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렉서스가 바랐던 죽음
(113/135)
113화. 렉서스가 바랐던 죽음
(113/135)
113화. 렉서스가 바랐던 죽음
2023.04.28.
렐라인이 시종의 등을 떠밀었다.
“당장 이것을 황제 폐하께 드리라니까!”
“하, 하지만…… 저 안에 들어가면 제가 죽습니다!”
렐라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시간이 없었다.
레니샤가 황성 내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그녀도 들은 것이다.
레니샤가 언제 어디서 나타나 렉서스를 향해 검을 겨눌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황성에는 숨겨진 비밀 통로가 많았다.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렐라인이 뒤쪽으로 손짓했다.
그녀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가 시종의 목에 검을 겨눴다.
“들어가지 않아도 죽는다. 그래도 내 말을 어길 것이냐?”
렐라인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사실 렉서스의 광기에 대해서는 렐라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시종의 말대로 까딱하다가는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죽는 게 렐라인이 아니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이들은 황성의 소모품으로 존재하는 자들인데.
“얼른!!!”
렐라인의 호통을 못 이긴 시종이 문을 열었다.
황제의 침실로 들어간 시종이 고개를 숙이고 벌벌 떨었다.
“……카시우스의 목을 가져오기 전까지는 그 문을 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렉서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바닥에 깔렸다.
시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무, 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술도 가지고 왔습니다!”
렉서스가 보랏빛 눈동자를 위, 아래로 굴렸다.
시종이 숨을 죽였다.
렉서스의 심기를 조금만 거슬러도 죽는다.
요새 렉서스의 침실에서 목숨을 잃고 실려 나간 시종들의 수가 몇이던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진 않았다.
시종의 몸이 덜덜 떨렸다.
“……너. 겁을 먹었구나.”
렉서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그으…… 그으으…….”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시종을 보면서 렉서스가 피식 웃었다.
이래서 공포 정치를 하는 거다.
봐주고 풀어주면 제 주제도 모르고 까부는 것들이 많으니까!
레니샤는 아무것도 모른다.
레니샤는 순백의 깨끗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제 손으로 사람 한 번 죽여본 적 없는 새싹이나 다름없는 주제에.
‘무슨 수로 이 제국을 다스리겠다고!’
황제는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도 모르면서……!
황제에게는 사랑도 없고, 친구도 없고, 신하도 없다는 것을 렉서스도 황제가 되고 나서 알았다.
황제가 되기 전에는…… 그래, 그 이전에는.
레니샤를 달리 보던 시절도 있었다.
가슴에 담긴 것을 고스란히 표출하던 때도 분명히 있었다.
‘레니샤. 내가 너를 황후로 만들어줄 거야. 우리는 함께 이 제국을 다스리는 거야. 평생 함께…… 우리는 히엔트리를 대륙 최고로 만들 수 있을 거야!’
꿈과 희망에 가득 차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렉서스에게도 그런 순수가 존재했었다.
그날의 기억이 범람했다.
렉서스가 감상에 빠진 얼굴로 손을 뻗었다.
시종이 바쳐 올린 물잔을 손에 쥐었다.
찬물이 괜한 생각을 쫓아줄 것이다. 렉서스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가슴에서부터 싸함이 온몸에 퍼졌다.
렉서스가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가 보거라.”
“네, 폐하.”
시종이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방을 벗어났다.
렐라인이 시종의 앞을 버티고 섰다.
“어떻게 됐느냐?”
“……물을…… 물을 드셨습니다.”
“그래?”
렐라인이 환히 미소 지었다.
이것으로 됐다.
렐라인이 시종을 놓아주었다.
렐라인과 황제, 모두를 피해 달아나는 시종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졌다.
렐라인이 심호흡했다.
약이 돌기까지는 5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렐라인이 조심스럽게 렉서스의 침실 문을 열었다.
“……레라이…….”
어눌한 발음이 들려 왔다.
침대에 기댄 채로 널브러진 렉서스가 보였다.
렐라인이 렉서스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렐라인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렉서스가 축 늘어졌다.
약 기운에 풀린 보랏빛 눈동자가 여전히 형형하다.
만약, 지금 렉서스에게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렐라인의 목을 조르고도 남았으리라.
렉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다 폐하를 위한 일이에요. 레니샤가 사라졌대요. 언제 어디서 폐하를 노릴지 몰라요. 후일을 위해서 몸을 보전하셔야 합니다.”
렐라인이 렉서스의 뺨을 쓸었다.
멋대로 황제의 몸에 손을 대는 건방짐에도 렉서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렉서스의 차가운 눈빛에도 렐라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렉서스에게 마비약이 먹혔다는 걸 확인한 까닭이었다.
렐라인이 일어서려다가 몸을 도로 숙였다.
렉서스의 입술에 허락도 없이 입을 맞춘 렐라인이 생긋 웃었다.
“이렇게 계시니 좋네요. 마음대로 입도 맞춰보고.”
렉서스가 입술을 벌렸다가 힘없이 다시 닫았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렐라인을 노려보는 눈동자는 살벌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시면 좋을 텐데. 그런 날이 올 수도 있겠죠?”
렐라인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렐라인이 뒤쪽을 향해 눈짓했다.
기사가 머뭇거리다 렉서스를 등에 업었다.
“언젠가는 제게 고마워하실 거예요, 폐하.”
렉서스가 진탕된 머리로 생각했다.
언젠가 저 가는 목을 꺾어 반드시 주제를 알게 해주겠다고.
이런 치욕감을 안겨준 건 저 정신 나간 여자가 처음이었다.
***
레니샤가 렉서스의 침실을 둘러보았다.
술병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방 안은 따뜻했다.
