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전쟁 (2)
(111/135)
111화. 전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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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화. 전쟁 (2)
2023.04.21.
루나가 숨을 몰아쉬었다.
퀴퀴한 지하도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악취 때문에 죽겠는데. 지금 우리 여기에 며칠 있었던 거 아니야?”
“죽는소리하지 마.”
레니샤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지하도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게다가 황제의 침실로 가는 길은 좀 더 복잡했다.
애초에 설계 자체를 겹겹이 층으로 쌓아서 해두었다.
깊숙한 아래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와야 하는 구조였다.
레니샤가 저리는 다리를 주물렀다.
얼굴은 창백하지만 표정만큼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태연했다.
레니샤가 차가운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게 쉬웠으면 다 황제를 죽였게?”
레니샤가 피식 웃었다.
물병에 든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레니샤가 길을 찾아 움직였다.
“처음 가는 길에 이 정도면 잘하고 있는 거야.”
루나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러다가 힘 빠져서 황제를 죽이기는커녕 도착도 하기 전에 죽겠네.”
루나가 레니샤를 부축했다.
레니샤가 루나를 돌아보았다.
“얼른 가자고.”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루나를 이곳에 남긴 건 역시, 잘한 선택이었다.
투리엘은 떠나는 순간까지 루나를 걱정했었다.
루나는 레니샤를 싫어하는 것보다 황제를 더 싫어한다.
두 사람의 목적이 맞아떨어졌기에 루나가 레니샤를 배신할 일은 없을 터다.
게다가 의외로…… 루나는 순수한 편이었다.
타인을 배신하는 것보다는 그저 참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
“여기서 나가면 네게 큰 상을 내리지.”
“무슨 상?”
루나가 호기심을 보였다.
사실 이쯤 되면 레니샤가 얄밉고 싫은 것도 덤덤해지기 마련이었다.
어쩌겠는가. 카시우스가 레니샤라는데.
그 가운데 끼어서 자존심 상하는 건 더 싫었다.
게다가 레니샤는 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냉혈한 같다가도 어쩔 때 보면 막내 여동생 같기도 하고.
게다가 의외로 따뜻한 구석도 있었다. 미워할 수 없는 적이랄까.
신기하게 사람의 흥미를 유발하는 법도 잘 알고 있었다.
루나가 레니샤에게 재차 물었다.
“뭘 주겠다는 건데?”
레니샤가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내 보좌관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뭐?”
루나가 발을 멈췄다.
“그게 어떻게 상이야!! 완전 벌이지!!”
“남들은 가지고 싶어서 안달인 자린데?”
“그게 나는 아니잖아!”
레니샤의 눈동자가 웃음기로 반짝거렸다.
“놀린 거구나.”
“일부는 진심이야. 바라는 게 있다면 이루어주지. 그게 황위만 아니라면.”
루나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부축하고 있던 레니샤의 옆구리를 살짝 꼬집고는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바라는 건 별것 없어.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으면 좋겠어.”
“평범?”
“정말로 평범하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고, 어디서든 내 이름을 밝힐 수 있고, 시장에 가기 위해서 3시간 이상 산을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삶. 나는 그거면 돼.”
루나가 앞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레니샤에게 이런 말을 하려 하니 귀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루나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 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과거의 잘못은 깨끗하게 청산해야지. 날 믿어, 루나. 나는 렉서스하고는 다른 황제가 될 거야.”
“저 자리에 올라가면 다 변한다던데.”
“그땐 네가 나를 죽여도 돼.”
“뭐?”
루나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레니샤는 진심인 듯 덤덤한 얼굴이었다.
땀이 비 오듯이 흐르는 와중에도 레니샤의 흰 얼굴은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심이야, 루나. 내가 렉서스처럼 변할 것 같거든 나를 죽여.”
희고 가는 목이 루나의 눈에 들어왔다.
루나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에서 레니샤를 죽이고 달아난다고 해도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레니샤의 말에 의하면 이 지하도는 황성 건축 시에 지어진 것이라 아는 이들이 적다고 했었다.
그때의 건축 설계도가 남아 있을 리 없으니 구전으로만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은 안 돼, 루나.”
“누, 누가 뭐래?”
루나가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홱 하고 돌렸다.
귀신같기는.
레니샤는 종종 루나의 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속내를 고스란히 들킨 것 같아 루나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퀴퀴한 지하도의 냄새도 잊히는 것 같은 창피함이었다.
“내가 죽으면 우리는 무너져.”
“…….”
“늑대 사냥을 할 때, 왜 우두머리부터 잡는지 알아?”
“우두머리가 죽으면 나머지는 오합지졸이 되기 때문에……?”
“그래, 맞아. 인간도 마찬가지야. 내가 죽으면 우리는 오합지졸이 되는 거야. 다들 내 자리를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겠지. 분수도 모르고. 나라도 똑같아. 그래서 후계자가 필요한 거야. 렉서스가 죽으면 그의 나라는 무너지고 말아. 그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없거든.”
“그래서 황자를…….”
“렉서스는 제 씨도 아닌 아이를 후계자로 인정했지. 그리고 나는 그 아이를 빼돌렸고. 그 작은 아이가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거야.”
루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다.
역시 황실은 루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오늘을 기억할 거야, 루나.”
레니샤의 분홍빛 눈동자에 봄날의 돌풍 같은 사나움이 가득 찼다.
레니샤는 그녀 자체로도 이 지하도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루나가 괜한 환상에 눈을 깜빡였다.
이래서 사람들이 레니샤에게 홀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루나는 깨달았다.
