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폭풍의 눈
(104/135)
104화. 폭풍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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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폭풍의 눈
2023.03.28.
클라우드 공작이 로테라의 연회에 참석해 있는 동안 렉서스는 보좌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새 후궁이라고 하셨습니까?”
렉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는 황태자가 될 거다. 하지만, 오물이 묻었으니 새로운 것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보좌관이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긴 시간 동안 어떤 여자도 임신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카나리아만이 임신에 성공했는데 그 또한 다른 씨였다.
이쯤 되면 렉서스가 임신 불능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인정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지.
“예, 폐하. 분부하신 바를 이행하겠습니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달라는 것만 아니면 무엇이든 못하겠는가.
“……지금 로테라 저택에서 파티가 있다지?”
“예, 폐하.”
“새 후궁 후보는 그곳에서 고르는 게 좋겠군.”
렉서스가 서늘하게 웃었다.
“레니샤와 친분이 깊은 이들을 들이는 거야. 아, 투리엘부터 시작하는 게 어떠한가?”
보좌관이 침을 삼켰다.
“아, 아쉽게도 마담 투리엘은 미망인인지라 아이를 갖기 전에는 후궁에 들지 못합니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그건 막고 싶었다.
마담 투리엘은 황제에게 독극물을 먹이고 스스로도 자결할 인물이다.
그만큼 레니샤를 향한 충성심이 깊은 자였다.
보좌관의 말에 흥미를 잃은 렉서스가 오만한 자세로 앉았다.
“그러면 자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봐.”
결국, 렉서스가 바라는 건 레니샤를 따르는 자들을 포섭하라는 것이다.
보좌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황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렉서스가 누군가를 향해 검을 겨눴을 때 실패한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도.
두려움이 일었다.
***
렉서스가 레니샤를 향해 검을 들 그 무렵, 레니샤는 꽤 즐거운 무도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곳의 매력은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 아니던가.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잡았다.
어제 아침이 되어서야 황후궁을 떠났던 카시우스지만 몇 년 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다.
그 차갑고 외로운 황성에 있다 보면 카시우스의 온기가 그리워지는 게 사실이었다.
황성보다 카시우스가 있는 곳이 그녀의 안식처로 느껴진다.
레니샤가 오랜만에 꽃처럼 예쁜 미소를 내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등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이제는 카시우스도 이런 사교댄스에 익숙해졌다.
모든 건 변해가고 있었다.
카시우스가 황성에 들어오면 그는 어떤 모습을 하게 될까? 새삼 궁금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에 고개를 잠깐 기댔다가 떼어냈다.
“당신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레니샤의 속삭임에 카시우스의 볼이 빨개졌다.
여전히 잘 빨개지고.
“지난밤이 아직도 잊히질 않는걸요.”
여전히 부끄러워한다.
황후의 침실을 무엄하게도 넘어온 붉은 뱀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카시우스가 보여주는 모든 모습이 사랑스럽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허리를 은근하게 문질렀다.
카시우스가 나른한 숨을 내쉬었다.
“레니샤…….”
레니샤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카시우스의 품을 벗어나 요정처럼 허공으로 날아오른 레니샤가 다시 땅 위로 착지했다.
그 모든 것들이 카시우스의 시야에 선명하게 박혔다.
손에 쥐었다 싶으면 저 멀리 날아가 버리는 나비처럼 아련했다.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손을 쥐었다.
“이제 렉서스가 반격해 들어올 거예요.”
“반격?”
“내가 렉서스를 공격했잖아요. 신전은 황자를 렉서스의 아이라고 발표했지만, 심어진 의심은 뿌리가 뽑히지 않을 거예요. 렉서스는 다른 수를 찾겠죠.”
“전쟁터나 다름없군요.”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시우스가 있던 곳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덜 하지는 않을걸요?”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잡은 채로 한 바퀴 돌았다.
반짝이는 별 가루가 뿌려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카시우스, 절대로 지지 말아요.”
“…….”
“렉서스는 나를 꺾기 위해 당신부터 꺾으려 들 거야. 반드시 살아남아서 내게로 와요. 내가 준 검을 가지고.”
카시우스가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니샤가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레니샤가 황성에 들어간 것과 별개로 카시우스를 향한 애정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레니샤의 사람들이 카시우스를 계속해서 주시할 수 있도록.
그리고 레니샤는 이 자리에 모습을 비침으로써 덴버스 후작의 메시지에 동조하고 있음을 인증했다.
이제 또다시 제도는 어떤 흐름으로 움직이게 될 것인가.
***
힐로샤인에도 변화는 찾아왔다.
브릭스턴의 일로 세력이 꺾이나 싶었는데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돌아온 헤일린이 공격적인 정책을 펼친 탓이다.
세력을 줄이고 움츠리는 대신에 더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일거리를 나눠주었다.
힐로샤인으로 가면 먹고 살 길이 열린다는 소문이 제도를 휩쓸었다.
헤일린은 완벽하게 제 남편과 레니샤의 뜻을 이어받았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숨어 있던 자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족들의 수장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그렇습니다, 헤일린 님.”
테리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기사보다는 문관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테리언이다.
