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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끝은 있는 법 (112/135)


112화. 끝은 있는 법
2023.04.25.



 
렐라인이 정의감에 휩싸였다.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렐라인이 렉서스를 이 궁에서 구할 수 있었다.

렉서스는 황제다.

그리고 지금 후계자는 어린 아기일 뿐이었다.

렉서스만 무사하다면 이 위험은 어떡해서든 뒤엎을 수 있었다.

플랜스 백작을 위시하여 클라우드 공작,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도울 것이다.

적법한 황제가 제자리를 찾는 걸 누가 만류하겠는가.


‘그때가 되면 내가 황후가 될 수도 있어!’

렐라인의 욕망이 불타올랐다.

렐라인 또한 플랜스 백작에게 들은 것들이 있었다.

모든 상황을 유추해 보았을 때 지금 이 난리의 주범은 레니샤일 것이다.

힐로샤인과 로테라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 분명했다.

반역자를 잡고 나면 반역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레니샤가 떠나고 나면 렐라인이 유력한 황후 후보!

렐라인이 낳은 자식이 다음 대 황제가 되는 것이다.

렐라인이 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황제 폐하 없이는 우리도 위험할 것 같군요.”

후궁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제 한 몸 도망치기도 힘든 와중에 렉서스를 굳이 챙겨서?

렐라인은 몰라도 그들은 렉서스의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렐라인이 그들의 망설임을 알아차렸다.


“황제 폐하도 없이 우리가 나가면 다들 좋아하실까요? 우리는 이미 황제에게 팔린 몸이라는 걸 잊으신 겁니까? 게다가 밖에 있는 우리 가족들도 이미 황제와 한배를 탔습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정녕 모르시는 건가요?”

렐라인이 목소리를 키웠다.


“그건 그렇지요.”

“아버님께서도 저 하나는 반겨주시지 않을 겁니다.”

후궁들이 동조했다.


“그러면 준비를 마치고 이 자리에 모이는 겁니다.”

렐라인과 후궁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사명감이 그들을 휘어 감았다.

이 제국의 명운이 그들의 손에 달린 것이다.

***

헤일린이 망루에 서서 아래를 응시했다.

새빨갛게 타고 있는 숲이 눈에 들어왔다.

황무지였던 힐로샤인에 저 숲을 만든 것은 카시우스였다.

카시우스와 레니샤만 있다면 저 숲을 다시 수복할 수 있었다.

힐로샤인 성을 지켜낼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아깝지 않으리라.

절대적인 열세에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전략이 중요했다.

헤일린은 불화살을 준비시켰다.

힐로샤인의 대기는 건조한 편이었다.

나무가 자란 것은 전적으로 뱀 신의 힘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헤일린의 불화살은 메마른 나무줄기에 불을 붙이기 충분했다.

숲에는 금세 불이 옮겨붙었고 그 불은 황제의 군대를 불태웠다.

저 안에는 분명 많은 생명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숲이 생기면 이끼가 자라고 열매가 맺힌다.

그것을 먹고 사는 새와 작은 동물들이 생겼을 것이고 그들을 쫓아 덩치 큰 짐승들도 터를 잡았겠지.

그들의 비명이 헤일린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헤일린이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몸을 돌렸다.

불이 소강되고 있었다.

남은 군사들이 힐로샤인의 성벽을 넘으리라.

헤일린이 테리언에게 말했다.


“시가지의 지형을 이용해서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네. 전면전에는 답이 없어.”

“저도 동의합니다. 수적인 열세에 훈련 기간마저 부족하니 오합지졸이지요. 거기에 기사들을 전부 믿을 수도 없습니다.”

“이족들과 힐로샤인의 기사들을 한데 모아서 조를 짜고…… 다른 이들을 배치하게. 구역을 5개로 나누어 그들을 보내게.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시가지 지형에 따른 함정을 파도록 하게. 기회는 지금뿐이야. 저들이 우왕좌왕하며 전열을 가다듬는 지금!”