레니샤보다 먼저 침실을 확인한 루나가 혀를 짧게 찼다.
“방금까지도 사람이 있었어.”
루나가 바닥에 떨어진 잔들도 확인했다.
콧잔등을 찡그린 루나가 잔을 내던졌다.
“마비산이야.”
“렉서스가 당했다는 건가?”
“흔적을 봐서는 누군가 데리고 나간 것 같은데?”
레니샤가 창가를 향했다.
몸은 천근만근이고 피로가 레니샤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지만 확인해야 했다.
레니샤가 발코니를 열어젖혔다.
끈적한 어둠이 레니샤의 발밑에 고였다.
레니샤가 난간을 짚었다.
그건 아마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렉서스의 도주로가 반드시 보일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레니샤와 렉서스의 눈이 마주쳤다.
렉서스는 늘어진 채로 기사의 등에 업혀 있었고 후드를 눌러쓴 무리가 잰걸음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렉서스의 머리에도 두꺼운 후드가 씌워져 있었음에도 레니샤는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렉서스.”
레니샤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돋았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원수였다.
렉서스의 목숨을 끊기 위해서 여기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보라색 눈동자가 레니샤를 직시했다.
렉서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힘없이 레니샤를 부르고 있었다.
살의가 들끓었다.
이건 분명히 살의였다.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감이 싹 사라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고 이마의 혈관이 불거졌다.
“루나.”
“저놈을 쫓아가면 돼? 다 죽여?”
레니샤가 혀로 입술을 훑었다.
짧은 시간 동안 수만 가지의 생각이 가슴에 고였다가 흩어졌다.
레니샤는 렉서스의 눈동자에 가득 들어찬 열등감과 패배감을 알아차렸다.
놈은 이미 지옥일 것이다.
레니샤가 웃음을 흘렸다.
“저 목숨을 내 손에 쥐고 싶어.”
레니샤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황제가 되는 걸 저놈이 봤으면 좋겠어.”
레니샤가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루나를 응시했다.
“이대로 그냥 죽이는 건 너무 자비롭잖아. 놈은 좀 더 괴롭고 고통스러워야 해. 죽을 것 같은 지옥불 속에서 불타야 한다고!”
레니샤의 기세에 밀려 루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저놈이 반드시 그걸 보게 해줘. 내가 황제가 되는 모습을!”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열망에 루나가 침을 삼켰다.
레니샤는 정상이 아니었다.
“너…… 이상해.”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했어?”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절망을 딛고 다시 서야 했었던 때부터 레니샤는 미쳐 있었다.
그저 감추고 억눌렀을 뿐이다.
“어떻게 정상일 수 있을까. 내 가족이 죽고, 가문이 멸문당했어. 저놈 하나로 인해서!!”
레니샤가 바깥을 손가락질했다.
지금의 레니샤는 광인처럼 보였다.
레니샤가 루나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 깡마른 몸에서 어떻게 이런 악력이 나오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간 보지 못했었던 레니샤의 바닥이었다.
루나가 뒷걸음질치다가 레니샤에게 끌려갔다.
레니샤가 루나를 난간에 몰아세운 채로 렉서스가 도망치는 것을 가리켰다.
“꼬리 말고 도망치는 저 쥐새끼를 봐! 루나, 저놈은 더 망가져 봐야 해. 비루하고 비참하게, 가장 저질스럽게 죽어야 한다고!”
루나가 침을 삼켰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레니샤의 분노와 절망을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다.
그건 루나가 레니샤가 되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레니샤는 제 가족을 도륙한 놈의 곁에서 8년을 버텼다.
레니샤의 정신은 몇 번이나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 버텼던 것은 악이었다.
레니샤의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루나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해달라는 대로 해줄게. 쫓아가면 돼?”
짜증나게 마음 쓰이는 여자다.
레니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놓치지 마.”
“알았어.”
루나가 훌쩍 몸을 날렸다.
정원수를 타고 내려가는 폼이 수준급이었다.
레니샤가 난간을 쥔 채로 렉서스가 도망치는 길을 응시했다.
렉서스는 끝까지 눈을 돌리지 않았다.
레니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렉서스는 그토록 발버둥을 쳤었던 거다.
레니샤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심장이 녹아 흐르는 것 같은 눈물이었다.
놈을 죽여도 죽은 자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 절망감이 지금 레니샤의 발목을 붙들었다.
렉서스는 황성을 떠났다.
그토록 집착하던 것을 전부 잃은 채로 끌려갔다.
“아버지…….”
레니샤가 난간을 붙든 채로 천천히 무너졌다.
바닥에 주저앉은 레니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니…….”
레니샤가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냈다.
발밑이 무너졌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겼다.
이쯤 되면 마를 법도 한데 그녀의 심장에선 여전히 흐를 피가 있나 보다.
마음이 먹먹했다. 목이 꽉 막혔다.
레니샤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적셨다.
한참 동안이나.
***
렉서스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그는 레니샤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녀를 응시했다.
결국 레니샤는 남겨졌고 렉서스는 궁을 떠났다.
‘기어이…….’
운명은 거스를 수 없는 건지.
렉서스가 숨을 헐떡이며 웃음을 흘렸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되었다.
렉서스는 마지막을 황성에서, 레니샤의 옆에서 장식하고 싶었다.
레니샤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숨을 거두고, 그 또한 죽는 거다.
얼마나 유의미하고 장대한 죽음이던가!
레니샤의 가슴에 그의 존재를 가장 크게, 오랫동안 새겨 넣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키…… 킥…….”
렉서스의 간헐적인 웃음소리가 바람과 함께 흩어졌다.
눈물이 턱을 적셨다.
결국 렉서스는 시간에 밀려 잊히게 될 것이다.
레니샤의 마음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