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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렉서스의 결정 (102/135)


102화. 렉서스의 결정
2023.03.21.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 동안 레니샤가 가장 강렬하게 깨달은 것은,

누군가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잘만 굴러간다는 거다.

힐로샤인의 변고에도 불구하고 레니샤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브릭스턴의 생사가 경각에 달렸더라도 말이다.

세 뱀 신의 축제가 완전히 끝나기 전에 예정되어 있었던 가장무도회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레니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털고 일어서야 했다.

레니샤가 황후궁의 문을 개방했다.

로테라 공작저에 있어야 하는 레니샤가 황성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축제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하니 급한 대로 황후궁의 문을 개방한 것이다.

처음에는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황후궁을 오갔다.

본디 그곳이 레니샤의 자리라는 듯이.

오랜만에 린데이도 황성에 발을 들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레니샤 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린데이가 울먹거렸다.

목소리에 흥건한 물기에 레니샤가 옅게 미소 지었다.


“누가 보면 내가 죽다 살아온 줄 알겠군.”

“저한테는 그런 것이나 다를 바가 없어서요. 제가 이곳에서의 생활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 일 없으셨지요?”

레니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면에서는 린데이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황성은 렉서스 덕분에 바람 앞의 촛불처럼 내내 위태로웠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렉서스의 모든 신경은 카나리아와 황자에게 쏠려 있었다.

클라우드와 렉서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골이 파였다.

그 덕분에 레니샤는 오히려 렉서스의 관심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괜찮네. 요새 황성이 이리 시끄러운데 황제께서 내게 나눠주실 관심이나 있으시겠나. 린데이, 나도 자네가 참 반갑지만 그 전에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네.”

린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린데이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레니샤가 무슨 목적으로 카시우스 사람들을 황성으로 불러들였는지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가장무도회를 개최해야 하네. 이제 축제가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 그 전에…….”

“제가 잘 준비해두었습니다, 레니샤 님.”

린데이가 침착하게 말했다.


“힐로샤인의 변고에도 불구하고 레니샤 님께서는 분명 의무를 다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레니샤가 놀란 얼굴로 린데이를 응시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은 것이다.

린데이가 말을 이었다.


“항상 그런 분이셨잖습니까. 한 번도 의무를 놓으신 적이 없었지요. 저는 그런 레니샤 님을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레니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린데이의 말대로 그녀는 한 번도 의무를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레니샤는 항상 주문처럼 되뇌었다.


‘나는 렉서스와는 달라. 나는 렉서스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것은 레니샤의 지표가 되었다.

레니샤는 렉서스와 다르게 공명정대하고 침착하며, 흔들림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새삼 그것을 깨달았다.


“……고맙네.”

그리고 레니샤가 그럴 수 있었던 데에는 항상 이런 든든한 뒷받침이 있었으리라.


“그러면 초대장을 발송하게. 이것은 덴버스 후작과 의논하면 될 것 같아.”

“네, 레니샤 님. 그런데……. 그 자리에 레니샤 님도 참석하십니까?”

보통 호스트는 모든 연회에 참석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레니샤는 렉서스에게 얽매여 있는 몸이었다.

레니샤가 차갑게 웃었다.


“이 가장무도회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

린데이가 손뼉을 쳤다.

그곳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레니샤는 얼굴을 덮는 가면을 준비했다.


“나를 믿어, 린데이. 정말 가면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으니까.”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투리엘이 미소 지었다.

린데이 이후에도 여러 사람이 황후궁을 오갔다.

로테라의 안주인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레니샤를 찾아온 이는 카시우스였다.

레니샤가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그동안 카시우스는 뱀의 모습으로 황성을 오갔다.

그랬던 카시우스가 당당하게 황후궁의 문을 통과한 것이다.


“레니샤.”

“……이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만나니 또 감회가 새롭네.”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아무도 당신 앞을 막아서지 않던가요?”

“그 누구도.”

카시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를 보고 수군거리기는 했어도 그가 가는 길을 막아선 이는 없었다.


“렉서스가 정말 바쁘긴 한가 보군요.”

레니샤가 날카롭게 웃었다.

이미 렉서스는 카나리아의 아이를 자신의 핏줄로 인정했다.

그사이에 잡음이 있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아이를 렉서스의 아이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말을 뒤집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망종 같은 렉서스라고 하더라도 휘둘리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레니샤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지금 황성의 주인은 렉서스다.

렉서스는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하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타이를 잡아당겼다.

이제는 정장을 입는 것이 퍽 익숙해진 카시우스다.

카시우스가 놀란 얼굴로 비틀거렸다.


“레니샤?”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얼굴을 붙였다.

그 모습에 놀란 사용인들이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레니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새로운 해가 뜬다는 사실에 절망했어요.”

레니샤가 분홍빛 눈동자를 도발적으로 치켜떴다.


“내 세상은 몇 번이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는데 다들 너무 멀쩡하잖아. 지금 힐로샤인은 얼마나 지옥 같겠어.”

레니샤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오늘 종일 멀쩡한 척, 태연하게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런 레니샤의 가면이 모두 벗겨졌다.

레니샤가 입술을 물었다.