레니샤이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아. 지금의 고통과 치욕, 불편함, 증오. 이 모든 걸 기억하는 황제가 될 거야.”
왠지 가슴이 뛰었다.
레니샤는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거라는 알 수 없는 믿음이 생겼다.
레니샤라면. 지금의 레니샤라면. 렉서스와는 다른…….
다시 한번 히엔트리의 꽃을 화려하게 피울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가 고개를 들었다.
“루나. 네가 나를 도운 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안 그래도 신전에 이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흘려 두었다.
이족들을 이단으로 규정 지은 일에 대해서 신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이 잊을 만하면 투리엘을 보내 신전을 들쑤셔 두었다.
지금은 안일하게 저렇게 있을지 몰라도 레니샤가 황제가 되고 나면 신전도 그녀의 뜻을 무시하진 못하리라.
이족들을 비롯해서 히엔트리 황실에 탄압당해온 소수 민족들이 가장 먼저 해방되리라.
그리고 노예들도.
본디 폐지되었던 노예 제도가 다시 부활한 것은 200년 전의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노예제를 하나, 둘 폐지하고 있는 와중에 히엔트리만 시대를 역행한 것이다.
레니샤는 그 모든 것을 바로잡을 생각이었다.
그 누구도 노예제의 희생양이 되지 못하도록.
그 시작은 카시우스였다.
노예 검투사 출신의 카시우스가 영웅이 되고, 황제의 반려가 되는 일대기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레니샤가 꿈꾸는 새로운 천년 제국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레니샤가 이를 악물고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빛이 눈앞에 있었다.
***
렉서스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클라우드 공작.”
“폐, 폐하.”
새까만 그을음을 뒤집어쓴 클라우드 공작이 렉서스 앞에 부복했다.
“카시우스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했더니 빈손으로 돌아왔군. 오히려 내 기사들을 전부 잃고서 말이야.”
“폐하, 한 번만…… 한 번만 제게 더 기회를 주소서!! 그놈은 괴물이었습니다! 제, 제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그 괴물 같은 놈이 폐하의 기사들을 도륙하였고…….”
“공작은 도망쳐 내 앞에 있군.”
렉서스가 웃음을 흘렸다.
“좋아. 기사들을 내어주지. 다만, 클라우드 공작. 이번에도 실패한다면 돌아오지 마라.”
“폐하……!”
“카시우스의 목 대신에 네 목을 받겠다.”
클라우드 공작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반역자를 내 앞에 끌고 오지 못하는 검이라면 쓸모가 없지 않나. 전에는 자네가 나를 버렸듯, 이번에는 내가 자네를 버리겠네.”
“아닙니다, 폐하! 자신 있습니다! 괴물도 피를 흘리고, 죽습니다! 제가 반드시 카시우스의 목을 가져와 충심을 증명하겠습니다!”
클라우드 공작이 제가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소리쳤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 괴물 소굴에서 도망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다 잃고 도망쳐서 비렁뱅이로 사는 것은 싫었다.
말 머리를 돌리기까지 수도 없이 고민했고 결국 다시 이 자리에 섰다.
렉서스가 클라우드 공작의 등을 다시 떠밀 것을 알면서도.
클라우드 공작이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바닥을 옷에 문질렀다.
한 번 가졌던 권력을 놓을 수가 없었다.
단맛을 본 입은 계속해서 그것을 먹기를 바랐다.
“제게 맡겨만 주십시오, 폐하!!”
렉서스가 불길에 눌어붙은 클라우드 공작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가라. 가서 내가 원하는 걸 취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마.”
렉서스가 몸을 일으켰다.
힐로샤인으로부터는 아직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렉서스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절대로 혼자 가지는 않는다.
무엇 하나는 손에 쥐고 떠날 것이다.
***
렐라인을 비롯한 후궁들이 한곳에 모여 덜덜 떨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입니까?”
“난들 알겠어요!”
렐라인이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렐라인 또한 단꿈을 꾸며 이곳에 입궁했다.
입궁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런 난리가 날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었다.
밖에는 기사들이 무장한 채로 돌아다니고 있었고 시가지에는 불이 치솟았다.
텅 비어버린 거리가 생기를 잃은 것은 황성에서도 톡톡히 보였다.
렐라인을 비롯한 후궁들이 한곳에 모여 밤을 새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비명과 말발굽 소리가 그들을 괴롭혔다.
“아버님께는 연락이 안 되십니까?”
여기서 가장 큰 세를 쥐고 있는 것은 플랜스 백작가다.
다른 후궁들이 렐라인에게 매달리고 있는 이유였다.
렐라인이 입술을 질겅거렸다.
안 그래도 눈을 뜨자마자 플랜스 백작가에 사람을 보냈다.
하지만, 그조차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플랜스 백작은 렐라인을 황실로 보내고 바라던 대로 중앙으로 들어왔다.
“……몰라요, 나도 모른다구요!”
렐라인이 소리쳤다.
심장이 두려움에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내가 자네를 죽인다고 해도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레니샤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리는 듯했다.
엉망으로 잘려 나간 머리카락을 렐라인이 더듬거렸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최대한 틀어 올렸지만 렐라인은 그날 밤의 공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이던 흰 안광과 목덜미를 스치던 날카로운 칼날.
‘까불지 말았어야지.’
귀에 속삭여지던 낮은 목소리까지.
레니샤의 곁에 있었던 하녀였다.
렐라인은 레니샤가 정말로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도망칩시다.”
후궁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죽느니 차라리 도망칩시다. 황제 폐하를 모시고 도망쳐요, 우리.”
세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렉서스를 데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