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1화.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101/135)


101화. 떠나는 자와 남겨진 자
2023.03.17.



 
대신관이 이마를 짚었다.

골칫덩이 아이가 그들의 몫이 된 것이다.

제 어미의 불행을 아는지 얼굴이 빨개지도록 악을 쓰고 있었다.


“……저 아기의 아비를 밝혀내라고?”

“네, 대신관님.”

대신관이 침음을 흘렸다.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족의 핏줄에 뭐 대단한 흔적이 남은 것도 아니고.

그의 한마디로 저 아이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었다.

아무 죄도 없는 순수한 영혼이다.

이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할 수 있는 건 저렇게 우는 것뿐이었다.

죄 없는 목숨을 거둘 만큼 그가 대단한 사람이었던가.

대신관의 주름진 얼굴에 시름이 얹어졌다.


“……레니샤 님께서는 어떤 결정을 내리셨나.”

대신관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결국 그가 하는 건 타의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저 아이가 죽더라도 그건 전부 레니샤의 탓으로 미뤄버리면 그만이다.

대신관이 쌀알처럼 가느다란 눈을 들어 올렸다.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혼탁한 잿빛 눈이 번들거렸다.

신관이 고개를 조아렸다.


“레니샤 님께서는 진실을 밝혀달라고만 하셨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대신관이 신관을 손짓해서 불렀다.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어라. 황제 폐하께 보낼 서신이다. 그리고 신전의 공식적인 입장을 알려야겠다.”

“네, 대신관님!”

대신관이 귀를 틀어막았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악을 쓰며 우는 아기의 목소리를 잊기 위해서.


‘내 잘못이 아냐. 태어난 네 잘못이지.’

늙고 추악한 마음뿐이었다.

***

렉서스가 비스듬히 앉아 서신을 확인했다.


“……황자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군.”

렉서스가 들고 있던 서신을 내던졌다.

그것을 주워 든 클라우드 공작이 침통한 신음을 흘렸다.


‘발칙한 계집.’

다른 씨를 두고 황자라고 칭하다니.

그 아이가 황제를 대신할 수 있을 거라고 속살거리던 카나리아의 말간 얼굴을 생각하면 욕지거리만 치민다.

덕분에 황제와의 사이에 깊은 골이 생기지 않았나.

클라우드 공작이 비굴하게 웃었다.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지르다니. 미친 자들이 이렇게나 많습니다.”

“그러게.”

렉서스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손바닥을 응시했다.


“이 손으로 그 멍청한 계집을 황후로 만들었지 뭔가. 종과 주인이 나란히 놀아난 꼴이니 이 어찌나 우습지 않느냐 말이야.”

“……잘못했습니다, 폐하.”

클라우드 공작이 바닥으로 미끄러지듯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클라우드 공작에게 남은 패는 없었다.

로테라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데 일조한 클라우드를 레니샤가 받아줄 리 없었다.

그에게는 렉서스만이 유일했다.


‘젠장, 젠장, 젠장!!’

눈앞에 카나리아만 있다면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클라우드를 이렇게 만든 건 전부 그 여자였다.

마녀 같은 년. 혼자 죽을 것이지 누굴 끌어들이려고!


“잘못된 충정으로 눈이 멀어 폐하를 속상하게 해드렸습니다.”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렉서스를 달랬다.

클라우드 공작이 침을 삼켰다.

렉서스에게도 클라우드 공작밖에 없었다.

레니샤는 점점 세력을 불려가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레니샤가 렉서스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은 알겠다.

렉서스는 그를 보호할 방패가 필요했다.

클라우드는 렉서스가 들 수 있는 최고의 방패였다.


“이 미천한 종을 용서하소서, 폐하. 제가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습니다.”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바닥에 납작 엎어져서 빌고 있는 클라우드를 보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당당하게 그의 앞을 막아서던 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오히려 렉서스의 눈치를 보는 비루한 늙은이만 있었다.


“그러게. 늙으니 판단력도 흐려지는 모양이야.”

클라우드 공작이 침을 삼켰다.


“그 어린 것을 황제로 만들 생각이었나? 허수아비로 세워두고 히엔트리를 집어삼킬 계략이었는지도 모르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추호도 그런 생각은 없었습니다. 제가 바란 것은 히엔트리의 부국강병…….”

“이제 와 입에 발린 말이 무슨 소용이겠나.”

렉서스가 고개를 저었다.


“자네의 충심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이 있네.”

클라우드가 긴장한 얼굴을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카시우스의 목을 가져오게. 염치도 없이 내 아내를 탐하는 건방진 노예 기사의 목을 가지고 싶네.”

렉서스가 달콤하게 웃었다.

클라우드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카시우스…… 라면…….”

“못 하겠는가?”

클라우드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클라우드 공작이 자신 없는 약속을 했다.

카시우스는 레니샤가 싸고돌고 있었다.

본인의 무력도 뛰어나지만 레니샤의 비호도 대단했다.

노예 기사였던 카시우스는 지금 히엔트리의 내로라하는 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레니샤에게 밉보이면…….’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하다.

하지만, 지금은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 대단하다는 카시우스의 위용을 확인하는 수밖에!

***

헤일린이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사벨라는 어린 나이에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이 겪었다.

아이에게는 깊은 트라우마가 남았다.

붉은색만 봐도 자지러지는 것이다.

헤일린이 한숨을 삼켰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조금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달음에 달려와 이사벨라를 품에 안는 그 순간까지.

영원이 일 초처럼 느껴지는 시간들이었다.

