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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대가 (117/135)


117화. 대가
2023.05.12.



 
신전이 레니샤 로테라에게 굴복했다.

렉서스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이건 전부 예견되어 있었던 일이었다.

히엔트리의 신성성 따위는 개나 준 지 오래 아니던가.

히엔트리가 존속되어온 시간 동안 황족의 피는 옅어질 만큼 옅어졌다.

사실상 렉서스에게서도 그 정통성을 찾는 건 무의미한 일이 아니던가.

비렁뱅이 황자가 황제가 되었으니 말이다.

렉서스는 이전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초월한 허탈한 얼굴.

고목처럼 메마른 얼굴에 날이 선 눈동자는 까맣게 죽어 있었다.

렉서스의 앞 테이블에는 신문이 놓여 있었다.

플랜스 백작은 렉서스를 다시 황제로 추대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뛰어다니고 있는 모양이지만, 글쎄.

이미 세상은 승자의 편에 서 버린 것을.

아무도 렉서스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렉서스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레니샤가 모를까?

렉서스는 레니샤가 모든 걸 관망하고 있는 중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궁지에 몰아넣은 쥐처럼, 아무것도 못할 것을 아니까 지켜보고 있는 거다.

레니샤는 원한다면 언제든 독수리가 먹이를 채듯이 렉서스의 목덜미를 채갈 수 있었다.

렉서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시가를 헤집었다.

매캐한 시가 연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무력하다. 동시에 스스로가 환멸스러웠다.

시가를 문 렉서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차라리 죽여줘, 레니샤.”

렉서스가 중얼거렸다.


“나를 이렇게 살게 하지 마…….”

다 갈라진 목소리가 툭 하고 튀어나왔다.

렉서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용기도 없었다.

레니샤에게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잊힐 수는 없었다.

반드시, 레니샤의 손에 죽어야 한다.

렉서스가 짧아진 시가를 짓눌러 껐다.


‘황성으로 돌아가야 해.’

레니샤의 앞에서, 그녀의 손으로 죽어야 한다.

기이한 열망이 렉서스를 가득 채웠다.

멍청한 플랜스 백작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품고 있는 부질 없는 희망에 불을 붙여주면 렉서스를 등에 업고 황성으로 내달릴 것이다.

렉서스가 얇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테이블에 스산하게 놓여 있던 종을 흔들었다.


“플랜스 백작을 만나야겠다고 전해.”

“네, 폐하.”

렉서스는 여전히 이 고립되어 있는 작은 저택에서 황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

렉서스가 씁쓸한 입 안을 혀로 훑었다.

눈앞을 흐리게 하는 담배 연기만큼이나 그의 미래도 흐릿했다.

아…… 렉서스가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를 떠났던 유령들이 돌아왔다.

무거운 얼굴로 맨 앞에 선 것은 로테라 공작이었다.

항상 보랏빛으로 질려 있었던 희뿌연 얼굴이 지금은 희게 갠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유령들이 렉서스를 손가락질했다.


[깔깔깔. 그것 보아라, 렉서스. 너는 모든 걸 다 잃지 않았느냐!]

렉서스의 손에 목숨을 잃은 영혼들이 낄낄대며 렉서스를 비웃었다.


[나는 네가 이런 꼴이 되는 걸 기다렸다! 준 만큼 돌려받는 법이지! 네깟 게 무슨 황제라고.]

렉서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경고했지 않습니까.]

로테라 공작의 목소리가 끈적하게 눌어붙었다.


[지금 이 순간을!]

 

***

한편, 힐로샤인은 다른 의미의 적막으로 젖어 있었다.

이번 세대에 남은 마지막 로샤의 눈물.

헤일린이 손안에 들린 병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며칠 동안 로샤의 눈물에 대한 기록을 뒤져 보았다.

가장 최근에 이 약을 복용한 것은 샴디르의 왕녀다.

지금 제도에 있는 메테오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었다.

메테오의 여동생은 더 이상 앞을 보지 못한다.

그게 그녀가 목숨을 구한 대신에 치른 대가였다.

메테오의 말에 따르면 왕녀는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긴 했지만, 그녀는 그런대로 잘살고 있다고 했다.

목숨을 건져, 두 팔로 제 가족을 안아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한다고.

헤일린은 그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브릭스턴은 어떤 선택을 원할까.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브릭스턴을 보는 헤일린의 표정이 점점 가라앉았다.


“브릭스턴.”

갈고리로 긁어낸 것 같은 목소리였다.

헤일린의 선택으로 브릭스턴의 미래가 결정되는 것이다.

헤일린이 멍하니 브릭스턴을 응시했다.

침대에 누운 브릭스턴의 몸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헤일린과 이사벨라에게는 브릭스턴이 필요했다.

브릭스턴이 걷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브릭스턴이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헤일린이 손에 들린 병을 움켜쥐었다.

이젠 결정해야 할 때다.


“……약을 먹이게.”

헤일린이 무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헤일린으로부터 병을 받아든 의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이기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일린이 아는 브릭스턴이라면 그녀를 용서할 것이라 믿는다.

브릭스턴의 벌어진 입으로 약이 넘어갔다.

헤일린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

헤일린의 손에는 브릭스턴 말고도 많은 것들이 달려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이족에 관한 일이었다.

신전에서는 이족들에 대한 이단 표식을 철회했다.