“네, 헤일린 님!”

테리언이 격앙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일린은 온실 속 화초 같은 귀부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힐로샤인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테리언의 걱정이 한 겹 더 걷혔다.


“……우리는 힐로샤인을 지켜내야 할 뿐만 아니라 레니샤의 뒤를 지켜야 하네. 이 전쟁을 끝내고 얼른 제도로 진격해야 해.”

“그러실 수 있을 겁니다.”

이미 메테오를 위시한 지원 병력을 보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리라.

히엔트리의 근본을 뒤흔드는 반역이었다.

분명 반발 세력도 있을 것이고 레니샤를 제치고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화재도 그렇듯이 이런 일도 초기 진압이 중요했다.

그들에게 넘을 수 없는 힘의 차이를 보여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힐로샤인의 뒷받침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레니샤가 헤일린과 테리언을 믿고 힐로샤인을 맡겼으니 믿음에 보답할 차례였다.

헤일린이 드레스 대신에 갑옷을 입었다.

힐로샤인의 아낙들은 호미를 들고 검은 비늘을 캐는 대신에 거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뜨거운 물을 팔팔 끓여 끈적한 밀가루 풀을 만들었다.

농부들은 가시덤불을 걷어다가 거리에 함정을 만들었다.

커다란 돌을 주워 모아 지붕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단련한 카시우스의 기사들과 이족의 전사들이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힐로샤인은 준비가 끝났다.

***



“미친 거 아닙니까? 정말로 숲에 불을 놓다니!”

기사 하나가 몸에 붙은 재를 털어내며 불만을 토해냈다.


“우리 쪽 피해는 어떻지?”

플랜스 백작이 침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4000명의 기사 중에 800을 잃었습니다. 부상병도 상당하고요. 저 미친 작자들이 숲에 불을 놓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보통 자주 써먹는 전술이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누가 제 자산에 불을 지르겠는가.

좋은 나무는 비싼 값으로 팔 수 있었다.

게다가 숲에서 채집과 사냥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는 영지민들도 있을 것이다.

힐로샤인은 그것을 미련 없이 포기한 것이다.


“그만큼 간절하다는 것이겠지.”

플랜스 백작이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손을 잡은 것 같았다.

본래대로 레니샤의 배에서 내리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배부르고 등 따뜻한 곳에 있을지도 모르지.

불나방처럼 화려한 불꽃에 홀려 렉서스의 손을 잡은 과거가 후회된다.

고요 속에 잠긴 힐로샤인 자체가 똬리를 틀고 숨을 죽이고 있는 검은 뱀처럼 보였다.

무엇으로 지었는지 유독 검은 성이었다.

확인을 해보았더니 일반 돌보다 단단해서 쉽게 무너질 것 같지도 않았다.


“……성을 기어 올라가서 넘는 수밖에.”

“밧줄을 준비시키겠습니다.”

플랜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것 같은 두려움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황제에게 떠밀려 힐로샤인으로 오면서 죽음을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었던 건지.

플랜스 백작이 실소를 흘렸다.


“물러설 길이 없으니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부상병들을 뒤쪽에 챙겨두고 우리는 성을 넘는다. 탈영하는 자는 죽음으로 죄를 다스리게. 한번 무너지기 시작하면 끝이야. 우리가 수적으로 유리하니 승산이 있을 걸세. 분명히.”

“네, 백작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힐로샤인에도 밤이 찾아오리라.

그때가 플랜스 백작이 생각하는 기회였다.

***

챙.

어둠을 깨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고리가 성벽에 걸렸다.

하나를 시작으로 여러 개의 밧줄이 성벽에 걸렸고 줄을 타고 기사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테리언이 숨을 죽이고 그들이 적당한 위치까지 오길 기다렸다.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하나, 둘, 셋…….’

“지금!!”

테리언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숨어 있던 기사들이 밧줄을 잘라냈다.

