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침묵하던 신전의 선택
(116/135)
116화. 침묵하던 신전의 선택
(116/135)
116화. 침묵하던 신전의 선택
2023.05.09.
역사가 전복되었다.
렉서스는 제국을 평정한 강인한 군주가 아닌 패배자, 살육자로 기록될 것이다.
신전 또한 그 시류에 몸을 실을 때였다.
대신관이 머리를 움켜쥐었다.
신전에는 연일 암문이 맴돌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운 황제 측에서는 빠른 즉위식을 준비하길 원하고 있었다.
또한 새로운 인장 반지라니?
히엔트리를 완전히 뒤집겠다는 것 아닌가!
그간 신전이 강화된 황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황족이 세 뱀 신의 가호를 받은 히엔트리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테라 가문에 그런 신성성이 있는지는 논의해볼 문제였다.
늦은 저녁이 되면 슬그머니 꽁지를 빼고 사라지던 고위 성직자들이 신전을 떠나지 못하고 탁상공론을 이어가고 있는 이유였다.
“레니샤 로테라를 황제로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위상이 바닥으로 떨어질 겁니다. 세 뱀 신이 노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대신관님, 신중하셔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신전이 나서서 레니샤 로테라를 대신할 다른 히엔트리 가문의 자손을 황제로 세우게 하셔야 합니다.”
결국, 손에 쥔 권력을 놓을 수 없다는 거다.
대신관도 신전의 이익을 완전히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레니샤를…….
‘그 여자를 거슬렀다가는 다 죽을 수도 있어.’
대신관의 묵직한 눈빛이 올망졸망 모여 앉은 신관들의 얼굴을 살폈다.
지금 저들은 레니샤를 겪어보지 못해서 저렇게 순진한 소리를 하는 거다.
신관들이 입맛대로 고른 히엔트리의 핏줄을 황제로?
“레니샤 로테라를 우습게 보지 마시게. 손가락 하나로 이 제국을 뒤집은 여자야. 그 여자가 움직이고 있는 자들을 생각해보게. 과거 로테라의 자손들, 영웅 카시우스, 샴디르, 거기에 덴버스 후작에 사교계를 주름잡은 마담 투리엘까지.”
대신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불안하게 입술을 달싹이던 신관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히엔트리에서 거한 자리 하나씩 잡은 자들은 전부 레니샤 로테라를 따르고 있네. 그 여자가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부려 지금 자리에 올랐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나. 레니샤 로테라에게는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는 거야.”
대신관이 침음을 흘렸다.
황제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인망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들은 직접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타인을 움직이게 하는 지휘자나 마찬가지였다.
레니샤 로테라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
심지어 목숨을 걸고, 오로지 레니샤 로테라만을 위해서.
그런 걸출한 인물은 시대를 이끄는 법이고, 오히려 히엔트리에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판이다.
게다가 레니샤 로테라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잔혹해질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대신관이 눈을 아래로 내렸다가 치켜떴다.
“……카나리아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네.”
“헉!”
“지금 어린 황자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들 하지. 거기에 레니샤가 관여하지 않았을 확률이 있을까?”
신관들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나는 레니샤라는 배에 올라타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데. 레니샤 로테라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요청했네. 이족들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황가의 인정.”
“……대신관님…….”
“나는 차라리 레니샤 로테라에게서 신성성을 찾는 것이 더 안정성이 있을 거라고도 생각하네. 새로운 황제가 우리를 존중하는 의사를 내비치고 있지 않나.”
새로운 인장을 들먹이며 황제로서의 인정을 신전에 요청한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그들의 의견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레니샤가 신전에게 내미는 평화의 손길이었다.
이것을 굳이 쳐버릴 필요가 있을까.
대신관이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레니샤 로테라는 바란다면 신전 개혁도 감행할 걸세. 여기에 털어서 먼지 한 톨 안 나올 사람이 있겠나.”
분위기는 점점 침체되었다.
탁상공론을 일삼던 자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고 있던 가장 어린 신관이 손을 슬쩍 들었다.
“저…… 히엔트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무거운 분위기 속에 퍼진 낭랑한 목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히엔트리는 황무지였다지요? 그게 검은 뱀의 힘에 짓눌려 그랬다는 이야기가 있잖습니까.”
“고대 기록에 따르면 그렇다네.”
대신관이 대답했다.
가장 높은 이와 말을 섞고 있다는 고양감에, 촛불에 비친 어린 신관의 뺨이 복숭아처럼 익었다.
흥분에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어린 신관이 목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말했다.
“붉은 뱀의 힘이 검은 뱀의 힘과 융합을 이루어 그곳에 꽃을 피워냈다고 합니다.”
다들 들어본 이야기였다.
“그리고 로테라는 본디 힐로샤인에서 시작된 가문이었지요. 로테라와 카시우스 공이 결합하여 하나가 되었으니 로테라라는 가문에는 검은 뱀과 붉은 뱀의 신성성이 뒷받침됩니다.”
대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고려하고 있었던 이야기였다.
사실 이야기는 입맛대로 만들어내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신전의 역할을 끼워 넣는 것이 중요했다.
“게다가 훗날 레니샤가 낳을 아이가 황제가 된다면 황족의 신성성은 완성될 겁니다. 거기에…….”