혹여나 이사벨라마저 잘못될까 봐 애가 달았다.

헤일린이 이사벨라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하루 종일 우는 아이를 달래 안정제를 먹여 재운 참이다.

아이의 힘겨운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헤일린이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헤일린 님.”

얼굴이 노랗게 뜬 하녀들이 몰려왔다.


“……이사벨라를 지켜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내게 알리도록 하고.”

“네, 헤일린 님!”

하녀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헤일린의 귀환으로 그나마 성이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헤일린이 자리를 떠났다.

주먹을 말아쥔 헤일린의 얼굴은 창백했다.

어두운 복도를 걷는 걸음에는 힘이 있었으나 불안정했다.

헤일린의 뒤를 따르던 수석 하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헤일린 님…….”

“브릭스턴을 봐야겠다.”

“시간이 늦으셨습니다. 제대로 쉬지 못하셨어요. 그러니…….”

“지금 눕는다고 해도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네.”

헤일린이 고개를 저었다.

쓰러질 것 같은 얼굴로 헤일린이 브릭스턴의 침실에 도착했다.

브릭스턴의 침대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하인이 벌떡 일어났다.


“다들 물러가게.”

“네!”

그제야 헤일린과 브릭스턴, 단둘이 남겨졌다.

헤일린이 느리게 브릭스턴에게로 걸어갔다.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침대 근처에 앉았다.

헤일린이 손을 들어 까칠한 브릭스턴의 뺨을 쓰다듬었다.


“브릭스턴…….”

헤일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브릭…… 내 사랑. 내 목소리 들려요?”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목숨을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브릭스턴이다.

여린 숨소리가 헤일린의 심장을 후려쳤다.

항상 단단했던 남자가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

끔찍했다.


“……나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우리를 평생 지켜주겠다고…… 브릭스턴, 내 사랑, 내 남편, 내…… 내…….”

헤일린이 간신히 참고 있었던 눈물이 흘렀다.

처음 로테라에서 그를 만나고, 프러포즈를 받았던 일들이 떠올랐다.

수줍던 청년 기사는 헤일린에게 다 짓눌린 들꽃 한 송이를 내밀었었다.


‘세련된 말은 할 줄 모릅니다. 나는 내 동생하고 달라서…… 그런 쑥스러운 일은 잘하지 못해요. 그래도 절대로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습니다. 평생 행복하게 해줄게요. 그건 약속할 수 있어요.’

투박하던 손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꽃송이를 기억한다.

두꺼운 시집 사이에 곱게 끼워서 말린 꽃은 세월에 삭아버렸지만 추억은 여전했다.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사랑합니다, 헤일린.’

수줍던 그 고백을 어떻게 잊겠는가.

헤일린이 브릭스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일어나요, 브릭스턴…… 당장 일어나. 이건 아니잖아…… 당신, 약속이 다르잖아!!! 일어나란 말이야!!!”

헤일린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그녀의 손에 이불이 이지러졌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헤일린은 브릭스턴을 잃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자신 없었다.

헤일린이 악을 쓰고 울었다.


“제발 일어나!!!! 날 혼자 두지 말란 말이야!!!”

단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슬픔이 목 끝까지 차올라 그녀를 질식시킬 것 같았다.

한참을 오열하던 헤일린이 정신을 차린 건 한참 시간이 지나서였다.


“……나는 당신을 못 보내요, 브릭스턴.”

다 갈라진 목소리로 읊조렸다.


“비참하고 처참한 꼴이라도 나를 떠나선 안 돼.”

열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브릭스턴을 쏘아보았다.

헤일린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러니까 견뎌요. 어떻게든 견뎌서 내게로 돌아와.”

헤일린이 몸을 일으켰다.

침실 밖으로 나오니 안절부절못하던 하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여태 헤일린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었다.


“주치의에게 전하게.”

“…….”

“어떻게 해서든 브릭스턴의 생명을 연장시키라고. 숨이라도 붙여놓으라고 말일세.”

헤일린은 이 결정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끝없는 희망 고문에 몇 번이고 쓰러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일린은 이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헤일린이 꼿꼿하게 고개를 들었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힐로샤인의 지평선을 뜨겁게 물들이는 태양이 말이다.

헤일린이 힐로샤인의 귀족들을 소집했다.


“오늘부터 힐로샤인은 내 명령을 따른다. 이것은 카시우스 공작 각하와 레니샤 공작 부인의 뜻에 따르는 일이며, 그분들께서 항상 내 뜻을 지지하실 거다.”

“네, 헤일린 님!!”

테리언이 가장 먼저 고개를 조아렸다.

가장 죽음과 가까이에서 살던 기사들이 그다음이었다.

전쟁터에만 피바람이 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안일했다.

가장 깊은 내륙에도 피바람은 몰아치고 있었다.


“존명!”

기사들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하게 앞마당을 울렸다.

기가 질린 가신들이 우물거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힐로샤인의 권력 구도가 새롭게 개편되었다.

그 뒤쪽에서 제인이 이사벨라를 끌어안고 서 있었다.

이사벨라가 멍하니 제인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로 눈을 깜빡였다.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

“아가씨…….”

“나는 예전이 좋은데…….”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모님이 보고 싶어.”

“곧 돌아오실 거예요. 금방요.”

“……아버지는?”

“꼭 일어나실 거예요, 아가씨.”

이사벨라가 고개를 돌려 제인의 품에 고개를 묻었다.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이사벨라를 떠나지 못하도록.

이 세상은 아이가 살기엔 너무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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