아래에서 화살이 비 오듯이 쏟아져 올라왔다.

테리언이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주워 아래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으아아악!”

“앞으로 진군하라! 성벽을 넘어 성문을 열어라!!”

재 냄새와 쇠 비린내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

테리언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저들을 막아서야 한다.

한 명이라도 발을 붙들 수 있다면……!


“저들이 성을 넘지 못하게 막아라!”

테리언의 머리 위로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테리언 경!!!”

테리언이 허리를 숙이자 뒤쪽에서 거대한 장검이 날아왔다.

그를 향해 달려들던 적이 뜨끈한 피를 뿜으며 꼬꾸라졌다.

테리언이 얼굴에 튄 피를 닦아냈다.

테리언이 시가지의 신호를 확인했다.

그사이에 다리를 향해 달려드는 검을 차내고 손에 든 검을 아래로 찔러 넣었다.


“커흑!”

테리언이 시체를 발로 차서 치우고는 다시 시가지 쪽을 응시했다.


‘됐다……!’

신호가 올라왔다. 모든 준비가 끝난 것이다.

테리언이 목청을 높였다.


“퇴각하라!!! 지금 당장 퇴각하라!!!”

테리언이 부상병의 목덜미를 붙들고 일으켰다.

그를 부축해 성벽 아래로 내려가며 외쳤다.

뿔피리가 울렸다.

그의 신호를 알아들은 기사들이 성벽 아래로 도주했다.

테리언의 것과 뒤섞인 피가 얼굴에 흘렀다.

테리언의 어깨가 무겁다.

동료의 뜨거운 숨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테리언 경…….”

“포기하지 말게. 자네가 나를 구했지 않나. 이번에는 내가 자네를 구할 차례야!”

테리언의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렉서스는 그들의 등을 밀어 쵸르파 평야로 보냈다.

지원이 끊긴 전쟁은 절망 속에서 이어졌다.

그들의 승리는 정말로 기적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렉서스는 그들을 어떤 취급을 했던가!

제대로 된 포상도, 대우도 없었다.

등을 떠밀어 힐로샤인으로 보냈다.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도 당연히 없었다.

테리언이 레니샤를 따르기로 다짐한 건 그녀가 렉서스와 다르기 때문이었다.

레니샤는 쵸르파 평야에 비석을 세웠다.

죽은 자들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었다.

거기에는 로테라 공작의 이름과 함께 기도문이 적혔다.

죽은 이들의 이름은 땅에 묻혔다.

그것을 전부 알아낼 수는 없으니 레니샤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레니샤는 그녀를 위해서 희생된 이들을 잊을 사람이 아니었다.

테리언은 레니샤의 인간됨에 반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묵묵히 하는 그녀를 말이다.

테리언이 이를 악물고 달렸다.


“죽지 말게! 최소한 딸은 보고 죽어야지!”

“하하……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한테 너무하십니다.”

희망의 빛이 다가오고 있었다.


“헤일린 님……!”

횃불 속에 드러난 얼굴은 헤일린이었다.

다친 동료를 의무반에게 넘긴 테리언이 경주를 마친 말처럼 널브러졌다.

헤일린이 그런 테리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잠시 쉬게. 이다음은 우리가 맡겠네.”

 

***

레니샤가 터지려는 숨을 삼켰다.

몸이 근육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다 왔어.”

레니샤를 뒤에서 밀어주고 있던 루나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몸이 고된 건 루나도 마찬가지였다.

레니샤가 계단 끝에 올라서서는 루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루나가 새초롬한 얼굴로 그것을 응시했다.


“밀려고?”

“그럴 리가 없잖아.”

레니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루나가 그 손을 잡고 마지막 계단을 올랐다.

검은색 문이 눈앞에 있었다.


“이 안에 렉서스가 있을 거야, 루나.”

루나가 허리춤의 검을 빼 들었다.

레니샤가 그것을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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