테리언이 코끝에 걸친 안경을 밀어 올렸다.
힐로샤인이 발전하는 만큼 테리언도 다듬어져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군.”
헤일린이 하던 일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족들의 수장은 성의 응접실에서 헤일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장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헤일린은 희뿌옇게 번진 여자의 눈동자를 발견했다.
두 눈을 가로지른 자상은 당시의 참혹함을 드러내듯 굵고 붉었다.
“……아닙니다.”
헤일린이 놀라움을 감추기 위해 숨을 삼켰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나부터가 진실을 내보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수장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주름진 손이 흉터 위를 더듬었다.
“아닙니다. 그저……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처음 본 이들은 누구나 놀라니까요.”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고였다.
그것을 깨뜨린 것은 수장이었다.
“헤일린 님.”
“네.”
“과거 이족들의 후계자 핏줄이 어떻게 멸족했는지 아십니까.”
히엔트리 역사의 일부분이니 헤일린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고위 귀족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교양으로 역사를 공부하게 되어 있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덕분에 이렇게 되었으니 그럴 만했다고 해야 하나.”
수장이 선선히 웃었다.
과거의 미움은 다 털어버린 홀가분함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오늘 제가 이렇게 찾아온 건…… 밝힐 이야기가 있어서입니다.”
“그 무슨…….”
“과거 후계자 일족은 전부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혹여 카시우스 공작에 대해서 말하려는 거라면…….”
헤일린이 목소리를 낮췄다.
카시우스의 측근들만 알고 있는 그 공공연한 비밀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이족들의 굴레가 벗겨지지 않는 한 그 비밀은 영원해야 했다.
“아닙니다. 그분이랑은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헤일린 님.”
수장의 이야기?
헤일린이 눈을 홉떴다.
“저는 과거 히샴의 아내로서 후계자를 낳은 일이 있지요.”
그 말의 뜻을 알아들은 헤일린이 숨을 들이켰다.
“제 남편은 그렇게 죽어 별이 되었고 아들은 사라졌습니다.”
헤일린이 이를 악문 채로 비명을 참았다.
그러고 보니 수장의 얼굴 곳곳에서 그녀가 아는 얼굴이 묻어나는 듯했다.
날카롭게 각진 턱선이나 눈매, 그리고 얼굴형 같은 것들이.
“제가 지금 이 사실을 밝히는 것은 한 가지 요청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여자가 고개를 조아렸다.
“저는 짧지만 미래를 볼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영속적이지 않고 아주 가끔이기는 하지만요. 저는 두 갈래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헤일린이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한 갈래의 미래에서는 이족들은 모두 죽어 땅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힐로샤인과 로테라의 패배와 연관되어 있지요. 이는 우리 이족이 힐로샤인과 운명을 함께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처음부터 각오하고 온 것이니 그것이 두렵지는 않습니다.”
여자가 헛헛하게 웃었다.
“그리고 또 한 갈래의 미래에서 저는 꽃을 틔운 나무를 보았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가지에 분홍색 꽃이 피었지요.”
레니샤다.
“그 미래 속에선 이족들은 편안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과거의 악연은 모두 잊고. 저는 그것을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
“이족의 전사들을 편히 쓰십시오.”
“그게 무슨…….”
“현재 이족의 전사들은 애매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힐로샤인과 로테라는 충분한 병력을 갖추지 못했음을 압니다. 제가 우리 전사들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들을 수족처럼 쓰십시오. 앞으로 있을 전쟁에 주역으로 써주십시오.”
여자가 희뿌연 눈을 빛냈다.
“새로운 황가의 빛나는 검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작위도 이름도 없는 일개 여자일 뿐입니다. 저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이날을 위해서 이족의 전사들을 단련시켜 왔습니다. 그들을 믿고 중한 일을 맡기십시오.”
“황성으로 보내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가장 최전방에서 황제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족의 기쁨이 될 일입니다.”
헤일린은 그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렉서스를 베는 것은 이족들의 염원과도 같았다.
과거를 잊었다고 말은 하고 있지만 기쁜 마음으로 레니샤에게 힘이 되겠다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히엔트리 황가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자를 세운다!
그만큼 확실한 복수는 없었다.
헤일린은 여자가 왜 이족의 전사들을 믿어도 된다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 또한 같은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검이 되어 적을 베겠습니다.”
수장의 미소가 깊어졌다. 카시우스가 꼭 닮은 미소였다.
***
렉서스가 게일을 대신해서 캘리엇 백작의 자리에 앉힌 자를 불러들였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캘리엇 백작의 자리에만 3명의 사람이 스쳐 갔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 덕에 쥐새끼처럼 몸을 사리고 있던 새로운 캘리엇 백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기사들의 수가 몇이냐.”
렉서스가 나른하게 물었다.
그의 손에는 익숙한 술잔 대신에 찻잔이 들려 있었다.
몸에 쌓인 독을 해독하는 약차였다.
렉서스의 손이 지독한 금단현상으로 덜덜 떨렸다.
하지만, 렉서스는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태연한 낯빛이었다.
“전쟁을 피하는 건 황제의 자세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