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운명의 부딪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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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운명의 부딪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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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운명의 부딪힘
2023.03.24.
렉서스가 느릿하게 걸었다.
그의 뒤를 쫓는 시종들은 마음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어디를 가든 렉서스는 반드시 피를 볼 것이다.
렉서스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게다가 황후궁에는 카시우스가 들어와 있다고 하니 분명…….
시종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지 갈피가 서질 않는다.
렉서스를 쫓아가면서도 발을 동동 구르던 시종들이 멈춰 선 곳은 카나리아의 궁이었다.
황후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누구보다 비천한 신세가 된 여자.
아름답고 화려한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여자의 삶은 편안하지 않으리라.
‘그나마 다행이로군.’
시종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피 마르는 눈치 게임이 얼른 끝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카나리아가 감옥에서 업혀 나오던 와중이었나 보다.
카나리아를 업어오던 하녀와 렉서스가 마주쳤다.
“화, 황제 폐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대로 들어가.”
하녀가 렉서스가 들고 있는 검을 눈짓했다.
새파란 날이 그녀를 향해 번뜩이는 것 같았다.
가위, 바위, 보를 잘못해서 지금 이 꼴을 당한 스스로를 욕하며 하녀가 발을 재게 놀렸다.
금방이라도 렉서스가 검을 휘두를 것 같은 두려움에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그나마 다행히 카나리아를 침대에 눕힐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렉서스는 그저 테이블에 앉아 그녀가 하는 짓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깨워.”
“네?”
하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황후를 깨우라고 명했다.”
“네, 폐하!”
하녀가 덜덜 떨면서 카나리아를 흔들었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간신히 삼키기는 했지만, 제발이라는 애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카나리아가 느리게 눈꺼풀을 올렸다.
시야가 흐릿한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하녀가 다시 한번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뒤로 물러섰다.
여전히 두려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황제의 손에 걸쳐져 있는 검이 시야에 걸렸다.
“카나리아. 내 어여쁜 새. 얼른 고개를 들어 나를 보거라.”
렉서스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카나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기력을 잃은 몸이 휘청거렸다.
벽에 간신히 기대앉은 카나리아가 렉서스를 응시했다.
“폐하…….”
“그래, 그곳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지?”
카나리아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하 감옥은 그녀가 지냈던 어떤 곳보다 처참했다.
바닥에는 바퀴벌레 같은 것들이 기어 다녔고 잠이 들 만하면 쥐가 그녀의 살을 뜯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했다.
햇빛은 당연히 들지 않았고 눅눅한 곰팡이와 죽음의 냄새가 났다.
그런 곳에서의 며칠은 카나리아의 정신을 갉아먹었다.
모든 게 후회였다.
카나리아가 벌벌 떨었다.
“잘못했어요, 폐하. 저, 저를 보내지 마세요. 저 거기 싫어요. 너무 무서워요.”
카나리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힘이 없는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떨렸다. 눈물이 어디서 솟아난 건지 자꾸만 흘렀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흐엉엉!”
카나리아가 어린애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렉서스가 고개를 기울인 채로 카나리아를 응시했다.
새처럼 떨고 있는 카나리아가 만족스럽다.
카나리아는 두려움을 알고 수그러들 줄 안다.
끝까지 버티는 레니샤와는 다르게.
“이렇게 굽힐 줄 알면 좀 좋아.”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결국 렉서스를 꺾겠다고 아등바등하고 있는 걸 보면 우습기도 하고 짜증이 나기도 하고.
카시우스를 잃게 되면 레니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그 많은 사람을 잃고서도 고개를 꺾지 않는 레니샤가 말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던 렉서스가 카나리아를 다정하게 불렀다.
“카나리아.”
“네, 폐하.”
“네가 반성한다는 건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그 많은 이들 앞에서 내 꼴을 우습게 만들었으니 목숨으로 반성해야지.”
렉서스가 검 끝으로 카나리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폐, 폐하…….”
뾰족한 끝에 찔린 살이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렉서스가 비죽이 웃었다.
“너는 여기에서 죽은 듯이 사는 거다. 네 아들을 끌어안고서.”
“네, 네…….”
“내가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 하면 사는 거야. 알겠느냐?”
“네, 네!”
렉서스가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바닥에 내던졌다.
침대 위로 올라간 렉서스가 카나리아의 해진 드레스를 움켜쥐었다.
렉서스가 혀를 차고는 하녀에게 명했다.
“이것을 씻겨서 데리고 오라.”
“네, 폐하!!”
하녀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하녀에게 의지해 욕실로 향하면서 카나리아는 쉴 새 없이 울었다.
살아남았음에 감사하며.
***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품에서 나른하게 웃었다.
이렇게 쉬운 거였나.
렉서스가 그 많은 여자을 끌어들여 침대 위에서 뒹굴 때 레니샤는 고고한 척 굴었다.
대체 왜 그랬나. 흘러간 청춘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무슨 생각을 합니까?”
카시우스가 이불을 당겨 레니샤를 꼼꼼히 감쌌다.
레니샤가 이불 속에서 키득키득 웃었다.
“당신을 좀 더 빨리 만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그러면 황성에서 그렇게 무료하진 않았을 것 같아서.”
카시우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나를 정부로 만들겠다는…….”
“그러면 안 돼요?”
짓궂은 레니샤 덕분에 항상 놀림당하는 건 카시우스의 몫이다.
카시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는 바라시는 대로 하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까. 멋대로 하세요.”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카시우스의 턱 끝에 키스했다.
