는 게 위험하지는 않겠습니까? 각하께서는 이족 출신의…….”

“히엔트리가 이족을 핍박할 수 있었던 건 신전의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네. 신전이 이족들에게 이단의 낙인을 찍었거든. 그런 신전에 붉은 뱀의 힘을 얻은 카시우스가 정말로 이단인지 의문을 제기하게. 신전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낼 수 있게 만들어야 해.”

레니샤는 이족들에게 드리워진 억압의 사슬도 거둬낼 생각이었다.

그들은 레니샤의 기반이 되어야 했다.

이족들은 힐로샤인으로 이주를 끝냈다.


“그 과정은 루나가 도울 거야.”

가만히 숨죽이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루나가 펄쩍 뛰어올랐다.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수장을 따르는 자들이고……!”

“루나. 네 수장이 히샴의 핏줄보다 대단한가? 카시우스는 히샴의 핏줄이야. 그리고 나는 그의 아내이니, 너희들의 왕비나 다름없지.”

“공작은 제대로 된 히샴이 아닙니다!”

루나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반발했다.


“등극도 하지 않은 히샴을……!”

“그렇다면 카시우스가 이족들을 구원할 필요도 없었겠군. 이족들을 보호하기 위해 힐로샤인에 자리를 내어줄 필요도 없었을 테고.”

레니샤와의 말싸움은 왜 이길 수가 없는 건지.

루나가 파르르 떨었다.


“루나, 이 일엔 이족들의 미래도 달려 있어. 지금처럼 도망자의 신분으로 살 건 아니지 않나?”

“……그러다가 내가 죽으면?”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카시우스도 너와 함께할 테니.”

“공작이……?”

“카시우스는 직접 스스로의 신성성을 주장할 테고, 네 역할은 카시우스가 히샴의 핏줄임을 증명하는 거야.”

레니샤가 풀어서 설명을 해주었다.

루나는 이런 정치 공작에는 약한 편이었다.

루나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혼란스러워 보였다.


“신성성을 가진 이를 히샴으로 둔 이족들은 누명을 벗을 뿐만 아니라.”

레니샤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직계들은 나를 통해서 황족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

루나의 눈이 홉 뜨였다.


“잊혔던 군주의 핏줄이 돌아오는 거야. 사실상 이족의 부활이지.”

루나가 침을 삼켰다.


“그게 정말로 가능해?”

“가능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나와 카시우스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이가 로테라 공작이 될 테고 힐로샤인을 다스릴 거야. 그리고 다른 아이는 황제가 되겠지.”

“그, 그럼…….”

레니샤는 루나의 눈동자에 스치는 욕심을 놓치지 않았다.

레니샤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이 일이 잘되면 너는 황제의 호위 기사가 되는 거야.”

“……수장께서 허락하실까?”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루나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투리엘이 마른침을 삼켰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레니샤는 정말 머리가 비상했다.

모든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꾸밀 줄 알았다.

신전을 끌어들임으로써 레니샤는 신뢰를 획득한다.

그리고 이족과 카시우스를 복권시키고 그로부터 신성성을 얻는다.

일이 벌어진 것은 어제와 오늘 사이, 몇 시간 되지 않았는데 레니샤는 이런 일들을 구상해낸 것이다.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는 유연성이 정말 대단했다.


“자, 투리엘. 자네가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알겠지?”

“네, 레니샤 님.”

투리엘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카시우스가 검을 휘둘렀다.

자꾸만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레니샤에게 완전히 홀려버렸다.

그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입맞춤을 하다니!

물론, 물론…… 욕심이 나긴 했었다.

모두에게 레니샤가 누구의 아내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건 당연한 욕심 아닌가? 미친 렉서스가 있는데.

그래도 부끄럽게 그런 일을 저지를 줄이야.

정말로?


“그러다가 검이 부러지시겠습니다, 공작 각하.”

카시우스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예민한 귀를 파고든 목소리는 듣기 좋은 바리톤이었다.

익숙하지만 친숙하지는 않은 자.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 온 모양이다.


“메테오 왕자…….”

“오랜만입니다.”

카시우스가 검을 내렸다.

메테오가 여기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메테오는 정체를 숨기고 히엔트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샴디르 왕국과 레니샤를 잇는 다리로.


“여기는 무슨 일로.”

카시우스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따가운 햇빛에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라.”

메테오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힐로샤인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공작.”

카시우스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검을 내려놓은 카시우스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셔츠를 걸쳤다.

카시우스가 메테오와 나란히 걸었다.


“자세히 설명해보십시오, 왕자.”

“……힐로샤인에 용병들이 숨어들었습니다.”

카시우스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용병들을 고용한 자는 헨리 집사장. 전에 힐로샤인에서 일하던 자입니다. 힐로샤인에서 도망을 친 이후에 용병을 고용한 모양입니다.”

“결론을 말하세요.”

“브릭스턴이 많이 다쳤습니다.”

메테오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생사를 오가는 중입니다. 헤일린 님의 귀환이 가능하겠습니까? 브릭스턴은 오래 버티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를 중심으로 불고 있던 봄바람 같은 훈풍이 멎었다.

레니샤와 동화 속에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시우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오래 버티지 못한다니…….”

“……기적이 일어난다면 모를까……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식물인간 상태로 유도하는 것이지요.”

“가능하답니까?”

“그것도 희박하긴 하지만 시도는 해볼 만하다고 하더군요.”

메테오와 카시우스가 빠르게 말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심각함을 알아차린 자들이 조용히 길을 터주었다.

세상은 녹록지 않았다.

방심하면 꼭 이렇게 기습을 하곤 했다.

카시우스는 이 순간 레니샤를 떠올리고 있었다.

강해 보이지만 여린 사람이었다.

레니샤의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눈물 많은 그 여자가 다시 튀어나오겠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리는 것 같다.

카시우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이렇게 급히 오는 길입니다. 가능하다면 헤일린 님을 힐로샤인으로 모셔가고자 합니다.”

“왕자께서 직접 움직이실 예정입니까?”

“이곳에 들이지는 못했지만 샴디르의 정예 기사들을 동행했습니다.”

“……그렇군요.”

“서두르십시오. 당장 레니샤 님과 닿아야 합니다. 결정은…… 두 분께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아이는 괜찮습니까?”

메테오가 멈칫했다.

그가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겁에 질린 채로 기사들의 품에 안겨 있던 이사벨라는…….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곧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헤일린 님이 필요합니다.”

카시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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