카시우스가 그런 레니샤의 입술을 살살 문질렀다.

자연스럽게 레니샤가 제 입술을 놓쳤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숙여 레니샤의 입술에 살짝 키스했다.


“아무 생각도 안 나게 해줘, 카시우스. 나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렉서스가 있는 이 궁에서, 그의 앞에서.”

차분하지만 은은하게 광기가 도는 눈동자였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이런 요구를 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레니샤에게 합법적으로 갈 수 있다는 소식에 달려왔다.

좀 더 오랜 시간, 다른 이들의 시선을 덜어내고 레니샤와 함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순수했던 의도가 불순하게 물드는 건 금방이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입술에 제 입술을 묻었다.

레니샤가 구름처럼 흰 팔로 카시우스를 끌어안았다.

저 침실 문을 열고 렉서스가 달려왔으면 좋겠다.

레니샤에게 집착하는 그의 앞에서 마음껏 뒹굴어주리라.

레니샤는 렉서스에게 상처 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가 가장 못나고 비참한 꼴로 무너졌으면 좋겠다.

레니샤가 그랬듯이!

카시우스는 정력적으로 레니샤에게 응해주었다.

그녀의 슬픔이 조금이나마 달래지길 바라며.

이 작은 몸에 고여 있는 슬픔은 너무나 거대해서 차마 그 깊이를 넘겨짚을 수도 없었다.

그저 뜻대로 어울려주는 수밖엔.

***

렉서스가 이마를 문질렀다.

그 어린 것을 목 졸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렉서스의 꼴은 꽤 우습게 되었다.

아직 아이의 출생에 대해서는 밝히지 못하도록 신전 늙은이의 입을 틀어막아 두었다.

오랜만에 손에서 술과 약을 놓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필요했다.

미친놈이 이성이 갖추면 더 두렵다는 말이 있듯이 황제가 머무는 본궁은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다.


‘클라우드는 한동안 살찐 쥐처럼 납작 엎드려 있을 거야. 문제는…….’

렉서스가 이를 악물었다.

너무 많은 이들이 그 우스운 꼴을 목격했다는 데 있었다.

세 뱀 신의 축제는 제 목적을 잃었다.

사교계의 정정한 인사들은 죄다 모여서 렉서스와 황자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렉서스가 아무리 상식과 동떨어진 일을 일삼았어도 자신의 황위에 흠집 낸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렉서스를 두려워했던 적은 있어도 손가락질하며 비웃진 못했다.

레니샤와 로테라를 제외하고는.

렉서스가 이를 까득 물었다.


“빌어먹을 계집.”

물론, 카나리아도 렉서스의 분노를 피해 갈 순 없었다.

렉서스가 한숨을 깊게 내쉬고는 시종장을 손짓해서 불렀다.

세 뱀 신 축제가 끝나기 전에 신전이 공식적인 발표를 해야 한다.

그리고 렉서스 또한 카나리아와 이름 없는 황자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시종장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달려들어 왔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지금 당장 대신관을 들게 하게. 그리고 카나리아를 감옥에서 풀어주고……. 그 어린 것을 데리고 내게로 돌아오게. 내일 황실의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할 것이야.”

렉서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시종장이 귀를 쫑긋 세웠다.


“황자에게 데이마스라는 이름을 내리겠네. 황자는 데이마스 황자로서 차기 후계자가 될 것이네.”

시종장이 고개를 치켜올렸다. 잠시 두려움도 잊은 채로.


“폐, 폐하……!”

렉서스는 이번 일을 덮을 생각이었다.

물론, 이게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로 렉서스의 기반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후계자 책봉은 렉서스의 기반을 단단하게 해줄 것이다.

이왕 우습게 된 거 더 우스워지지, 뭐.


“황태자 책봉을 서두르겠네. 다만, 카나리아의 의무를 최소화하고 비공식적으로 유폐를 이어가도록 하게. 사람들에게는 카나리아가 충격으로 쓰러져 건강이 좋지 않다고 퍼뜨리고.”

렉서스가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데이마스 황자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자는 이유 불문. 사형에 처하게.”

시종장이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폐하…….”

렉서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미래를 더듬듯 가늘어졌다.

새로운 아이가 태어나면 황태자를 폐위시키면 된다.

그때 가서 지금의 의혹을 문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

데이마스 황자는 그저 시한부다.

렉서스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렉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레니샤는 어디에 있지?”

“그야…….”

“아. 공작가의 축제를 주관하고 있겠군.”

렉서스가 저물어가는 석양을 보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지금은 누굴 만나고 있지?”

“카시우스 공작께서 들어 계십니다.”

“그 노예 놈이 또 내 황성에 발을 들였군.”

렉서스가 제자리를 서성였다.

클라우드 공작을 기다릴 필요 없이 그의 손으로 카시우스의 목을 베고 싶었다.

그 미천한 놈이 레니샤를 차지했다는 생각을 하면 배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분노에 분노가 더해진다.

렉서스가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지금 당장 내 검을 가져오게.”

시종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또다시 황성에 피바람이 불겠구나.


“……예!”

렉서스가 웅크리고 있던 궁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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