레니샤가 편안한 표정으로 카시우스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제 평화는 끝났다.
레니샤는 렉서스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안타깝게도 렉서스는 바보가 아니다.
이번 일을 레니샤가 꾸몄다는 건 금세 유추해냈을 것이다.
‘이제 다음은 어떻게 할 거지?’
렉서스는 고무처럼 이리저리 튀어대는 인물이라 예상을 벗어나는 반응을 할 수도 있었다.
내일부터는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이 평화에 잠식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레니샤가 서러운 한숨을 터뜨렸다.
세 뱀 신 축제의 마지막 장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
이른 아침.
황자가 렉서스의 핏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신전에서 공식적인 발표를 한 것이다.
로테라 저택에서 가장무도회 초대장이 발부되었고 사람들은 눈치 게임을 시작했다.
로테라 공작과 렉서스는 아주 애매한 관계였다.
로테라의 파티에 참석하자니 렉서스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참석하지 않으려니 레니샤가 마음에 걸렸다.
덴버스 후작은 부지런히 자신이 맡은 임무를 수행했다.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새로운 씨앗을 심어준 것이다.
사람들은 다음 대 황제가 반드시 히엔트리여야만 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씨앗이 어둠 속에서 싹을 틔운 것이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발아는 로테라의 파티에서 이루어질 전망이었다.
결국, 레니샤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귀족들은 참석을 결정했다.
놀라운 점은 클라우드 공작이 얼굴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뒤늦게라도 줄을 다시 서려는 걸까요?”
“모르지요. 하지만, 한참 늦지 않았습니까. 로테라도 많은 것을 잃었어요. 레니샤 님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논란의 중심에 선 클라우드 공작은 오히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 자리에는 탐색을 위해서 참석했다.
렉서스는 클라우드를 용서하는 대가로 카시우스의 목을 요구했다.
적을 알아야 어떤 무기를 사용할지 알 수 있는 것 아니겠나.
“오랜만이오, 로테라 공작. 아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인가?”
클라우드 공작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을 건넸다.
카시우스가 고개를 돌려 클라우드를 응시했다.
족제비처럼 생긴 인상이었다.
말린 콧수염이나 비열하게 치켜 올라간 눈매와 입매.
그런 것들이 클라우드 공작을 이루고 있었다.
“처음인 것 같소만.”
카시우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패배한 개처럼 무릎이라도 꿇으려고?”
카시우스가 날카롭게 말했다.
레니샤를 괴롭히는 것들은 전부 카시우스의 적이다.
개중에서 클라우드 공작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하, 젊은 친구가 패기가 넘치는군.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설마 내가 무슨 짓을 하겠소?”
클라우드 공작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 어투는 마치 클라우드가 바란다면 카시우스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클라우드와 카시우스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공작이야말로 패기가 넘치는군. 그 몸으로 내게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카시우스가 날카로운 기세를 드러냈다.
붉은 뱀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클라우드를 넘보았다.
“이게 영웅의 기세로구만. 바로 이 힘으로 쵸르파에서 대승을 거둔 거겠지? 하지만, 공작. 제도에서는 그런 건 힘이 되지 못해. 잘못 날뛰다가는 목이 날아가길 마련이지.”
클라우드 공작이 기세 좋게 웃었다.
하지만, 속은 번민으로 시끄러웠다.
아무리 가늠해 보아도 카시우스의 목을 꺾는 건 어려워 보인다.
붉은 뱀의 기운을 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카시우스 자체도 강건했다.
충만한 젊음과 전쟁터에서 단련된 육체가 위협적이었다.
카시우스를 죽이기 위해서는 웬만한 수로는 안 된다.
‘……고립되어 있을 때를 노려야 해. 한 놈? 다섯 놈? 아니. 모자라. 확실하려면 최소한 열댓 놈은 되어야겠어.’
카시우스의 목 하나를 따자고 그 많은 인원을 안배하는 게 속 쓰리긴 했지만 별수 없었다.
그의 잘못된 선택으로 렉서스의 신뢰를 잃었으니.
“공작. 내 이야기를 명심하게.”
클라우드가 스산히 웃고는 물러섰다.
카시우스와 한 마디라도 나누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던 자들이 몰려들었다.
가장무도회라고는 하나 카시우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불편한 숨을 삼켰다.
차라리 악의를 드러내는 클라우드를 상대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를 피해 카시우스가 도망쳤다.
발코니에 숨어 있던 카시우스의 눈에 찬란한 빛이 띠였다.
‘레니샤!’
100미터 밖에서도 레니샤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가 정체를 감추고 있다고 해도.
카시우스가 밝아진 얼굴로 난간에 몸을 기댔다.
레니샤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카시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카시우스가 손을 흔들었다. 레니샤의 입술이 휘어지는 게 보인다.
이 연회의 진정한 주인공이 도착했다.
모두들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덴버스 후작이 시사한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레니샤는 황제가 되었다.
새로운 황제!
레니샤의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위압감이 연회장을 압도했다.
이미 그녀는 황제가 된 것처럼 보였다.
로테라에 닥친 수많은 비극은 레니샤를 조금도 흔들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철혈의 황제.
모두가 바라는 강인한 황제가 그곳에 있었다.
모두가 넋을 놓은 채로 레니샤를 응시했다.
“다들 내게 너무 시선을 주는군. 나는 지금 황성에 갇힌 신세 아니던가.”
레니샤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 없는 거야. 알겠나?”
귀족들이 일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면서 클라우드 공작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개 귀부인이 저게 가능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