더 이상 이족들을 핍박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이족들이 정당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니카.”

헤일린이 신문 기사를 예니카 앞에 밀어주었다.

예니카가 떨리는 눈으로 신문 기사를 응시했다.

뿌연 눈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무엇인지 알만했다.

헤일린이 말을 이었다.


“신전의 공식 발표가 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이제 온 대륙 사람들이 이족들의 억울함에 대해서 알게 될 거예요.”

“…….”

“더 이상 이족들은 배척받아야 할 이단이 아닙니다.”

긴 세월, 핍박받았던 설움의 역사가 끝난 것이다.

예니카가 신문 위를 떨리는 손으로 더듬었다.


“……안 죽고 살아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봅니다.”

예니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새로운 황제는 이족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새로운 황제라고 하심은……?”

“레니샤 로테라입니다. 아직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 임시일 뿐이지만. 더 이상 레니샤를 대체할 이는 없으니까요.”

헤일린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곧 돌아온다던 레니샤는 황성에 뿌리를 내렸다.

기어이 약속한 일을 이루어낸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겁니다, 예니카. 더 이상 이족들은 핍박 받지 않을 거고, 힐로샤인은…….”

헤일린이 태양의 붉은 빛에 물든 대지를 응시했다.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게 된 땅이었다.

사람들이 복작거리며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고 있었다.

핍박과 설움의 역사를 털어낸 것은 힐로샤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렉서스의 억압은 전 대륙에 드리워져 있었다.

폭군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빛이 들어찼다.


“힐로샤인으로 황성이 이주해올 것입니다.”

헤일린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레니샤는 완전히 새로운 제국을 바라고 있어요. 옛것은 전부 버릴 생각이지요.”

예니카가 놀란 얼굴로 헤일린이 있는 쪽을 응시했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레니샤가 하는 일 중에 쉬운 일은 없었지요. 황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였고요. 많은 피가 흘렀고, 황성은 썩어들어 가고 있습니다. 렉서스뿐만이 아닙니다. 지난 몇 세기 동안 축적되어온 독이 제도에 고여 있어요. 쇄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예니카가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 우리는…….”

“이족들은 새로운 황제를 지지하고,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도운 종족으로 새롭게 도약하게 될 겁니다.”

헤일린이 편지를 내밀었다.


“레니샤 황제가 보낸 편지입니다. 여기에는 예니카가 알아야 할 것들도 적혀 있더군요.”

“…….”

“이족들은 힐로샤인을 지키고 폭군을 몰아내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 걸맞은 상을 내릴 것이니 황성으로 즉시 출발하라.”

헤일린이 느린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 주었다.

예니카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예니카께서 제도로 갈 인원을 추려 주셔야겠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우리에게 작위라도 내린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생각됩니다. 본디 대대로, 개혁이 있을 때 공신들은 작위와 땅을 수여 받았었지요.”

예니카의 눈꺼풀이 떨렸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더 이상 이족들은 독립적인 종족으로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결국, 이족들의 문화는 사라지고 히엔트리에 흡수되겠지.

도망자로 살았던 과거와는 다를 것이나, 어떤 면에서는 흡사했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레니샤는 지금 선택을 종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을 표방하고 있지만 결국 이족들을 그녀의 아래로 흡수하려는 거였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압니다, 예니카. 레니샤는 부드러운 폭군이지요.”

헤일린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이것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카시우스 로테라 공작이 있는데 무슨 큰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레니샤는 더 이상의 기회를 이족들에게 제공하지 않을 겁니다. 예니카, 과거를 잊지 마십시오. 히엔트리 또한 이족에게 죄를 지었으나, 반대로 이족들 또한 히엔트리에 빚이 있다는 사실을요. 레니샤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는 겁니다.”

예니카의 손이 꿈틀거렸다.

헤일린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선조부터 내려온 이족들의 죄가 예니카의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사람을 골라 직접 제도로 가십시오.”

헤일린이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부탁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니카. 당신과 이족, 그리고 힐로샤인을 위해서 명령하고 있는 겁니다. 힐로샤인의 임시 영주로서.”

예니카가 멀거니 헤일린을 보았다.

보이는 건 없지만 그녀에게선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따르겠습니다.”

 

***

헤일린이 텅 빈 복도를 느린 속도로 걸었다.

브릭스턴이 깨어났다는 소식이 헤일린의 심장을 두드렸다.

반가움과 함께 두려움이 치솟았다.


‘로샤의 눈물이 명약은 맞나 보네.’

헤일린이 숨을 크게 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녀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를 마주할 시간이었다.

브릭스턴의 침실 앞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그사이를 비집고 달려 나온 이사벨라가 헤일린의 다리에 매달렸다.


“어머니……! 아버지가 깨어나셨어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이사벨라라고 불러주셨어요!”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한껏 격앙되어 있었다.

세월에 휘말려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어온 아이다.

헤일린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아이의 등을 쓸어주었다.

아이답지 않게 마른 몸이 헤일린의 마음을 들쑤셨다.


“다행이구나, 이사벨라.”

헤일린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길을 텄다.

그들 사이로 브릭스턴이 보였다.

침대에 앉아 그를 보고 있는 브릭스턴이 말이다.

브릭스턴이 천천히 그녀를 향해 팔을 벌렸다.


“헤일린.”

이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애정이 가득 담긴 부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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