어린 신관이 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힐로샤인을 제2의 제도로 삼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제2의 중앙 신전을 힐로샤인에 세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대신관이 손을 얼굴에서 떼어냈다.
기대하지 못했었던 해답이 어린 신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네 지금…….”
“세 뱀 신의 계시를 받아 새로운 신전을 힐로샤인에 세우는 거죠. 이건 레니샤 로테라를 뒷받침해줄 근거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자리도 지킬 수 있는 방법 아닐까요?”
지금까지 세 뱀 신을 기리는 신전은 오로지 제도에만 있었다.
중앙 신전이라고 불림과 동시에 단일 신전이었던 것이다.
지방에는 작은 제단만이 존재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신전을 나누어 힐로샤인에 하나 더 세우자는 주장이었다.
이건 대단한 파급력을 가져올 것이 분명했다.
제국민들을 이끄는 것은 황제겠지만, 그들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신앙심이다.
대신관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간 속에 얹혀 있던 것이 쑥 하고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좋은 방법이로군!!!”
***
레니샤가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운을 걸치고 침대가에 앉은 카시우스가 레니샤의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레니샤의 관심을 빼앗아 간 종잇조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심술부리듯 이를 세워도 레니샤는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한숨을 내쉬곤, 그녀의 맨어깨에 입술을 꾹 누르며 카시우스가 목소리를 흘렸다.
“신전에서 가져온 대답이 마음에 듭니까?”
늦은 밤, 황성의 문을 두드린 심부름꾼이 가져온 편지에는 신전의 대답이 정성스럽게 적혀 있었다.
“신전에서 힐로샤인의 신성성을 인정하겠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레니샤가 몸을 빙글 굴렸다.
손에 들려 있었던 편지를 카시우스에게 내밀었다.
카시우스가 머리를 쓸어 넘기곤 내용을 읽었다.
레니샤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신전에서 제 건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전에서는 붉은 뱀의 힘을 받아들인 카시우스를 말미암아 이족들에게서 이단의 표식을 거둘 겁니다.”
카시우스의 눈이 커졌다.
레니샤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런 카시우스를 응시했다.
이불을 끌어당기며 몸을 일으킨 레니샤가 카시우스에게 몸을 붙여 앉았다.
그가 보이는 모든 반응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뺨을 손으로 쓸었다.
“이족들은 자유가 되겠지요.”
카시우스가 고개를 들어 레니샤를 응시했다.
여전히 이족들은 쫓기는 도망자 신세였다.
그들에게 생각지도 못했었던 선물을 준 것이다.
그들은 정착하여 살아갈 수 있을 테고, 어린 아이들도 산을 타고 도망치는 법 대신 산학과 신학, 법학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카시우스도 주지 못한 것을 레니샤가 선물했다.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여 카시우스의 입술에 키스했다.
“나의 히샴.”
카시우스의 목울대가 울렸다.
잊고 있었던 명칭이었다.
이족의 히샴.
지배자의 이름이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가족들을 지키고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게 영광을 되찾아줄 수 있게 된 것이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목에 키스했다.
“당신이 내게 준 것만큼 귀한 것을 주고 싶었어요.”
“레니샤, 나는…….”
카시우스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였다.
카시우스는 아무리 해도 레니샤를 따라갈 수 없었다.
카시우스가 가랑이가 찢어지도록 달려가면 레니샤는 그보다 한 걸음 더 앞서간다.
레니샤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일까?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을 끌어다가 제 가슴팍에 올렸다.
작은 새가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포근한 울림이 카시우스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카시우스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싶더니 기어이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기대하고 있었던 걸까?
레니샤가 생긋 미소 지었다.
“당신은 여기에 심어진 나무 같아요, 카시우스. 당신은 내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더군요. 나를 따라오는 자들은 모두 바라는 것이 있어요. 메테오 왕자는 샴디르를 위해서, 마담 투리엘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움직이죠.”
레니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미소가 깊어졌다.
카시우스를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고개를 돌리면 반드시 그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카시우스는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그녀를 홀로 둔 적이 없었다.
늘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레니샤의 곁을 지켰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손바닥에 키스했다.
“그런데 당신은 겨우…….”
레니샤의 눈빛이 흐려졌다.
카시우스가 바란 건 겨우, 레니샤였다. 그녀 자체.
“나 하나만 바라보더라고.”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를 짚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레니샤를 보며 카시우스가 눈을 깜빡였다.
레니샤에게 정신 지배라도 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력했다.
손가락 하나 멋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카시우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뛰었다.
“그래서 더 귀한 걸 주고 싶었지.”
레니샤의 목소리가 점점 은밀해졌다.
카시우스를 향해 몸을 숙인 레니샤의 어깨를 타고 이불이 흘러내렸다.
이건 의도적인 짓이 분명하다.
레니샤는 카시우스를 유혹하기 위해 나타난 세이렌이었다.
카시우스가 홀린 듯 레니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레니샤가 카시우스의 어깨에 고개를 얹은 채로 숨을 흘렸다.
“또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봐, 카시우스.”
레니샤가 고개를 돌려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카시우스의 목덜미가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 밤, 카시우스를 지배하는 건 레니샤였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카시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